[기고/문근찬 대표] 자유 체제란 결국 자유 보수주의 체제다
[기고/문근찬 대표] 자유 체제란 결국 자유 보수주의 체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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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체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는 사회라는 정도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개인의 결사체인 기업의 자유가 없는 사회는 자유 체제인가? 완전 국유화가 아니니 된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오늘날 우리 의회가 ‘경제민주화’를 내세워 대기업을 규제하려고 하는 이른바 공정경제 3법은 대기업의 재벌 총수가 주인으로서 경영하는 권리를 철저히 속박하는 제도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는 자유 체제의 반대 쪽에 자리하고 있는 전체주의 체제는 아닐지 모르지만 자유 체제라고 하기는 어렵다. 일반 대중은 자유를 누리지만 대기업은 재벌은 소수의 특권층이니 속박당해도 된다고 한다면, 이는 자유 체제의 기본 원칙인 법치에 어긋나는 것이다. 법치는 사람의 그룹을 차별하면서 법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 예에서 보듯이 피상적인 용어 정의로는 자유 체제의 구체적인 모습을 이해한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자유 체제란 결국 자유 보수주의 체제라고 이해한다면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한 것으로 생각된다. 자유 보수주의 체제는 모든 제도에 변화를 줄 때는 기존의 전통을 존중하고, 변화에는 검증된 도구를 사용해서 아주 조심스럽게 진행한다. 이렇게 질서가 있는 사회라야 자유를 생각할 수 있다. 반면에 이른바 진보주의는 인간 이성을 절대적으로 과신한 결과 모든 변화가 급진적이고 과격하다. 그런 상황에서 개인의 자유가 보호될 리 없다. 보수주의가 전통을 존중하는 이유는 유구한 세월을 거치며 진화해온 제도나 전통은 수많은 선인의 지혜가 녹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에 진보주의는 그런 것을 다 무시하고 자신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좋은 제도를 다양하게 설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보수주의라 하면 젊은이들로부터 ‘수구 꼴통’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그 반대 개념인 진보는 역사적인 근원을 보면 프랑스 혁명을 떠올릴 수 있듯이 급격한 진보는 자연스럽게 폭력과 공포정치로 이어지고, 그 도착지는 전체주의 체제다. 늘 진보는 어떤 절대 개념을 내세우며 자유를 억압하고, 종국에 전체주의가 되면 자유를 말살한다. 역사적으로 진보는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계몽주의는 인간이 이성을 가진 존엄한 존재임을 일깨운 공헌이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멈출 데를 몰랐다. 이성주의는 인간 이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한다. 프랑스 혁명 때 루소의 일반의지(general will)라는 실증할 수도 없고 아무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개념이 프랑스 혁명 시 폭력의 정당성이 되어 모든 전통과 질서를 파괴했다. 루소의 철학을 내세운 로베스피에르의 폭력은 전체주의로 이어졌을 뿐 19세기에 견고해진 자유 체제에 이바지하지 않았다. 이렇게 루소에서 히틀러까지의 직선 속에 로베스피에르, 마르크스, 스탈린을 잇는 노선 모두는 그들 시대의 이성주의에서 자라났는데, 모두 전체주의로 귀결되었다.

현재 한국 사회는 어쩌면 ‘공정’의 노예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10여 년 전 미국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이라는 철학자가 대학에서 강의했던 강의 노트를 정리한 책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100만 부 이상 팔렸는데, 이 책은 막상 미국 본토에서는 10만 부도 안 팔렸다고 한다. 아마도 그 책은 너무 관념적이고 재미가 없어서 독자들이 대부분 조금 읽다 만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이 우리 사회가 일단 ‘정의’ 열풍에 휩싸이기 시작했다는 하나의 징표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와 관계있는 정의는 그런 철학적 정의가 아니라, 애덤 스미스가 말한 ‘정의로운 행동 규칙’으로서의 정의다. 철학자의 ‘정의’는 아무리 포장해 보았자 결국 가진 자와 덜 가진 자를 ‘공정’하게 맞추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질서 있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규칙’으로서의 정의다. 성서 십계명의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이웃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 같은 규칙은 오랜 전통이 녹아있는 계명으로 오늘날 현대 사회의 법 제도에 녹아 있다. 이런 애덤 스미스적 정의가 바로 사회를 자유로 이끌어주는 정의다.

영국 전통의 고전적 자유주의 즉 자유 보수주의는 인간 이성이 완벽할 수 없고 한계를 갖는 것임을 자각하고, 오랜 세월을 거치며 진화해 온 전통과 제도를 존중한다. 현재의 전통과 제도는 과거 세월 속의 수많은 사람의 이성이 축적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아남은 결과물로 본다. 당연히 어떤 한 사람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생각한 아이디어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도 이성주의자들은 자신의 신념과 지적 능력을 과신하여 전통을 뒤엎는 개혁을 쉽게 결정한다. 경제계는 정치와 독립하여 자율성을 지켜야 한다는 오랜 전통을 경제민주화라는 개념으로 혼란에 빠뜨린 것이 그런 예에 속한다.

철학적 원리로서 정치 영역과 사회 통치 영역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은 아우 오랜 전통에 속한다. 중세의 자유는 신의 영역과 왕에 의한 세속의 영역을 서로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리(two swords)에 의해 지켜졌다. 그 전통이 근대에 이르러 정치의 영역이 사회 통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통으로 이어졌고, 나중에 이 전통은 의회 입법에 대한 사법적 검토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다수의 동의라는 합법성은 정치의 영역이다. 반면에 경제 영역은 산업사회의 핵심 구성영역으로서 사유재산이 지배하는 사회의 영역이다. 이 두 영역을 분리하는 전통은, 재산권을 통해 항상 다수 권력을 제한하고 다수결에 의해 사회가 폭정에 빠지는 것을 막으며, 동시에 다수의 권력은 항상 재산권을 견제하고 정치 영역이 금권정치로 전락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한국은 이 전통이 이른바 ‘경제민주화’라는 독단적 선언 때문에 와해하려고 하고 있다. 문제는 그 결과 ‘기능하는 사회(functioning society)’ 자체가 붕괴하리라는 것이다. 사회가 기본적인 기능을 잃는다는 것은 홉스적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빠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다음은 역사에서 보건대, 이런 상태를 일거에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나타나는 전체주의 폭력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한국이 최초 건국했던 이념, 자유 보수주의를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문근찬 자유경영원 대표, 전 숭실사이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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