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ㆍ성폭행 논란이 야기한 파문이 '권력자'로 군림하던 폭로 대상자들의 ‘흔적 지우기’로 이어지고 있다. 과거 ‘민주ㆍ민족애(愛)ㆍ정의ㆍ여성 인권’과 ‘공감ㆍ위로’ 등을 강조하며 인기를 끌며 곳곳에 퍼졌던 흔적들이 폐기되는 수순이다.

여론의 반발이 거세지자 지자체 곳곳에 설치된 고은 시인의 헌납시 등을 철거하고 교과서에서도 퇴출하는 추세이다. 한 출판사는 고은과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책을 모두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성추문에 휩싸인 시사만화가 박재동 씨는 한국만화가협회에서 제명됐다.
 

성추문에 휩싸인 고은 시인, 안희정 전 충남지사(사진=연합뉴스)
성추문에 휩싸인 고은 시인, 안희정 전 충남지사

출판사 ‘창비’는 고은의 등단 60주년을 맞아 이번 상반기에 출간할 예정이던 새 시집 ‘심청’ 출간을 무기한 연기하기로 했다.

교과서를 내는 출판사들은 중ㆍ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있던 고은의 작품과 그를 소개하는 내용을 모두 삭제하기로 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고은의 문학작품 13건, 인물 소개 11건이다.

출판사 ‘스리체어스’도 인물 한 명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격월간 잡지 ‘바이오그래피’ 6호(2015년 10월)와 8호(2016년 3월)를 전량 회수해 폐기하겠다고 밝혔다. 바이오그래피 6호에서는 고은이 활동했던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현장, 문인들과의 일화 등 고은의 인생을 추적하는 내용이 담았다. 출판사는 또 잡지 8호에서 ‘다시 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안 전 지사의 인터뷰를 실었다. 스리체어스는 안 전 지사의 책 ‘콜라보네이션(협력+국가의 합성어)’ 역시 회수 폐기할 방침이다.

출판사는 온라인 뉴스레터 ‘북저널리즘’ 토요판에서 지난달 23일 안 전 지사와의 인터뷰 내용을 실었다. 이 인터뷰는 피해자인 정무비서 김지은씨(33)가 밝힌 마지막 성폭행이 벌어지기 이틀 전에 충남도청에서 진행됐다.

안 전 지사는 당시 인터뷰에서 “성희롱과 폭력은 굉장히 오래된 인류의 숙제고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과제”라며 “(사람은) 힘이 있는 누가 견제하지 않으면 자기 마음대로 한다. (성폭력이 있을 때) 밟으면 꿈틀해야 못 밟는다”고 말했다.

사회 문제로 “(여성을) ‘건드려도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빨리 뽀뽀하라는 얘기야’라는 식의 왜곡된 성인식”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또 “현재 가장 큰 과제는 곳곳에 숨어있는 젠더 문제다. 남녀 차별의 문화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엄청난 폭력을 보여주는 것이고 민주주의자로서 나는 그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젊은 날에 화염병을 던지는 심정으로, 젊은 날 반독재 투쟁을 했던 심정과 각오로 똑같이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각 지자체와 기관들도 고은 시인의 흔적 지우기에 나선 상태다.

수원시는 올림픽공원 내 '평화의 소녀상' 옆에 설치돼 있던 고은 시인의 추모 시비(가로 50㎝·세로 70㎝)를 철거했으며, 팔달구 한옥기술전시관 뒤편 시유지 내 고은문학관 건립 계획도 철회했다.

서울시는 고은의 삶과 문학세계를 조명한다던 서울도서관 전시공간인 ‘만인의 방’을 12일 철거했다. '만인의 방' 철거에 따라 서울도서관 3층 이 자리에는 서울광장의 역사와 연혁을 조명하는 전시 공간이 들어온다. 서울도서관 관계자는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과 재작년 촛불 집회 등을 다루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연합뉴스)
성추행 논란 속에 철거되는 고은 사진(사진=연합뉴스)

경북 포항시도 청사 벽면에 걸려있는 '등대지기' 작품을 뗄 계획이다.

고은의 고향인 군산시도 그동안 생가 복원 및 문학관 조성, 문화제 개최, 시 낭송회, 벽화 꾸미기 등 사업을 진행해 왔으나, 최근 관련 사업을 모두 보류했다.

또한 명예박사 학위마저 박탈당할 가능성이 높다. 한신대에 따르면 학교는 지난 2015년 2월 전기 학위수여식에서 고은 시인에게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줬다. 고은은 1970년대 한신대 출신 인사들과 민주화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면서 한신대와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고은 시인의 성추문으로 불거진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그의 명예박사 학위 박탈 여부를 두고 학교도 조만간 논의에 나서기로 내부 방침이 섰다.

성추문 파문이 일자 통일부는 8일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고은 이사장을 면직 처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남북은 언어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말 사전인 '겨레말큰사전'의 공동 편찬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후배 작가를 성희롱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만화가 박재동 씨는 한국만화가협회에서 제명됐다. 협회는 이사회 만장일치로 이같이 결정했다며 피해자를 도울 방법을 찾겠다고 설명했다.

일부 교과서에서는 거장으로 소개된 김기덕 감독 역시 성폭행 논란에 휩싸이면서, 교육당국은 관련 내용을 삭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세영 기자 lsy215@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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