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한국인들은 작년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책 한권에 히스테리적 반응을 보인 일부 지식인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최근에 그 책의 저자들은 후속작을 발간했는데, 그나마 이들 여러 명의 저자들은 공고한 한국사회의 ‘친일’ 프레임에 함께 맞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5.18과 관련한 불편한 진실에 대해선 지금까지 그런 복수의 저자들에 의한 프로젝트형 저술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더 5.18에 관해서는 ‘극우’ 프레임을 활용한 ‘응징’이 맹위를 떨치는 중이며, 어느 누구도 그 사건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규정한 교조적인(orthodox) 법적 해석에 반대하는 의견을 감히 내놓을 생각조차 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정대협과 관련해서 이미 15년 전 (2005년)에 1990년 창설 이래로 거짓과 부패로 점철된 그 단체의 실상에 대해 날카롭게 “어떤 불순세력들이 미선이-효순이를 왜곡하여 반미감정을 일으켜 한국국민을 세계에서 가장 의리 없고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국민으로 만드는데 성공했고, 이와 동시에 위안부 역시 반일감정을 유발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일갈했던 인물이 바로 그 5.18 관련해서 ‘망언’의 아이콘으로 한국 사회에서 지금껏 조롱 당해온 (모두가 아는) 그 응용수학 박사이다. 정치적 발언이 다소 투박한 (‘불순세력’, ‘배은망덕’ 등 fashionable한 좌파 혹은 중도 지식인들이 잘 안쓰는) 어휘로 표현되긴 했지만, 한국사회가 곧 직면하게 될 선동 정치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은 발언이었다.

한국사회는 그와 같은, 자신들 사고의 정규분포 곡선에서 극단에 위치하는 (어쩌면 15년 이상 시대를 앞서는) 사고에 대해 유난히 비웃고 모욕하는 모습을 보인다. 투블럭의 버섯머리로 이마를 가리는 헤어스타일을 클론처럼 똑같이 탑재하고 다니는 한국의 젊은 학생들을 볼 때면, 내가 중학교 때 그런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니던 한 친구가 기억난다. 그 때는 모두가 그 친구의 헤어스타일을 비웃고 조롱했다. 그 중학교 때 나는 당시 교과서에서 배우던 5.18을 장차 미래에 ‘폭동’이라고 발언하면 사회적 매장을 감수해야하는 사회에 살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많은 우파 지식인들은 한국이 전체주의 사회로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대다수 한국인들은 이러한 ‘전체주의’ 운운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적 면모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찌 보면, 한국 사회의 고질적 특성 중 하나가, ‘생각하는 개인’을 대중이 위협하는 집단주의 사회의 성격이다. 더 짧게 표현하면 아직 개인이 미분화(未分化)된 사회, 즉 ‘개인주의’가 미성숙한 사회이다.

단 여기서 개인주의라는 개념은 비교문화학에서 얘기하는 그런 (체크리스트에 몇 개 항목에 합치되면 개인주의 혹은 집단주의로 분류하는 기계적이고 환원론적인) 개념으로서가 아닌, 인간의 성향적 전략 (dispositional strategy)을 말한다. 인간은 전략적인 동물이다. 자신의 생존과 안전이 보장받지 못하는 부패하고 불안정한 사회에서는 감정적 지능을 발휘해 지지자나 조력자를 찾아 나서는 집단주의적 전략이 더 성공적일 것이고, 경쟁의 룰이 정착된 예측 가능한 안정된 사회에서는 이성적 지능을 개발시켜 자기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높여나가는 개인주의적 전략을 쓰게 된다. 결론적으로 더 시장 친화적인 사회, (제도와 문물이 잘 정비된) 더 선진적인 사회에서 사람들은 더 개인주의적으로 살아가게 될 확률이 높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표현하지만, 그 본질은 인간이 타고난 집단주의자라는 점일 것이다. 가령 침팬지 무리 안에서 침팬지들의 행동 전략은 매우 집단주의적이며, 그만큼 알파 메일을 중심으로 한 권력 관계가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철학자 니체가 말한 ‘권력에의 의지’ 그리고 인류 정치사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잔인한 모습들은 사실상 인간이 이들 침팬지와 진화적으로 유사하다는 사실 및 사회생물학적 연구 결과들을 감안해 보면 별로 놀랍지 않다.

인간 사회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더욱 유사점이 많이 발견된다. 그루밍(grooming)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는 영장류들의 그루밍 패턴을 분석한 연구는 많다. 중요한 것은 인간 사회 안에서도 사람들이 상호작용하는 양태를 분석해보면 사실상의 verbal grooming(언어적 그루밍), 즉 이성적 사유에 기반한 대화가 아닌 그저 상호간의 감정적 유대를 위한 논리 없는 말의 교환에 지나지 않는 행동에 많은 시간과 (감정적)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이성적 측면에서 볼 때 비논리적인) 일상의 대화들이 실제 사회 속 인간관계에선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 같은 행위를 통해 개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보다 원활히 유지, 도모해 나가게 된다.

동물의 모습과 이렇게 흡사한 집단주의적 인간사회 속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인류의 역사에서 ‘생각하는 개인’들에 의해 숱하게 시도되었다. 하지만, 늘 그 생각하는 개인들을 우상화하는 집단주의적 인간 사회의 속성으로 인해, 시간이 지나면 그 개인들의 생각 자체가 대중을 옭아 메는 보이지 않는 철창이 되어왔다. 어떤 하나의 생각이 도그마가 되어 버리는 사회는 그 생각 자체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시키는 감옥의 역할을 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이 이 사고의 감옥을 꽤 즐긴다는 사실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이해하는 유교 성리학 사상의 세뇌 속에서 수백년 가까이 지냈던 역사적 경험 탓인지 한국인들은 여전히 (근대 서양의 사회계약 사상에 바탕을 둔) 수평적이고 대등한 인간 상호간의 존중이라는 개념을 내재화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령 인사를 서로 주고받기 보다는, 먼저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사람을 자신보다 ‘아래’로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즉 인사가 대등한 사회적 존재 간의 우호적 감정의 표시로서가 아닌, 위 아래 사회적 서열 확인의 표시로서 기능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아직 한국사회는 성리학적인 프레임의 창살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사실은 나올 마음도 없으며 오히려 그 새장 안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믿고 지내는 작은 새들의 공동체와 같은 모습이다.

개인이 미분화된 이런 사회에선 그 새장의 창살을 훼손하려는 시도를 하는 위험한 새들은 처단받게 되는 데, 이는 그 새들의 공동체가 가진 자기보존 본능이라기 보다는 그 새장 안에서 기득권을 행사하는 소수의 지식인 집단과 정부에 의한 세뇌와 선동 기재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글을 주사파 운동권 출신 지식인이 읽고 있다면 기시감이 당연히 느껴질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새장 속 기득권 세력이 어느덧 현재 그들 좌파의 본질이 되어 버렸고, 이런 측면에서 좌파는 이제 한국사회에서 개혁 세력이라기 보다, (집단주의적, 이상주의적 가치의 수호 내지 회귀를 추구하는) 개혁의 대상이다.

이미 사실상 대부분의 사회적 기관(institution)을 장악한 좌파 기득권 세력의 도덕성(morality)과 지성(intelligence)은 사회적 차원에서 당연히 도전 받고 검증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이 지금까지 보여온 독선과 이상주의적 태도에 대해 지금 현재는 전자에 우파 언론들이 초점을 맞추는 모양새이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후자, 즉, 이성이 결핍된 이상주의적 지성의 한계이다. 사회주의 사상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좌파 지성의 치명적 결함은 그 철학 자체가 지극히 19세기 낭만주의적 감성에서 기원한다는 점이다. 물론 한국이라는 새장 밖에서도 그러했던 것처럼 국민들을 공동체(community), 사회(society), 정부(government) - 한국의 경우엔 민족(nation)까지 포함 – 를 중심으로 한 집단 감성 (그 실제 본질은 집단 이기심과 집단 의존심리)에 기대어 사회구성원들을 세뇌시켜온 서구 좌파의 프레임은 한국사회에서 현재 기승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대적할 만한 지적 권위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우파의 모습 역시 20세기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를 고려해볼 때 새삼스럽지도 않다.

맑시즘의 갈등론적 세계관을 차용한 각종 인문 사회과학 이론들은 현재에도 여러 학문 영역의 원론서에 버젓이 소개되고 있지만, 로크로부터 기원하는 고전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는 왕권신수설 등과 함께 박제된 역사 속의 사상으로 정치철학사에서나 거론될 뿐이다. 경제학에서도 시장의 본질을 집요하게 탐구해온 오스트리아 경제철학의 입지는 거의 박물관 속 유물과도 같다. 심지어 국권도 없었던 20세기 전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 역시 그 대다수는 사회주의자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의 이승만은 좌익과 싸우기 위해서, 유사하게 선악의 이분법적 논리로 세계를 바라보는 반공 기독교 프레임과 반일 민족주의로 어렵사리 집권해 나갈 수 있었을 뿐이었다. 하긴 1960년대까지는 미국과 영국에서조차 시장 자유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우파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통선거에서 이기기란 힘들었다.

지난 총선결과는 한국사회가 현재 기득권을 장악한 좌파 세력의 도덕성과 지성에 대해 받아줄만(acceptable)하다는 승인을 한 셈이었다. 과연 앞으로 이 힘든, 좌파와의 지성(intelligence) 경쟁에서 우파는 어디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까? 피상적으로 보면, 독선적인 좌파 지식인과 정치인들을 비판하는데 손이 가고 눈길이 가겠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그들의 도덕성이 문제가 아니다. 바로 한국 대중을 옥좨는 좌파적 사고와 언어의 프레임을 깨뜨리는데 주력해야 한다. 물론 극우, 친일, 망언 따위의 낙인(stigma)에 움츠려 들어 ‘생각하는 개인’을 지키기 보다, 집단주의 좌파 프레임에 질질 끌려가는 우파 정치인들의 모습을 그만 보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생각하는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존재성을 포기한 채 철학 없이 방황하는 집단주의 사회 속 개인들의 모습이다.

배민 (서울 숭의여고 역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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