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칼럼] 지평리 전투를 회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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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02.25 18:02:56
  • 최종수정 2018.03.0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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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중공군 대규모 남하 격파한 최초의 전투
랄프 몽클라르·폴 프리먼, 자유수호에 헌신 '지평리의 영웅'
대남공작 괴수 김영철 손님맞이, "대체 누굴 위해 싸웠나"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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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2월이 되면 6.25 전쟁을 경험한 한국인들에게 생각나는 전쟁 이야기가 있다. 바로 지평리 전투이다. 지평리 전투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13일 밤부터 16일 오전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중공군과 유엔군 사이에 벌어진 격전으로서, 전쟁의 흐름을 바꾼 역사적인 전투였다. 올해 참전용사들은 더욱 착잡한 심정으로 지평리 전투를 회상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정찰총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우리 장병의 목숨을 앗아가고 남쪽에 대해 무수한 해킹도발을 자행했던 대남공작의 괴수 김영철 노동당 통전부장이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식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에 온다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개시된 전쟁은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바뀌면서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출했으나, 1950년 10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세는 또 한번 바뀐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물밀듯 내려오는 중공군에 맞서 장진호 전투에서 고전하고 흥남 철수작전을 감행해야 했으며, 1.4 후퇴를 통해 다시 서울을 적의 수중에 넘겨야 했다. 이후 중공군은 대병력과 인해전술을 앞세우고 남진을 계속하여 수원, 이천, 원주, 강릉 선까지 진격했다. 이에 유엔군은 이대로 밀릴 수만은 없다는 결심으로 평택-원주-삼척 선에서 후퇴를 멈추고 전열을 재정비했으며, 울프하운드 작전, 썬더볼트 작전 등을 통해 1.4후퇴때 내주었던 서울 남방의 한강 지역을 수복했다. 이렇듯 유엔군이 서부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하자 중공군이 재반격을 위해 시도한 것이 중부전선의 지평리 전투였다. 즉, 중공군 주력부대를 중부전선으로 돌려 강원도 횡성과 홍천 사이에 있는 삼마치 고개와 지평리에 주둔한 유엔군을 궤멸시킴으로써 서부전선에서 중부전선과 동부 전선까지 이어지는 유엔군의 방어선을 붕괴시키고 서부전선 쪽 한강 이남 지역에 진출한 미1군단과 9군단을 포위하여 압박·섬멸하겠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리지웨이 미 8군사령관은 중공군의 작전을 내다보고 있었고, 오히려 지평리로 중공군 주력부대를 유인하여 섬멸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미 보병 제2사단 23연대 만을 지평리에 남기고 인근의 미 10군단을 횡성으로부터 물러나 있도록 했다. 23연대는 프랑스 대대를 주축으로 하는 37포병대대, 미 82방공포 대대, 미 503 포병대대 등 3개 대대 총 5,600명의 병력으로 편성되어 있었고, 지평리 마을을 중심으로 반경 1.6㎞ 지역에 ‘죽음의 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중공군은 리지웨이 장군이 던져 놓은 미끼를 물었다. 중공군 39군 예하 4개 사단은 2월 13일 밤에 총공격을 개시하여 나팔을 불면서 파상공격을 가해 왔다. 프랑스 대대가 방어하는 지역의 전투가 가장 치열했다. 프랑스군은 중공군의 기세에 눌리지 않기 위해 수동식 사이렌을 울리며 백병전을 벌였다. 미 공군은 23연대에 필요한 물자를 쉼없이 공수했고 낮 동안 중공군의 활동을 크게 위축시켰다. 전투 중에 리지웨이 사령관은 직접 헬기로 23연대를 방문하여 연대원들을 격려했다.

이렇듯 23연대가 고립된 상황에서 4일 동안 중공군 주력부대가 펼친 수십 차례의 파상공격을 막아내는 가운데 크롬베즈 대령(Marcel G. Crombez)이 지휘하는 미 1 기병사단 5기병연대는 1시간 15분 만에 중공군의 포화를 뚫고 6마일을 달려 2월 15일 17시 마침내 지평리에 도달하여 23연대와의 연결선을 구축했고, 이어서 막강한 기병화력으로 중공군에 맞섰다. 결국, 중공군은 2,000여 구의 시신들을 남겨 놓고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약 5천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철통방어를 펼친 23연대는 전사 52명, 부상 259명, 실종 42명의 피해만을 입은 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지평리 전투는 중국의 참전이래 거침없이 남하하던 중공군 주력부대의 대규모 공세를 격파한 최초의 전투였다. 이로서 중부전선을 장악한 후 서부전선의 유엔군을 포위·압박하려던 중공군의 전략은 무산되었고, 유엔군은 다시 재반격하여 서울을 재수복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사(戰史)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지평리 전투를 미국 남북전쟁의 판도를 가른 게티즈버그 전투에 비유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은 이 전투에서 투혼을 발휘했던 유엔군 장병들을 결코 잊지 않았다. 전투 중에 부상을 당하고도 후송을 거부하고 끝까지 부하들과 함께 싸운 23연대장 폴 프리먼(Paul Freeman) 대령과 머리에 빨간 수건을 둘러매고 중공군과 백병전을 벌이면서 진지를 사수했던 프랑스군 대대의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 중령은 추앙받는 지평리의 영웅이 되었다. 프랑스 대대는 한미 대통령으로부터 부대표창을 받았다. 2017년 10월 19일 의정부 소재 캠프 레드 클라우드에서는 미2사단 창설 100주년 기념동상 개막식이 거행되었는데, 동상의 주인공은 바로 폴 프리먼 장군이었다. 부상을 당하고도 끝까지 책임을 다한 그의 지평리 전투 이야기는 미 육군 사관학교 교재에 게재되었으며, 후일 그는 육군 대장까지 진급했다. 이 동상은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방미하여 의회에서 연설을 하면서 프리먼 장군 등 참전용사들을 거명하며 감사를 표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은 한 저명한 조각가가 제작하여 기증한 것이었다.

몽클라르 대대장 또한 지평리의 영웅이었다. 그는 드골 대통령의 오랜 친구이자 1, 2차 세계대전에서 각종 무공훈장을 받은 전쟁영웅으로 육군 중장으로 전역했지만, 다시 6.25 참전을 자원하여 스스로 네 계급이나 자진 강등하여 중령으로 프랑스 대대장을 자청했다. 그는 전쟁 후 부상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64년에 향년 72세로 별세했다. 한국에는 사단법인 ‘지평리를 사랑하는 모임(지평사모)’이라는 것이 있다. 몽클라르 장군을 기리는 한국인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은 2010년 몽클라르 장군의 딸 파비앙 몽클라르와 사위 듀포 대령을 초청했다. ““프랑스에서도 아버지의 삶이 잊혀지고 있는데 한국에 아버지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몽클라르 장군의 딸이 지평리 전투때 아버지가 지휘소로 사용했던 주조장을 찾아 감회에 젖은 모습으로 했던 말이다.

지평리 전투에서 산화한 한국군 및 유엔군 장병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키고자 자신들의 목숨을 헌신짝 버리듯 했던 프리먼 장군과 몽클라르 장군이 김영철의 방한을 본다면, 김영철이 거들먹거리는 걸음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와서 우리 요원들의 경호(?)를 받으면서 올림픽 폐막식에 참가하고 청와대를 방문하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싸운 것인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前 통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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