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나라는 이사할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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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8.20 11:23:43
  • 최종수정 2019.08.20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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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대한 우리의 지식 너무 부족해
이웃을 잘 알려고 애쓰고 외교 문제는 외교로 풀어야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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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이 정 싫으면, 개인은 이사할 수 있습니다. 나라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웃 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마음을 많이 써야 합니다. 이웃들보다 힘이 약하면, 더욱 그래야 합니다.

특히 국제 규범들을 잘 지켜야 합니다. 국제 규범들이 허물어지면, 모두 손해를 보지만, 약한 나라들은 상대적으로 많이 손해를 봅니다. 무엇보다도, 이웃 나라들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들의 행태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일본 사이의 분쟁에서 이런 점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한국 정부는 국제 규범들을 지키지 않아서 평지풍파를 일으켰고 분쟁의 상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서 일방적으로 당합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그런 사태에서 정치적 이익을 얻으니 분쟁을 키우겠다는 현 정권의 심산입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잘 알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일본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합니다. 현 정권이 일본과의 ‘경제 전쟁’에서 이기자고 선전하니, 일본이 전쟁을 하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긴 전쟁에서 흔히 ‘국민성’이라 불리는 총체적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와 일본은 국력에서 차이가 컸습니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너른 땅을 지녔고 인구는 1억 2천만 가량 되었죠. 훈련된 병력은 450만 가량 되었습니다.

일본은 그리 크지 않은 섬나라였고 인구는, 보호령인 대만을 빼면, 4천 4백만이었습니다. 훈련된 병력은 80만 가량 되었죠.

그러나 동 아시아만을 따지면, 사정은 달랐습니다. 러시아 해군은 모항인 블라디보스토크, 요동반도의 여순, 그리고 제물포의 세 곳으로 분산되었고 일본 해군이 연결을 막아서, 힘을 합쳐 작전할 수 없었습니다.

바이칼 호 동쪽 광막한 지역에 주둔한 러시아 육군은 83,000명에 지나지 않았고 야포는 196문뿐이었습니다. 항구들을 지키는 병력 25,000과 철도 경비병력 3만이 이들을 지원했습니다.

동부의 러시아 군대는 교통 수단의 부족으로 빠르게 강화되기 어려웠습니다. 수도 모스크바와 가장 중요한 싸움이 벌어진 여순 사이의 거리는 거의 9천 킬로미터나 되었죠.

이 엄청난 거리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치타에서 하얼빈을 거쳐 여순에 이르는 동청철도(東淸鐵道) 지선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이 긴 철도는 단선이어서, 수송 속도가 느렸습니다. 그나마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서쪽 우랄 산맥 남단과 동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시에 부설되어 바이칼 호에서 만났습니다. 그러나 긴 바이칼 호를 남쪽으로 돌아가는 부분이 가파른 지형 때문에 연결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11월에서 4월까지는 얼어붙은 호수 위로 물자를 날랐고 다른 때엔 바이칼 호를 돌아가는 도로에 주로 의존했습니다. 이런 제약 때문에 모스크바에서 여순까지 1개 대대를 수송하는 데는 1개월이 걸렸죠.

반면에, 일본군은 바다를 통해서 상비군 전부를 이내 만주에 투입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상비군은 283,000명이었고 야포는 870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만주에선 일본군이 오히려 압도적 우위를 누렸습니다.

당연히, 일본은 만주의 러시아 군이 증강되기 전에, 특히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완공되기 전에, 러시아를 공격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으로선 프랑스의 개입이 걱정되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월남을 식민지로 경영하고 있어서, 동 아시아에 상당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죠. 그런 프랑스가 러시아와 동맹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러시아 및 프랑스와 경쟁 관계에 있던 영국에 접근했습니다. 당시 영국은 어떤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않는 ‘영예로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을 통해서 ‘영국 중심의 평화(Pax Britannica)’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마침 ‘남아프리카 전쟁(South African War)’ [흔히 ‘보어 전쟁(Boer War)’이라 불림]에서 뜻밖으로 고전하는 참이어서, 영국은 일본과의 제휴가 절실해졌습니다. 덕분에 1902년 1월 양국은 런던에서 동맹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의 핵심은 ‘영국이 중국에서 지닌 특별 이익’과 ‘일본이 중국에서 지닌 이익에 부가해서 조선에서 특수한 정도로(in a peculiar degree) 지닌 상업적, 산업적 및 정치적 이익’을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상대국이 다른 나라와 전쟁하게 되면 중립을 선언하고, 만일 복수의 나라들과 전쟁하게 되면 지원한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일본이 러시아와 싸울 때, 프랑스가 러시아를 도우려 참전하면, 영국도 일본을 도우려 참전하도록 되었습니다. 덕분에 일본은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가 참전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죠.

그렇게 걱정을 덜고 나서야, 일본은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두 해 뒤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했고 끝내 강대국 러시아에 이겼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전쟁에 임하는 일본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먼저, 일본은 오랫동안 전쟁을 준비합니다. 1896년 2월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갑자기 커지자, 일본은 러시와의 군사 대결이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서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청일전쟁에선 더 오래 준비했습니다. 1884년의 갑신정변에서 일본군이 청군에 밀려 일본 공사관이 후원한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 정부는 곧바로 상비군 5개 사단 창설을 결의하고 실행했습니다. 그리고 10년 뒤인 갑오년에 청군에 대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다음엔, 일본군은 늘 기습으로 전쟁을 시작합니다. 임진왜란부터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없었습니다.

셋째, 일본은 적군에 대한 정보를 철저하게 수집합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군은 전쟁의 운명이 걸린 여순항의 공략을 위해서 장교들을 중국인 노동자들로 위장시켜 여순항의 러시아 군의 상황을 탐지했습니다. 기습으로 전쟁을 시작하려면, 당연히 적군의 상황을 잘 알아야 합니다. 1941년 당시 모든 사람들을 경악시켰을 만큼 상상하기 어려운 펄 하버 기습도 미군 태평양 함대에 관한 철저한 사전 탐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넷째, 일본은 적국을 도울 만한 나라들이 돕지 못하도록 미리 손을 씁니다. 영일동맹으로 프랑스의 개입을 막은 것은 전형적입니다. 태평양전쟁에서도 독일 및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공산주의 러시아와 불가침조약을 맺어서 나름으로 조치를 취했습니다.

일본은 그런 나라입니다. 이번 한일 분쟁에서도 일본의 이런 특질들이 잘 드러납니다. 일본이 ‘경제 보복’을 준비한다는 얘기는 오래 전에 나왔습니다. 일본은 전략적 물자들의 수출 제한 조치를 기습적으로 실시했습니다. 일본은 한국 기업들의 약점들을 자세하게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기습당한 한국이 도웅을 요청할 만한 나라에 미리 손을 써놓았습니다.

일본이 기습적으로 ‘경제 보복’을 하자, 우리 외교 담당자들이 모두 미국으로 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를 두둔하지 않아서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일본이 볼 때, 한국의 대응은 일차적으로 미국에 하소연하는 것일 터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먼저 자신들의 처지와 대응을 잘 설명하고 미국의 동의를 얻은 것입니다. 일본과의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우리는 진 것입니다.

일본이 미국을 먼저 자기 편으로 만들어 놓고 일을 벌이리라는 것은 국제 정치에 대한 식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에겐 뻔히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정부가 실제로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 드러나자, 현 정권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 저로서도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둑에서 ‘한 수 앞도 못 내다본다’는 얘기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또 하나 충격을 받은 것은 일본이 미국에 손을 쓰고 있다는 것을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정도의 정보는 미국 국무부에서 한국 대사관으로 새어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4강 주재 대사들을 모조리 외교에 경험이 없는 사람들로 채운 데서 나온 재앙들 가운데 눈에 뜨인 작은 재앙일 터입니다.

그러면 일본은 미국에 무슨 얘기를 했을까요? 왜 미국이 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일본 편을 들었을까요?

이번 분쟁의 단초는 2012년에 한국 대법원이 징용공 보상 소송에서 내린 판결이었습니다. 일본 법원과 한국 하급 법원들의 판결과 달리, 한국 대법원은 원고 징용공들의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일본 기업이 ‘위로금’을 징용공들에게 지불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법원 판결엔 이치에 맞지 않는 추론들이 여럿입니다. 오죽했으면, 하급 법원의 판사가 공개적으로 잘못을 지적했겠습니까? 그 판결을 낸 주심 대법관은 ‘주위에 “건국하는 심정으로 판결문을 썼다”고 밝혔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가 이렇습니다. 대법관이 자신을 혁명가나 정치가로 여기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입니다.

그 판결의 가장 근본적 문제는 1965년에 한국과 일본이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의 부속 협정인 ‘재산 및 청구권 협정’의 규정을 무시했다는 점입니다. 그 협정은 그런 문제들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규정했습니다.

그 판결이 불러온 문제들을 수습해서 협정을 지켜야 할 대통령은 사법부의 판결이니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 협정의 분쟁 조항은 먼저 외교적 경로를 통해서 해결하고, 실패하면, 중재위원회를 구성하도록 규정했습니다. 한국은 외교적 교섭에도 중재위원회 구성에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자국 기업들이 피해를 입게 되자,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전략적 물자의 수출 제한을 골랐습니다. 이것은 한국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방식입니다.

산업화에서 일본이 워낙 앞섰던 터라, 우리 기업들은 소재나 부품들을 일본 기업들로부터 구매해서 중간재나 완제품을 만들었습니다. 자연히, 일본 정부가 전략적 물자의 수출을 제한하면, 일본 기업들은 당해 물품의 매출이 좀 줄어듭니다. 반면에, 한국 기업들은 부품이나 소재 하나 때문에 완제품 전체를 만들 수 없게 됩니다. 예컨대, 제품 원가에서 1%도 안 되는 부품 하나가 조달되지 않아서, 제품을 아예 못 만드는 상황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기업들로선 대책이 서지 않는 보복 방식입니다. 압박의 강도를 정교하게 조절해서 한국의 반응에 따라 대응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결국 한국은 잘못된 적과 잘못된 분야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싸우게 되었습니다. 일본과의 대결이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현 정권은 분쟁을 반기고 부추겼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만 주목한 터라, 현 정권은 ‘재산 및 청구권 협정’의 무시에 담긴 국제정치적 함의들을 놓친 듯합니다. 그 협정은 1951년 연합국들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샌프랜시스코 조약’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따라서 협정을 무시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샌프랜시스코 조약’의 권위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 조약을 주도한 미국은 당시 일본이 전쟁으로 파괴된 국가라는 현실을 고려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연합국들에 배상해야 할 막대한 금액과 일본의 지불 능력 사이에 있는 큰 괴리를 메우는 데 마음을 썼습니다. 패전국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베르사유 조약’에서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특히 뒤에 나올 보상 요구들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데 마음을 썼습니다.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던 연합국 병사들의 추가 소송을 막기 위한 조항까지 넣었습니다. 실제로 이 조항에 의거해서, 일본 법원은 보상 소송을 제기한 연합국 포로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자연히, 한국이 ‘재산 및 청구권 협정’을 무시하는 판결을 내리고 분쟁 해결 절차도 따르지 않으면서 일본 기업들의 재산을 침해하면, 샌프랜시스코 조약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됩니다. 현실적으로, 유사한 소송들이 이어질 가능성도 큽니다. 이 조약을 통해서 2차 대전을 정리한 미국으로선 용납할 수 없는 사태입니다.

아울러, 샌프랜시스코 조약은 ‘샌프랜시스코 체제’라 불리는 미국의 동 아시아 안보 정책의 바탕입니다. 미국은 일본, 한국, 필리핀, 중화민국, 자유 월남 등과 동맹을 맺었고, 그런 쌍무적 동맹들은 미국을 통해서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한국이 일본과의 협정을 파기하는 것은 이런 체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 외교관들은 미국 외교관들에게 이런 사정을 얘기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은 일본의 주장에 동의했을 것입니다. 미국을 찾은 한국 외교관들이 미국의 냉대를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들은 숙제를 아예 하지 않은 것입니다.

나라는 이사할 수 없으니, 이웃들을 잘 알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외교 문제는 외교로 풀어야 합니다. 현 정권이 선전하는 ‘경제 전쟁의 승리’로 외교 문제를 풀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재산 및 청구권 협정’을 포함한 ‘한일기본조약’을 소중히 여기고 허물려는 시도를 막아내야 합니다. 그것은 14년에 걸쳐 갖가지 험난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이룬 성취였습니다. 그것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린 한국의 안정과 번영의 토대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철학적 고찰 (20)

솔로우 컴퓨터 역설

1987년 로버트 솔로우(Robert Solow)는 “컴퓨터 시대는 생산성 통계 말고는 모든 곳들에서 볼 수 있다 (You can see the computer age everywhere but in the productivity statistics)”라고 말했다. 그는 경제 성장 분야에서 개척적 업적을 남긴 거인으로 1987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솔로우의 얘기는 미국에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컴퓨터가 빠르게 발전하고 정보 기술(IT)에 대한 투자가 활발했지만 정작 경제의 생산성은 낮아진 현상을 가리킨 것이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왔다. 이 시기에 컴퓨터의 성능은 100곱절 향상되었지만, 노동생산성 향상은 1960년대의 연 3% 가량에서 연 1% 가량으로 줄어들었다.

‘솔로우 컴퓨터 역설(Solow computer paradox)’이라 불리게 된 이 현상은 많은 연구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어 1993년에 미국 경제학자 에릭 브린욜프슨(Erik Brynjolfsson)은 이 역설을 경제학적 물음으로 바꾸어 제시했다: ‘혜택은 과거의 그리고 지속되는 정보 기술에의 투자를 정당화하는가? (Do benefits justify past and continued investment in information technology?)’ 이처럼 논의의 주제가 넓어지면서, 이 역설은 ‘생산성 역설(Productivity Paradox)’이라 불리게 되었다.

‘솔로우 컴퓨터 역설’/ ‘생산성 역설’에 대한 설명들 가운데 설득력이 큰 것은 생산성을 혁명적으로 향상시키는 파괴적 기술(disruptive technology)은 성과를 얻는 데 긴 시간이 걸린다는 주장이다. 역사적으로, 증기기관과 전기 같은 혁명적 기술들도 생산성의 향상에 기여하는 데 긴 시간이 걸렸다. 정보 기술에 대한 투자가 생산성을 크게 높이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리라는 얘기다.

크든 작든 영향을 미쳤다고 모든 경제학자들이 인정하는 요인은 생산성의 측정에서의 문제다. 생산성은 재화의 생산에서 투입(input)과 산출(output)의 비율인데, 그것을 측정하는 데 쓰이는 통계와 척도가 함께 거칠다. 모든 제품들은 품질이 꾸준히 향상되지만, 그런 품질 향상은 가격에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 자연히, 그것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중요한 기술이 새로 도입된 분야에선, 이런 품질 향상이 무척 클 수 있다. 미국 경제학자 윌리엄 노드하우스(William D. Nordhaus)에 따르면, 미국에서 1,000 루멘시(lumen-hour)의 값은 1800년엔 40센트였지만 1980년대엔 0.1센트였다. 1800년의 40센트는 지금 가치로는 4달러가 넘으니, 조명의 값은 2세기 동안에 4,000분의1 이하로 떨어진 셈이다. [노드하우스는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의 영향에 관한 개척적 연구로 201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인공지능과 관련이 큰 예는 잘 알려진 ‘무어의 법칙(Moore’s Law)’이다. Fairchild Semiconductor의 연구개발 담당 이사였던 고든 무어(Gordon Moore)는 1965년의 논문에서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의 부품들이 해마다 곱절로 늘어났고 그런 추세는 적어도 10년 동안 이어지리라고 예언했다. 그는 1975년에 집적회로의 부품들이 2년마다 곱절로 늘어나리라고 수정했다. 이어 Intel의 데이비드 하우스(David House)가 ‘집적회로는 18개월마다 성능이 곱절이 된다’고 예측했다.

2017년 현재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처리 장치들 가운데 가장 많은 반도체를 탑재한 것은 180억 개를 탑재한 Centriq다. 반도체의 소형화는 이제 물리적 한계에 아주 가까워졌다. 그래서 ‘무어의 법칙’이 마냥 지속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좀 느려진 상태로 상당 기간 지속되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이런 기술적 혁신은 당연히 집적회로의 값을 크게 낮추었다.

‘무어의 법칙’은 기술의 발전을 관찰한 데서 나온 예측이지 무슨 물리적 또는 경제적 법칙은 아니다. 그런 예측이 반 세기 넘게 맞았고 앞으로도 크게 틀리지 않으리라는 예측이 나온다는 것은 무척 놀랍다.

‘무어의 법칙’이 가리키는 반도체 기술의 지수적(exponential) 발전은 정보 산업이 아주 빠르게 발전했음을 가리킨다. 새로 나온 중요한 정보 기술들 가운데 하나인 자동 발언인식 소프트웨어(automatic speech-recognition software)의 경우, 1985년에 1천 개의 단어들을 다루는 소프트웨어는 5천 달러가 나갔으나, 2000년엔 10만 개의 단어들을 다루는 소프트웨어가 50 달러가 나갔다. 품질과 물가상승을 반영했을 때. 정보 기술, 컴퓨터 및 주변 기기들의 가격은 20세기 후반(1959-2009)에 해마다 16%씩 낮아졌다. 이렇게 해서, 원래의 역설은 해명되었다.

이런 품질 개선은 통계엔 거의 잡히지 않는다. 노드하우스에 따르면. 1800년부터 1992년까지 전통적 방식으로 쟀을 때 실질 임금은 13배 올랐다. 그러나 품질 개선의 효과를 고려하면, 임금은 970배나 올랐다. 그런 척도로 다시 재면 경제 성장은 전통적 통계보다 거의 100배 컸다고 노드하우스는 지적한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품질 향상은 인공지능의 경우엔 특히 크다. 정보 산업과 인공지능에 대한 투자의 성과는 궁극적으로 보다 많고 보다 나은 정보들의 모습을 한다. 그리고 정보는 모든 재화들 가운데 통계로 파악하기가 가장 어려운 재화다.

재화의 성격을 결정하는 요소는 둘이다. 하나는 배제가능성(excludability)이니, 그 재화의 소유자가 다른 사람들의 이용을 막을 수 있는가를 따진다. 다른 하나는 소비에서의 대항성(rivalry in consumption)이니, 한 사람의 이용이 다른 사람의 이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가를 따진다.

이 두 요소들의 결합에 따라, 재화들은 네 종류로 나뉜다.

배제가 가능하고 소비에서 대항적인 재화들은 사유재(private goods)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들은 대부분 여기 속한다.

배제가 가능하지만 소비에서 대항적이지 않은 재화들은 자연적 독점(natural monopolies)이다. 케이블 TV는 전형적이다.

배제가 불가능하지만 소비에서 대항적인 재화들은 공유 자원(common resources)이다. 깨끗한 환경과 바다의 물고기들은 익숙한 예들이다.

배제가 불가능하고 소비에서 대항적이지도 않은 재화들은 공공재(public goods)다. 국방과 치안은 전형적이다.

정보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용을 배제하기가 아주 어렵고 소비에서 대항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공공재다.

이 점은 모든 나라들이 ‘지적 재산권’ 제도를 시행한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힘들게 찾아낸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되면, 누구도 사회에 이로운 아이디어들을 찾아내는 데 힘을 쏟지 않을 터이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처음 생각해낸 사람이 이익을 볼 수 있도록 지적 재산권을 설정해서, 실질적으로 공공재인 아이디어를 고안자의 사유재로 만드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지적재산권으로 보호되는 정보들은 정보 산업과 인공지능이 생산하는 정보의 아주 작은 부분이다. 나머지 방대한 정보들은 조만간 공공재가 되어 사회의 생산성에 기여한다. 이처럼 공공재가 된 정보들은 정보 산업에 관한 통계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 자연히, 정보 산업 분야에서 통계에 잡히지 않는 품질 향상은 다른 분야들보다 훨씬 크다.

그러나 경제학의 전통적 측정 방식이 인공지능의 생산성을 제대로 측정하지 못한 이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학자들이 인공지능을 생산에 투입되는 요소로만 간주한 데 있다. 직접 소비자들의 경제 활동에 공헌한다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는다. 자연히, 그들은 총요소생산성(Total Factor Productivity)만을 들여다보고 인공지능의 공헌이 거의 없다고 고개를 젓는다.

인공지능은 기업들의 생산 활동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강조되어야 한다. 개인 컴퓨터(PC)가 나왔을 때부터, 특히 휴대용 정보처리 장치인 휴대 전화가 보급된 뒤로는, 컴퓨터로 구현된 인공지능은 소비자들의 소비 활동에 직접적으로 쓰였다.

점점 많은 정보들이 점점 싼 값으로 제공되면서, 정보 소비자들은 보다 너른 시장에서 보다 많은 정보들을 이용해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들을 하게 되었다. 덕분에 소비자들의 ‘생산성’이라 할 수 있는 합리성은 급격히 향상되었다. 그렇게 향상된 ‘생산성’은 어떤 경제적 통계에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정보의 양이 늘어나고 비용은 낮아져서 정보 소비자들의 합리성이 높아지는 현상은 무척 중요한 현상이다. 미국 경제학자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은 1972년에 ‘제약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선택에 필요한 정보와 시간의 제약 때문에 사람들은 “최적의 해결책 대신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따른다고 그는 지적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합리성에 상당한 제약이 있다고 주장했다.

실은 사이먼의 주장은 사람들의 궁극적 합리성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데, 그 일에 쓸 시간과 에너지는 제약되었다. 따라서 덜 중요한 일에서 최적의 선택을 고르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일은 비합리적이다. 즉 개체의 생존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만족스러운 해결책’이 바로 ‘최적의 해결책’이다.

사이면의 ‘제약된 합리성’의 핵심은 ‘제약된 의사결정 비용’이다. 이제 사람들은 ‘제약된 의사결정 비용’의 압박에서 많이 해방되었고 이전보다 훨씬 합리적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학은 아직도 정보 소비자들이 누리는 이 엄청난 혜택에 주목하지 않는다.

사회적 매체(social media)의 엄청난 증가를 생각하면, 이것은 경제학의 타당성과 현실성에 심각한 물음을 던지는 결손이다. 2011년 ‘Science’지는 근자에 인류의 정보 처리 총량은 해마다 전 해에 존재한 전반적 목적 컴퓨터들로만 처리할 수 있었던 양보다 60% 가량 증가했음을 밝혀냈다. 소비 부문에서 쓰이는 정보가 빠르게 증가해왔다는 얘기다.

소비자들이 최신의 정보들로 합리적 선택을 하게 되면서, 생산자들도 보다 합리적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비록 이런 효과는 통계에 잡히지 않지만, 그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인공지능의 낮게 보이는 생산성은 충분히 설명되었다. 세월이 흐르면, ‘솔로우 컴퓨터 역설’은 경제학의 발전 과정을 증언하는 일화로 남을 것이다.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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