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승연 칼럼] 죽창 들자고 선동하여 총선에서 이기면 일본을 이기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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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8.01 09:20:21
  • 최종수정 2019.08.0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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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무역항로 복원한다며 뗏목을 타고 일본으로 가던 탐사대의 무모한 도전
혼자 요트로 세계일주 신기록을 세운 여성의 준비와 멋진 도전
동학농민전쟁 때 죽창으로 기관총과 대항한 처참한 전쟁은 누구의 잘못인가?
요트와 뗏목의 차이, 기관총과 죽창의 차이, 모르면 죽는다.
세계 1위 반도체산업과 조선산업, 기술독립 가능한가?
反日감정을 선거에 이용해서 선거에서 이기고, 회복불능 경제의 책임은 국민들이 지라고?
우금치 전투의 수모를 또 겪을 것인가?
황승연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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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초 방학을 이용해 영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영국의 모든 신문에, 홀로 요트를 타고 세계 일주 항해에서 돌아오는 한 젊은 영국여성의 모습이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되고, TV 방송에서는 종일 이 여성모험가에 대한 얘기와 시민들의 환호가 보도되었다. 28세인 영국 여성 Ellen MacArthur는 2005년 2월 8일, 23미터 길이의 트리마란 요트 B&Q호를 타고 영국 Cornwall의 Falmouth 항구를 출발하여, 대서양과 태평양 그리고 인도양을 횡단하는 5만660km를 71일 14시간 18분 만에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세계 일주 세계 신기록을 달성했다. 영국여왕은 ‘영국인의 도전정신을 세계에 보여주며 역사적인 성과를 달성했다‘고 축하하고 귀향한 그녀에게 Dame 작위를 수여하였다. Ellen MacArthur가 Falmouth 항구로 돌아올 때 수백 척의 요트들과 군함과 헬기가 마중을 나가 B&Q호를 에워싸고 함께 입항하며 환영하는 모습의 사진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또 항해에서 돌아온 딸의 귀향을 맞아주는 교사출신의 부모의 모습에 딸보다 더 훌륭한 부모의 용기를 보았다.

뗏목탐사대를 아십니까?

영국에서 귀국한 지 불과 며칠 후, B&Q호의 감동적인 사진이 머릿속에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을 때, 우리나라 한 신문에서 조난 사고 소식을 보았다. 러시아 포시에크 항구에서 출발해 일본 니가타까지 가려던 뗏목 ‘발해호’가 표류하다 통신이 끊어진 후, 우리나라 해경이 항공기와 경비정을 급파해 수색을 하고 있다는 뉴스였다. 결국 해경은 북한 영해에 들어간 뗏목을 이틀만에 발견하고 탐사대 4명을 모두 구조하였다. 이 탐사대는 발해의 무역항로 복원을 위한 2차 학술탐사대였다. 당시 탐사대는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뗏목을 덮친 파도에 식량과 통신기기 일부를 잃고, 대원 4명이 서로 몸을 비비며 추위와 싸우고 견디다가, 출발 3일 만에 구조되었다. 탐사대장은 당시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바람과 파도 때문에 돛을 펴지도 못한 채 출발했고, 바로 배멀미와 구토에 시달렸다. 먹는 일도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뗏목 선실 바닥이 부서져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창고에 있던 장비들은 모두 사라졌다. 구조를 요청하며 해경에 좌표를 불러주다 전화기가 물에 잠겨 끊겼다. 표류한 지 며칠 동안 먹지도 못하고, 추위에 떨며 의식이 가물가물해졌을 때 화물선이 나타나서 구조되었다. 탐사대원들은 항해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발해호에 GPS, 위성전화, 자체발전기 등을 보유했다고 하나 파도가 덮치자 바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통신이 두절되자 우리나라 해경은 북한에 영공비행 허가를 얻어 북한 영공에 초계기를 띄우고 경비정을 급파하여 탐사대를 구조하였다. 구조된 후 탐사대장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 된다. ‘모두 다 동상에 걸려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고 해단식을 하면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에 감사했다.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다음 3차 발해뗏목탐사에는 북한 청년들과 함께 북한 청진항에서 출발해서 남해안 서해안을 거치는 계획을 밝혔다.’

1차 발해뗏목탐사대도 있었다. 1차 뗏목탐사대는 1997년 12월 31일에 출발하였다. 그러나 1998년 1월 24일 일본 근해에서 폭풍에 휘말려 대원 4명 모두 숨지는 참변을 당했다. 탐사대는 발해 건국 1300년을 맞아 발해와 일본 간 해상항로를 복원해 발해 뱃길을 증명해 보려는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발해뗏목탐사대’라 이름을 짓고, 뗏목 ‘발해 1300호’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에서 일본 오키제도에 상륙하려 계획했는데 뗏목이 뒤집혀 탐사대 모두가 숨지고 말았다. 참변을 당한 1차 탐사대 대장은 최후를 맞이하기 전날, ‘오늘 한·일 어업협정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는데 그들의 속셈이 드러났다고 보여 진다. 미래와 현재의 공존과 조화. 바다를 통한 인류의 평화 모색. 청년에게 꿈과 지혜를 주고 싶다. 탐험정신. 발해의 정신’이라고 썼다.

해동성국 발해의 역사를 우리들 가슴속에 옮겨오기 위해 떠난다고 했던 발해탐사대 대원들의 탐사정신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만주 땅을 차지했던 발해가 고구려 후손이 세운 우리의 역사이고 일본과 교류를 통해 일본을 한 수 지도했다는 그런 민족적 자긍심을 확인하고 싶었던 마음을 이해는 한다. 하지만 이런 것을 이루려면 적어도 항해에 관한 기본은 익히고 뗏목을 탔어야 했다. 제대로 된 선박을 갖추고 오랜 기간 바다에서 훈련을 쌓아야 했다. 그러나 ‘굳은 의지로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탐사대의 무모하고 순진한 생각들이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이 말하는 ‘미래’도 ‘평화’도 ‘꿈’도 살아남아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가?

2차 발해탐사대장은 출발 전 어떤 인터뷰에서 두 가지를 부탁한다했다. ‘말이 통하는 사회와 국가보안법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 달라‘고. 뗏목탐사를 앞두고 한 인터뷰내용으로 의외였지만 그들의 모험에 대한 동기부여를 그렇게 끌어올린다면 별로 할 말 없는 거창한 포부였지만, 사회에 대한 이러한 걱정보다는, 뗏목이 파도에 견딜 수 있는지, 부서져 물이 들어오지 않을지,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 식사는 어떻게 하고, 대소변을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지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대원들이 미리 배를 타보고, 배멀미가 무엇인지 정도는 경험을 하고, 파도와 추위에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경험을 해보고 뗏목을 탔어야 했다.

‘자유의 느낌’을 찾기 위해 노력한 소녀의 꿈

Ellen MacArthur는 4세 때 고모집에서 고모 소유의 보트를 처음으로 타본 이후, 보트에 올랐을 때의 그 ‘자유의 느낌‘을 잊지 못해 항해에 꿈을 갖게 되었다 한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작은 딩기요트를 사기 위해 수 년 동안 용돈을 모아서 구입한 배로 처음으로 요트를 익힌 후, 17세 때 항해 견습생으로 들어가서, 18세 때 단독으로 영국을 한 바퀴 도는 항해에 성공하고, 21세에는 단독으로 대서양 횡단에 성공하였다. 24세 때에는 최연소이자 여성으로서 최초로 무정박 세계 일주 항해를 마친 기록도 세웠다. 어릴 때부터 어떤 물건이든 다 그 위에 배를 그려 놓을 정도로 관심이 많았고, 10세 때부터 항해에 관한 모든 책과 잡지를 읽었고, 보트와 보트의 부속품들을 설계하고 연구했다. 최단시간 세계 일주 항해 신기록을 세우는 그 항해에서, 육지로부터 수천 Km 떨어진 남태평양 바다를 지날 때 폭풍을 만나, 며칠 동안 시속 148Km의 바람과 12-15미터의 파도에 맞서서 항해하며, 어떤 날은 12시간 동안 몸무게의 3배나 되는 돛을 8번이나 교체하면서 항해를 계속 했다. 항해 도중 한번에 20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다고 한다. 며칠 동안 계속된 폭풍을 이겨내고 바다가 잠잠해졌을 때, 폭풍 덕분에 자신이 예상보다 빠른 기록으로 항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외로움과 피곤을 잊을 수 있었다한다. 그리고 혼자서 요트로 지구 한 바퀴를 가장 빨리 항해한 기록을 세운다.

수많은 위험하고 힘든 상황들을 극복하면서 28세 영국 여성 혼자서 요트를 타고 세계 일주를 최단기간에 해냈다는 기사와 뗏목을 만들어 타고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확인하기 위해 떠났다가 죽거나 죽기 직전에 구출된 한국 사나이들에 대한 기사의 내용을 비교해본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크기가 얼마나 다른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수준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느껴진다. 또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도 느껴진다. 요트와 뗏목의 차이를 생각해본다. 기개와 용기만으로 할 수 있다는 유치한 생각의 댓가가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죽창과 개틀링 기관총의 대결

요즘 죽창 얘기가 유행이다. 동학난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충청도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 3,200명과 일본군 200명과 맞서 죽창과 화승총을 들고 싸우던 수만 명의 동학군 중 약 2만 명이 죽음을 맞았다 전해진다. 당시 관군은 ‘개틀링’이라는 기관총으로 무장했다. 그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은 직접적인 접전에서 단 한명의 사망자도 없었다한다.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전진하는 용맹함의 결과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처럼 흘렀다’로 표현된 그대로였을 것이다. 개틀링이라는 기관총은 트랙터와 이앙기 등의 농업용 기기를 발명했던 미국의 의사 개틀링 박사가 1862년 남북전쟁 당시에 만들었는데, ‘이런 가공할 무기를 만들면 전쟁에 나가는 사람이 적을 것이고, 그 압도적인 화력에 대량희생자를 우려해 전쟁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발명했다’한다. 총신이 6-8 개 있어서 손잡이를 돌리면 총신이 돌아가면서 총알이 발사되는 그런 총으로서 당시에 ‘회선포’로 불리기도 했는데, 초기 모델은 분당 200발, 1866년 미육군이 정규무기로 채택할 때는 분당 6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엄청난 위력의 신형무기였다. 당시에 이 기관총은 지금의 핵폭탄과 같은 전쟁의 ‘게임 체인저’였다. 동학난 때 일본군이 지휘한 관군이 이 기관총을 사용하면서 동학군에 엄청난 희생이 따랐다. 동학군들은 궂은 날씨에는 무용지물이고 유효사거리 100미터의 화승총과 죽창으로 무장했으니, 관군과 일본군들의 야포와 개틀링 기관총에 어떻게 대항할 수 있었겠는가?

일본군이 지휘한 관군은 무기의 성능도 잘 알았고 지형지물 활용도 잘 했다. 동학군은 이전의 전투에서 관군의 개틀링 기관총을 노획했으나 이것을 보고도 어떤 성능을 가진 무기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동학군의 지도자들은 군사학을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동학군들도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았을 리 없다. 효율적인 작전이 없었다. 전술과 작전이라는 개념을 알았을까? 동학군마다 등에 노란 바탕에 붉은 글씨로 쓴 부적을 붙이고, 돌격과 동시에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라는 주문을 큰 소리로 합창했다 한다. 동학군들은 개틀링 기관총에서 날아오는 실탄 앞에서, 전봉준이 믿으라 한 절대 불사의 부적과 주문의 영험을 믿고 ‘돌격앞으로’를 계속하였다. 화기를 갖추고 훈련된 전문 군인과 죽창을 들고 총알이 피해간다는 부적의 기적을 믿는 농민들이 싸운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 기개와 저항정신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떤 사람은 최근에 일본에 맞서서 죽창을 들자는 선동을 했다. 죽창을 들자하면서 개틀링 기관총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맞지 않나? 이 선동에 반응하여 죽창을 드는 심정으로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일본은 사죄하라’며 촛불을 들고 거리로 사람들이 나왔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벌인다며 자신의 일제 자동차를 부수는 장면도 뉴스에 나온다. 일본의 ‘경제침략’에 대항해서 우리가 한마음으로 뭉쳐 일본과 싸우자는 지도자라는 사람들을 볼 때 ‘뗏목탐사대’가 생각나고 ‘돌격앞으로‘를 외치는 동학군 지도자가 생각난다. 죽창과 기관총의 차이도 모르는 아마추어들이 언제까지 나라를 끌고 갈 것인가? 아니다! 그들은 그 차이를 모르지 않는다. 모를 리가 없다. 그럼 알면서도 국민들을 희생시켜 그들이 얻으려는 것이 있다는 것인가?

세계 1위 반도체산업과 조선산업에서의 기술독립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 중 하나인 반도체 산업이 일본의 관련 핵심소재 수출 관리로 인하여 어려워진다고 한다. 정부는 소재를 국산화하여야 한다고 한다. 왜 미리 대비하지 않았냐고 기업들을 질책한다. 이를 위해 정부에서 2조를 지원한다고 한다. 또 관련 업체에는 ‘52시간 근로시간’을 예외로 해주는 특혜를 베푼다고 한다. 지원하고 특혜를 주면 과연 대처가 가능할까? 글로벌 산업구조를 이해 못하는 순진한 아마추어적인 발상이다. 반도체 뿐 아니다. 모든 영역이 다 그러하다. 반도체가 한국경제의 급소라 한다. 그러면 조선은 급소가 아닌가? 우리나라가 지난 20년 동안 세계 1위를 차지했던 조선산업도 반도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산업영역들이 모두 세계 산업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우리나라 조선소가 만드는 선박들에 장착되는 항해통신장비는 80% 이상이 일본제품이다. 이들 장비는 법적으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장비들이고, 이 장비들은 국제해사기구(IMO)가 인정하는 제품 인증기관에서 까다로운 형식승인을 받아야 하는 제품들이다. 항해통신장비에는 레이더(Radar), 자동조타장치(Auto Pilot), 국제해사위성장비(INMARSAT), 비상위치표시무선장치(EPIRB), 선박자동인식장치(AIS), 수색·구조신호송수신장치(SART), 국제해상조난·안전시스템(GMDSS) 등이 있다. 이들의 장비를 갖추지 않으면 선박은 출항을 할 수가 없다. 물론 유럽제품을 장착할 수 있다. 그런데 가격이 많게는 두 배 정도 비싸다. 일본 제품이 가격뿐 아니라 사용의 편리성이나, 전 세계 AS 망의 측면에서 유럽제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 기존의 많은 선박에 설치되어 이 장비들을 사용해본 경험자들이 많아서 별도의 교육이 필요치 않은 장비들이다. 이러한 장비들이 없으면 배가 완성이 되지 않아서 인도되지 않는다. 지금 일제 불매운동이 한창이다.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바로 친일파라고 낙인이 찍힌다. 토착왜구라는 말도 나온다. 그런데 일제 속옷과 맥주는 불매운동을 하면서 일제 에칭가스나 항해통신장비는 왜 불매운동을 하지 않는가?

조선 1위인 우리나라에서 ‘왜 이렇게 중요한 항해통신장비들을 만들지 않았는가? 우리나라는 이러한 장비들을 만들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왜 없었겠는가? 오래 전에 ‘금성사(Goldstar)‘라는 상호의 회사가 존재했을 당시에 그 회사에서 레이더를 개발했었다. 그러나 어떤 선주들도 이 장비를 구매하지 않았다. 따라서 납품실적이 있을 수 없었다. 보통 형식승인을 받은 장비가 선박에 장착된 후 적어도 3년 이상 고장이 없이 작동된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하고, 가격이 저렴하고, 사용이 편리하고, 내구성이 뛰어나고, 전 세계에 서비스망이 갖춰져 있는 제품이 팔리는 것이다. 금성사는 많은 개발비를 투입하여 개발했지만 아무도 사주는 선주가 없고 납품실적이 없어 판매가 안 되자 결국 사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러한 항해통신 장비들은 조선 산업에서 없으면 안 될 중요한 장비들이지만 우리나라는 현재 이 장비들을 만들지 않는다. 만들어도 팔리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나라 조선분야에서 우리가 더 잘 할 수 있는 분야의 장비들을 만든다.

조선 산업에서도 우리나라가 비교우위를 갖춘 분야가 있고, 일본이 비교우위를 갖춘 분야가 있다. 가격 경쟁력이 있고 품질이 좋은 조선용 후판을 생산해내는 우리나라는, 조선용 후판들을 이어 붙여서 선체를 만들고 엔진을 비롯한 전기장비와 레이더 등의 항해통신 장비를 설치하여 안전한 항해가 가능한 선박으로 완성시키는데 필요한 ‘설계’와 ‘엔지니어링’에서 탁월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 핵심 자재인 선박용 후판들의 좋은 품질은, 저렴하고 질 좋은 전기를 생산해내는 원전과 일본의 자금지원과 기술지원으로 세워진 포스코의 경쟁력 때문이고, 건조의 경쟁력은 의기투합하여 휴일을 반납하고 납기를 맞추기 위해 밤을 새워 일하는 근로문화 때문이었다. 지금은 값싼 전기도 부지런한 근로문화도 사라져가고 있지만, 어쨌든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우리나라가 조선산업의 선두주자를 20년 이상 할 수 있었다. 현재 일본 조선소의 임금이 한국보다 더 낮다고 한다. 따라서 일본이 마음을 먹고 조선에서 다시 우위를 점하려고 한다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인력을 투입하여 이익을 더 많이 낼 수 있는 다른 산업 영역들이 있기 때문이다. 각국이 서로 비교 우위에 있는 산업들에 집중할 것이다. 이것을 기업들이 결정하고 이런 결정들이 이루어지는 곳이 글로벌 시장이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관료나 정치 지도자가, 힘으로 시장에 개입한다면, 죽창을 들고 개틀링 기관총을 향해 돌격명령을 내리는 동학군의 지도자와 같은 꼴이 되는 것이다.

항해통신장비들에 대한 일본의 수출관리

선박에 들어가는 수많은 장비들 중에서 어떤 장비들은 최종 행선지를 밝혀야 주문을 받아주는 경우들이 있다. 특히 군사용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는 장비들은 주문할 때 그 개별 장비에 대하여, 납품하는 조선소와 선주사와 호선번호를 제시하고, 제품의 최종 종착지가 절대로 테러지원국 즉 북한, 이란, 시리아, 수단에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수입업자가 확인하는 서류를 따로 만들어 제출하고 허가를 받아야한다. 북한에서 만든다고 하는 잠수함에도 당연히 항해통신장비가 핵심 장비들이다. 따라서 항통장비는 당연히 높은 난이도로 관리된다. 동맹국이나 안보관련 신용이 높은 국가나 회사에 대하여 또는 난이도가 높지 않은 제품은 이 확인서류를 일부 면제해주기도 한다. 이번에 일본에서 수출 관리를 강화하겠다고 하는 것은 한국에 대하여 특별 면제를 해주던 반도체 생산과 관련된 일부 핵심소재의 수출을 정상적인 확인과 관리를 거쳐서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모든 항해통신장비들은 군사용으로 전용가능하다. 따라서 호선번호를 제시해야 수입할 수 있는데, 일본이 항통장비의 수출 관리를 강화한다고 할 경우에 이 관리를 더 까다롭게 한다는 것이지 수출을 안 한다는 것은 아니다. 조선산업과 관련된 항해통신장비들과 마찬가지로 반도체 생산관련 소재에 대해서도 이런 절차를 강화한다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이를 우리는 수출규제라고 표현하고 있다. 규제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나온 적이 없는데 우리만 이를 규제라고 표현하면서 일본제품 불매운동으로 국민들을 선동하고 있다. 무슨 목적인가?

우금치 전투의 수모를 또 겪을 것인가?

우리가 일본과 무역을 하지 않으면 우리 경제가 망하는 줄 모두가 알고 있는 마당에, 일제 불매운동을 하고 있는 꼴을 일본인들이 볼 때 얼마나 어린애들 같다고 할 것인가? 어린애가 부모에게 투정부릴 때 주로 하는 첫 번째 행동이 밥을 안 먹는 것이다. 지금 하는 일제 불매운동이 마치 이런 것과 같다. 밥을 안 먹는다고 할 때, 부모는 ‘그럼 라면도 먹지 마!’라고 하면 한나절이면 끝난다. 한 두 끼는 굶어도, 세 끼까지는 견디지 못한다. 요즘 어린애 같은 유치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항일의병운동이나, 국채보상운동의 얘기도 나온다. 물산장려운동으로 국난을 극복하자는 말도 나온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파기하자고 한다. 내년 도쿄올림픽을 보이콧하자는 사람도 있다. 이것을 생떼라고도 하고 나쁜 말로는 자해공갈이라고도 한다. 올림픽보이콧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 유치한 선동을 하는 것인데, 이걸 모르고 선동에 속아 넘어가는 순진한 사람들이 의외로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우리나라가 아직도 이렇게 지독하게 유치한 나라인가‘라고 생각했다. 이런 유치함을 좀 벗어난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던가?

바다에서 한 잎 낙엽과 같은 뗏목을 타고, 돛도 펼 줄 모르면서 바다를 향해 출발하는 무모한 기상으로는 세상을 이겨내지 못한다. 28세의 Ellen MacArthur도 세계 일주를 위해 10세 때부터 시작해서 모든 항해 책을 다 읽고, 어린 나이에 항해견습생부터 시작해서 정식으로 항해를 배우지 않았던가? 우리는 과연 홀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항해를 할 장비와 실력이 갖춰져 있는가? 합심해서 일본과 맞서자고 선동하는 사람들이나 그 말에 흥분하여 자신의 차를 때려 부수는 쇼를 하는 사람들이나 유치하기는 오십보백보이다. 말도 안 되는 억지 판결로 인하여, 포스코의 성공에 많은 지원을 해준 한 일본기업의 재산을 압류하려는 움직임으로 촉발된 이번 사태는, 역시 말도 안 되는 억지 이유들로 크게 확대되었다. 7월 말인 요즘 갑자기 3.1운동 특집방송을 다시 내보내는 방송국의 수준도 참으로 딱하고, 선동에 한 몫을 하는 뉴스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언제까지 우리는 계속 3.1운동 특집 재방송만 보며 지내야 하나? 우리 모두가 연구와 공부를 게을리 해서, 모든 것이 우리 사회가 실력이 없어서 생긴 일들이 아닐까? 반일감정을 일으켜 내년 총선에 이용하려 했으니 선거가 끝나면 유치한 짓을 그만 둘까? 결국 무너진 경제에 죽창을 든 국민들만 죽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우금치 전투의 수모는 계속될 것이다. 묻고 싶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실 겁니까? 20년이라 했었나요?

황승연 객원 칼럼니스트(경희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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