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는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이유를 제대로 알고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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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연해주 지역 거주 한인들이 일본 위한 간첩행위 막기 위해 강제 이주 명령
강제이주 저항 막기 위해 한인 지도자 2,500명 처형, 이주 과정에서 25,000명 사망
조선일보는 7월 29일자 2면에서 한인(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를 보도하면서 정작 스탈린이 강제이주를 명령한 사실, 그 과정에서 저항하는 한인 지도자 2,500명 처형 등은 밝히지 않고 그저 "소련의 정책 변경"이라고 보도했다(사진은 조선일보 7월 29일자 2면 캡처).
조선일보는 7월 29일자 2면에서 한인(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를 보도하면서 정작 스탈린이 강제이주를 명령한 사실, 그 과정에서 저항하는 한인 지도자 2,500명 처형 등은 밝히지 않고 그저 "소련의 정책 변경"이라고 보도했다(사진은 조선일보 7월 29일자 2면 캡처).

7월 29일자 조선일보 2면에 “영하 40도서 토굴 팠던 그 땅에…‘同族如天 ’ 첫 추모비”라는 제하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1937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한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카자흐 첫 정착지에 추모공원 기공식을 보도한 기사였다.

고려인(소련 거주 한인 교포) 강제 이주 경로, 강제 이주로 2만 명 안팎 숨진 사례 등을 소개한 기사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었다. 대체 무슨 사연으로 러시아 극동 지방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이 갑자기 그곳에서 6500㎞나 떨어진 카자흐스탄으로, 그것도 영하 수십 도의 혹한이 몰아치는 엄동설한에 쫓겨났을까? 누가, 왜, 무엇 때문에?

2면 전체를 도배질한 기사를 아무리 샅샅이 살펴도 이 의문을 풀어주는 내용은 없었다. 또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기사를 밑줄 쳐가면서 다시 읽었다. 그제야 이런 구절이 발견되었다.“일제를 피해 조국에서 이역만리 러시아로 쫓겨나듯 이주한 데 이어, 소련의 정책으로 다시 한 번 삶의 터전을 강제로 바꿔야 했다.”

뭐라고? “소련의 정책으로 다시 한 번 삶의 터전을 강제로 바꿔야 했다”고?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윤형준이란 기자는 이 기사 취재를 위해 비싼 여비 들여가며 카자스흐탄까지 가서 취재한 것으로 크레디트가 달려 있다. 그렇다면 윤형준 기자는 현장까지 가서 취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으로 쫓겨난 진짜 이유를 전혀 몰랐단 말인가?

1863년부터 두만강 건너 한인들 이주

1860년 청나라와 러시아는 베이징조약을 체결하여 극동 연해주 지역이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한인들이 두만강 건너 러시아령으로 이주한 것은 1863년이다. 이 해에 조선인 13세대가 러시아령 노브고로드만 연안의 포시에트 지역으로 이주하여 농토를 개척했다.

이 지역에 사람이 귀했던 러시아는 조선인 이주를 적극 환영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포시에트 지역에 조선인 이주가 해마다 늘어 1920년대에는 20여만 명으로 늘었다.

1918년 4월 일본군이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 군대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시베리아 파병)하여 러시아 백군(공산혁명 반대세력)을 도와 적군(공산혁명 찬성세력)의 분쇄에 나섰다.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이 1922년 10월 철수할 때까지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은 일본군에게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1922년 10월 25일 백군 세력이 분쇄되고 일본군이 철수하자 연해주의 한인들은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적극 참여했다. 그들은 민족 차별 정책이 폐지되고, 토지가 분배되어 약소민족의 희망이 이루어지리라 믿고 소련 정권 수립에 적극 호응했다.

연해주 일대에는 1925~26년 무렵 한인으로서 소련공산당에 가입한 사람이 정당원 약 1만 5,000명, 후보당원 및 공산청년당원 1만 3,000여 명, 공산당학교에 재학 중인 사람 약 3,000명, 적군 소속 군인 약 5,000여 명이었다.

이들은 수시로 국경을 넘어 만주로 진출하여 재만(在滿) 한인사회 적화공작을 시도했다. 또 만주사변 후 중국공산당의 항일 유격대에 소속된 한인 간부들 중에는 소련공산당이 파견한 사람들이 다수였다. 이명영 교수의 『김일성열전』에 의하면 그 중 한 명이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장으로서 부대를 지휘하여 보천보를 습격한 김일성이라고 한다. 이 김일성은 후에 북한 수령이 된 김성주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소련 국경을 위협하자 소련이 바짝 긴장했다. 코민테른은 세계 각국의 공산당 지부와 외곽단체를 동원하여 “전 세계 노동자의 조국인 소련을 보위하고 중국혁명을 보위하라”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소련 지도부는 생김새가 일본인과 거의 비슷하고, 일본말을 잘하며, 소련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한인은 법적으로 일본 국적을 소지하고 있기 때문에 재소(在蘇) 한인(고려인)들을 위험분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1937년 소련 보안기관은 일본이 재소 한인들을 첩자로 훈련시켜 연해주를 교란시킬 가능성이 있다면서 한인들을 경계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후반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극동지역에서는 1936년부터 일본 관동군·만주군과 소련군 사이에 흑룡강과 우수리강 유역에서 군사 충돌이 빈번했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일본과 소련 간에 전면전으로 비화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

적백(赤白) 내전의 상처를 극복하고 겨우 회생한 스탈린 입장에서 극동 지역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스탈린은 시베리아 일대에서 전개되는 한인들의 항일 독립운동이 일제를 자극, 이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일본 위한 간첩행위 막기 위해 강제이주 단행

1937년 한인 강제이주는 이런 배경 하에서 치밀한 준비를 거쳐 진행되었다. 1937년 3월 3일 스탈린은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에서 “소련은 자본주의의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으며, 소련 내에는 외국 스파이가 가득하다”고 발언했다. 이어 1937년 4월 23일 소련 일간지 「프라우다」는 ‘소비에트 원동에서 외국 간첩 행위’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기사 내용은 일본군 정보부가 한반도에서 대(對)소련 스파이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조선 사람들을 일본 스파이로 선발하여 소련 관청이나 기업, 철도 운행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거나 파괴행위를 자행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에 발발하자 1937년 8월 21일 소련은 중국국민당과 중·소(中蘇)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이날 소련 인민위원회와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는 「극동지역 국경부근에서 한인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서명했다.

결의문 내용은 “소련 극동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간첩행위를 막기 위해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1938년 1월 1일까지 강제 이주를 완료한다”고 되어 있었다. 재소 한인들의 이주는 일본에 대한 간첩활동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임을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한인들은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으로 조선의 독립 무장부대 3,000여 명이 소련 공산당과 한인 공산당에 이어 몰살당한 바 있다. 그로부터 16년 후 또다시 스탈린과 소련 공산당에게 처절하게 배신당한 것이다.

1937년 소련 연해주에서 강제로 끌려온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처음 토굴을 파고 살았던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의 바슈토베 마을에서  2017년 8월 2일 고려인 희생자들을 위한 진혼제를 열고 있는 장면(사진 연합뉴스 제공).
1937년 소련 연해주에서 강제로 끌려온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처음 토굴을 파고 살았던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의 바슈토베 마을에서 2017년 8월 2일 고려인 희생자들을 위한 진혼제를 열고 있는 장면(사진 연합뉴스 제공).

20만 명 정도의 한인들은 화물차나 가축 운반차에 실려 연해주에서 6,000㎞나 떨어진 카자흐공화국 알마아타 지역, 우즈베크공화국 타쉬켄트 남부 벌판에 짐짝처럼 버려졌다. 한인 강제이주의 총지휘자는 내무성 극동분국 책임자 류슈코프였다. 그는 한인 강제이주 완료 후 숙청 위협에 시달리다 1938년 6월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는 일본에서 한인 강제이주 관련 내용을 폭로했는데, 강제이주 직전에 한인 지도급 인사 2,500명을 반역죄로 처형했다고 한다.

장석흥 국민대 교수의 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장 교수는 강제이주 직전, 한인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포시에트 구청위원회의 제1서기관 김 아파나시와 민족시인 조명희 등 한인 사회의 대표와 지도자들을 제거했다고 한다.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소련공산당은 한인들이 연해주 일대의 변방을 소련으로부터 탈취기 위해 무장 봉기를 준비했다고 날조했다는 것이다.

당시 강제 이주를 반대하는 한인들 수백 명이 집단 학살당해 하바로프스크의 칼 마르크스 거리 입구에 깊은 웅덩이를 파고 매장했다. 훗날 그 자리에 시립공동묘지가 만들어졌는데, 시립공동묘지 아래에는 그때 학살당한 한인들의 유골이 지금도 묻혀 있다고 한다(장석흥, ‘고려인 강제이주 70년, 中, 멀고 먼 중앙아시아로’, 경향신문, 2007년 2월 28일).

스탈린 지령받고 20만 명을 불과 50일 만에 강제 이주

박선영 교수(당시 자유선진당 의원)는 2011년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주 국립문서보관소에서 「1933년∼1937년간 고려인들에 대한 정치적 억압」에 관한 문서 총 34편을 열람했다. 박 교수는 “한인들을 군사작전 하듯이 치밀하게 강제 이주 계획을 실시하여 불과 50일 만에 강제이주를 마쳤다”고 말했다. 당시 박 교수가 언론에 발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련 정부는 강제이주 5년 전인 1932년부터 3년 간 고려인의 인구분포와 소득, 교육정도, 경제력, 법적 상태 등 광범위한 정보를 조사했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1935년부터 2년 동안 직장에서 강제 해고하고 한인들이 갖고 있던 무기를 빼앗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1937년 7월 포시에트 지역에서 최초로 고려인 8가구를 시범이주 시킨 뒤 각 주별로 대규모 강제이주지역과 이주 인원을 할당했다.

바제므스키 지역 고려인은 남(南)카자흐스탄의 아랄해 쪽으로 이주시켰고, 아무르 주와 하바로프스크 한인들은 카자흐스탄으로, 연해주 한인들은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시키는 등 한인 20만 명을 모두 중앙아시아로 축출했다. 이 과정에서 고려인들이 심하게 저항하며 이주 장비들을 빼앗는 등 극렬하게 저항했다.

이주 과정에서 2만 5,000여 명이 사망했고, 한인들의 저항이 심해지자 소련 중앙정부는 하바로프스크에 있던 극동사령부에 ‘이주에 따른 보상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행정명령서를 보냈으나 실제로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련은 연해주의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서쪽의 독일인, 유태인들의 경우는 동쪽으로 강제 이주 시켰다. 목적은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것과 비슷하다. 고송무는 자신의 저서 『쏘련의 한인들』에서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첫째, 1930년대 일본의 침략적인 정책으로 극동의 사태가 첨예화되었고, 이에 대해 소련은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인들이 소련을 향한 첩보활동에 고려인들을 이용하는 것에 무게를 두었다는 것이다.

둘째, 1934년 비로비잔에 유태인 자치주가 창설되었는데, 소련 정부는 고려인 자치구 설립을 두려워했다. 더구나 1932년 초 일본으로부터 유포된 “아시아는 황색의 대륙이다”, “아시아는 아시아 사람들에게”, “야쿠치아까지 모든 땅은 황인종에 속한다” 등의 구호가 소련 위정자들을 자극했다.

셋째, 고려인들이 연해주에서 벼농사에 성공하자, 벼 재배 분포지역을 중앙아시아까지 확대할 필요가 있었으며, 불모지인 중앙아시아 지역을 개발할 필요가 있어 강제 이주를 단행했다.

넷째, 고려인들을 한곳에 모여 살지 못하게 하는 인구 분산 정책의 일환으로, 이주 대상지를 극동에서 멀리 떨어진 중앙아시아를 택한 것은, 분산시켜 지배하는 정책의 실현이었다.

이것이 극동 러시아 지역 거주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의 진실이다. 조선일보는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내린 명령에 의해 20만 명의 한인들을 강제 이주시킨 비극을 “소련의 정책으로 삶의 터전을 강제로 바꿔야 했다”고 보도했다. 이것은 일종의 용어순화에 해당하는데, 명령권자인 스탈린, 몰로토프의 한인 강제 이주 및 처형을 지령한 사실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감싸기라도 해야 하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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