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 칼럼] 외교 실수하면 나라가 망한다
[김용삼 칼럼] 외교 실수하면 나라가 망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재인 정부의 반일·반미·친중·친북 외교는 인조와 고종의 뒤를 잇는 자멸·자폭·폭망 외교의 제3탄에 해당한다. 그 결말이 어떻게 되리란 것쯤은 이미 역사가 그 정답을 두 번이나 명쾌하게 보여주었다. 한국인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무식한 족속들인가 보다.

문재인 정부의거침없는 반일 드라이브가 일본의 무역 보복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나타났다. 한국도 이에 대한 맞대응을 예고하면서 한일 관계는 마주 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충돌을 향해 질주할 기세다. 청와대 무슨 수석이라 하는 사람은 노골적으로 '죽창가' 운운하고 있고, 기레기 언론들은 연일 반일, 혐일을 선동한다.

이번 한일 간의 갈등은 문재인 대통령의 위안부 합의 파기, 한국 대법원의 징용 문제 판결로 촉발되었고 대법원의 징용 판결로 크게 악화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에 대해 "10억 엔에 우리 혼을 팔아넘겼다"고 비판했다.

북핵 문제로 나라 전체가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듯한 와중에 불거진 한일 간의 파열음은 외교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경고음이다. 과연 외교를 잘못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외교 실패로 나라를 망친 전형적인 사례가 인조 시절 발생한 병자호란이다. 그 전말을 추적해 본다. 

1623년 3월 12일(음력) 밤, 국왕 광해군을 타도하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군이 왕궁을 향해 몰려가자 광해군은 사다리를 타고 궁성을 탈출하여 남의 집 상가에 숨어들었다. 상주의 상복을 빌려 입고 곡을 하며 숨어 있던 광해군은 상주 부인이 밀고하는 바람에 체포되었다.

인조반정이라 불리는 이 쿠데타의 대의명분은 광해군이 명나라에 사대하지 않고 오랑캐의 나라와 친교했으며,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이복 동생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것이다. 상국(上國) 명나라에 불충(不忠)하고, 불효를 저지른 것이 폐위의 직접적인 이유였다.

광해군은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고 부국강병의 의지가 확고했던 국왕이었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한 국가를 재건한 것은 그의 공로다. 또 중국 대륙에서 명·청 교체라는 천하대란이 일어나자 사대주의라는 명분을 유보하고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과 비밀리에 교섭하여 국가안보를 지켜낸 현명한 군주였다.

건주여진의 추장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운 것은 1616년이다. 누르하치가 군사를 동원하여 만주 일대에서 명나라의 패권에 도전하자 명은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토벌에 나섰다. 광해군은 겉으로는 명을 지지하면서도 누르하치와 외교 채널을 열어놓고 변화무쌍한 국제정세에 기민하게 대처했다.

천하대란의 와중에 현실외교로 위기 모면한 광해군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 조선을 구원해준 명나라는 후금을 치기 위해 조선에 병력을 보내라고 압력을 가했다. 광해군은 비밀리에 첩보원을 만주에 파견하여 양 세력의 우열을 파악한다. 그 결과 요동의 명나라 군사는 2만도 안 되는 반면, 만주족을 통일한 누르하치의 군대는 대군을 동원해도 이기기 어려울 정도로 세력이 강해졌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명은 저무는 해요, 후금은 떠오르는 태양의 기세이니 누가 승자가 될지 예측불허의 상황이었다. 광해군은 명의 파병 요구를 온갖 핑계를 대고 빠져나갔다. 하지만 철부지 대신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오매불망 망해가는 명나라만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런 식이다.

“중국에 난리가 났을 때 제후가 구원하는 것이 ‘춘추’(春秋)의 대의요 변방을 지키는 자의 직분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때) 소생시켜 준 은혜를 입었으니 황제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중국 조정은 부모와 같은데 상국이 모욕당한 이상 징병 요청을 기다릴 것도 없이 달려가 구원하는 것이 의리상 마땅합니다.”(광해군 10년 4월 5일 실록)

명의 압력을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광해군은 울며 겨자 먹기로 요동 파병을 결정했다. 요동 파견군 총지휘관 도원수 강홍립 휘하에 병력 1만 3,000명이었다. 조선-명나라 연합군은 사르후(薩爾滸)전투에서 크게 패해 만주를 누르하치에게 내주게 되었다.

이때 강홍립 군대는 패전한 것이 아니었다. 광해군은 사전에 정보원을 누르하치에게 보내 조선군은 누르하치 군대와 싸우지 않기로 했으며, 전투 상황을 엿보다 조직적으로 투항키로 사전에 밀약했다. 이 부분에 대해 광해군일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강홍립 등이 압록강을 건넌 것은 임금이 명나라 조정의 정병 독촉을 물리치기 어려워 억지로 출사시킨 것이다. 우리나라는 애초부터 오랑캐를 원수로 적대하지 않아 싸울 뜻이 없었다. 그래서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지시하여 오랑캐 장수와 몰래 통하게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심하 전투 때 오랑캐 진중에서 먼저 통사를 부르자 강홍립이 때를 맞춰 투항한 것이다.”(광해군 11년 4월 8일)

1619년 4월 2일, 후금의 사신이 화친을 요구하는 누르하치의 서신을 보내왔다. 이에 답할 외교문서를 준비하던 조정에서 한바탕 격론이 벌어졌다. “명나라에 알리지 않고 대국의 원수와 화친을 맺는 것은 신하로서 할 일이 아니다”라는 의견이 제기된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모르는 철부지 대신들의 주장에 대해 광해군은 이렇게 꾸짖었다.

“우리에게 믿을 만한 형세가 있다면 누르하치 서신을 불태우고 거절하거나 의리로 타이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털끝만큼도 믿을 만한 구석이 없는데 한갓 고상한 말로 천조(중국)를 꾸짖는 그들을 꺾으려 한다면 반드시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옛날 임진년에 왜인 서신에 답할 때도 오늘과 같았기 때문에 다음해에 큰 병난을 초래했다. 전철이 멀지 않은데 경들은 한갓 대의를 내세워 흉악한 오랑캐의 노여움을 촉발하려 하니 너무나 생각이 짧다. 지금 수천 명의 정병이 오랑캐에게 붙잡혔는데 경들은 측은한 마음도 없이 그들을 오랑캐 병사가 되게 하고 싶은가. 경들은 어째서 이런 것을 생각지 못하는가.”(광해군 11년 4월 11일)

쿠데타로 광해군 몰아내고 친명(親明)외교 강화한 인조

해를 넘겨 1620년 초, 누르하치와의 교섭이 원만히 진행되어 포로로 잡혀 있던 강홍립의 귀국을 알리는 통보가 왔다. 비변사는 강홍립이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므로 입국시켜서는 안 된다는 보고를 올렸다. 광해군은 “말이 너무 지나치다. 즉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어명을 내렸다. 이에 대해 사관(史官)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사신은 논한다. 강홍립 등이 군사를 멋대로 이끌고 누르하치에 투항하여 나라를 팔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면 임금을 잊고 나라를 버린 죄는 피하기 어렵다. 마땅히 형벌을 시행하여 그의 머리를 중국에 전해야 한다.”

사관들마저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비판하고 나설 정도였으니, 광해군은 얼마나 외로운 상황에서 국가 운영을 해나가야 했을까. 국왕의 현실주의 외교노선과 대신들의 명분주의 외교노선이 갈등을 빚으면서 광해군을 축출하는 인조반정 쿠데타가 터졌다. 그 결과 망해가는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집단이 집권하면서 나라가 거덜나기 시작했다.

인조는 왕위에 오른 지 1년도 못 되어 서북 변경지역을 수비하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버리고 피난을 떠났다. 반란군은 서울 신촌 전투에서 패해 와해되었다. 여진족(後金)의 군사행동에 대비하기 위해 배치했던 서북 방어군이 이괄의 난 덕분에 와해되면서 국경은 텅 비게 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627년 누르하치가 3만의 군사로 조선을 침략했다. 정묘호란이다. 최명길 등이 나서서 후금을 형님으로 모시는 강화회담으로 겨우 휴전을 성사시켰다. 여진족의 침략을 당하고도 국가 지도부는 군량을 확보하고 병기를 생산할 생각은 뒷전으로 미룬 채 절개를 지키다 죽은 부녀자들을 칭찬하는 데 열을 올렸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오랑캐의 변란 때 절개를 지키다 죽은 부녀자가 모두 126인인데 그중 절의가 가장 크게 드러난 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해주에 사는 정득주의 아내 김 씨는 적의 핍박을 당하자 그의 딸을 물에 던지고 아들을 업고 물에 빠져 죽었고, 해주 양인 임순립의 아내는 적을 만나 쫓기자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아무개의 아내는 물에 빠져 죽는다’고 부르짖고 죽었습니다. 장연에 사는 강취규의 아내 강 씨는 적병을 만나자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적이 일으키려 하자 엎드린 채 나무뿌리를 잡고 버티니 적이 칼로 그의 손가락을 잘랐으나 끝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양쪽 귀를 베어도 일어나지 않자 적은 그의 등을 찌르고 돌아갔습니다.”[인조 5년(1627) 7월 29일]

참다못한 지방 선비들이 ‘정부와 관리들은 대오 각성하라’면서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국가가 되놈을 상대로 화친했다 해도 지금까지 오랑캐와 화친했다가 끝까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군신 상하가 마음을 합쳐 방비책을 세워야 마땅한데도 적이 물러간 1년 동안 대소 관원들은 우스갯소리나 하며 담배만 피우고 기생이나 끼고 술타령을 할 따름입니다. 혹시라도 저 오랑캐들이 마음을 고쳐먹지 않고 다시 우리나라에 군사행동을 취한다면 무슨 병력으로 지킬 것이며 어떤 계책으로 방어할 것입니까.”[인조 6년(1628) 8월 19일]

“국가란 반드시 자신이 해친 뒤에야 남이 해치는 법”

후금은 양국 관계를 주종관계, 즉 임금과 신하의 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오매불망 망해가는 명나라를 짝사랑하던 집권층이었으니 당연히 이 제의를 거부했다. 1636년 청(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다) 태종이 12만 대군을 이끌고 또 다시 조선을 침략했으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만주팔기 기병대는 조정의 파발마보다 더 빠르게 진격하여 서울을 포위했다. 강화로 피난을 가려던 인조는 길이 끊기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전을 벌였다. 40일을 버티지 못하고 인조는 항복한다. 인조는 1637년 1월 30일(음력), 자신들이 ‘오랑캐’라고 그토록 멸시했던 여진족 추장 홍타이지(청 태종)에게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찧는(三拜九叩頭禮)” 치욕스러운 항복을 했다.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서 있는 삼전도비. 지금으로부터 382년 전 조선 국왕이 이곳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찧는' 치욕스런 항복을 했다. 그 이후 조선은 청을 원수로 삼고 망상과도 같은 북벌론을 외친다(사진 연합뉴스).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서 있는 삼전도비. 지금으로부터 382년 전 조선 국왕이 이곳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찧는' 치욕스런 항복을 했다. 그 이후 조선은 청을 원수로 삼고 망상과도 같은 북벌론을 외친다(사진 연합뉴스).

인조 쿠데타의 대의명분은 인목대비에 대한 광해군의 불효와 친명사대(親明事大)를 하지 않았다는 상국에 대한 불충 두 가지였다. 인조 정권은 청나라의 침략을 당했을 때 목숨 바쳐 싸우는 것이 대의명분에 합당한 태도였다. 하지만 막상 침략을 당하자 대신들은 그 동안의 주장과는 달리 청나라와 화친을 맺어야 한다는 주화론(主和論)이 득세했다.

눈치도 없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주전론자(主戰論者)들은 국왕이 항복하기 전날 청나라에 볼모로 넘겨졌다. 인조 15년 1월 29일, 혹한이 몰아치는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주전론을 주장한 윤집, 오달제에게 포로로 잡혀가기 직전 하직인사를 받았다. 실록은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인조 : 그대들의 식견이 얕다고 하지만 그대들의 주장은 나라를 그르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마침내 이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고금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윤집 : 진실로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어찌하여 구구한 말씀을 하십니까.

인조 : 그대들이 나를 임금이라고 여겨 외로운 성에 따라 들어왔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내 마음이 어떻겠느냐.

오달제 : 신은 자결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신들이 죽는 것이야 애석할 것이 없지만, 전하께서 성에서 나가시게 된 것을 망극하게 여깁니다. 신하된 자들이 이런 때 죽지 않고 장차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인조는 내시에게 술을 대접하도록 했다. 두 신하가 술을 다 마시고 하직인사를 올리자 인조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치욕스런 항복을 한 후 인조는 관련 사실을 알리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내용이 참으로 기막혀 그 일부를 소개한다.

“…지난날의 잘못을 생각하건대 후회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갑옷과 병기를 수선하고 단련하여 환란에 대비할 것을 생각했지만 각 마을이 이로 인해 불안해했다. 미곡을 무역하여 군량을 비축하려 했지만 민력(民力)이 크게 곤궁해졌다. 대군이 몰려오기 전에 나라는 이미 병들었으니 ‘국가란 반드시 자신이 해친 뒤에야 남이 해치는 법이다’라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느냐.”(인조 15년 2월 19일)

수십 만 백성 포로로 끌려가 몸을 더럽히다

청나라는 철수 과정에서 주전론을 주장했던 신하들과 20만~50만에 달하는 포로를 잡아갔다. 청나라에 끌려갔던 여인들은 스스로 탈출하거나 몸값을 지불하고 귀국했다. 조선 여성들이 수없이 본국으로 탈출하자 청나라는 “포로 중에 몸값을 지불하지 않고 탈출한 사람을 모두 잡아오지 않으면 또다시 침략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인조는 도망해 온 사람을 잡아서 청나라로 돌려보내라는 쇄환령을 내리고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한다.

“슬프다. 우리 백성이 이역 땅에 잡혀가 골육을 그리워한 나머지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하기를 마치 그물을 벗어난 토끼가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가듯 했다. 몸을 숨겨 목숨을 부지하기 바빠 본업도 잃었는데, 일제히 찾아내 결박하여 (청나라로 다시) 보내기를 도적 대하듯 하여 자식은 부모를, 남편은 아내를 이별하고 있다.

헤어질 때에 정리가 극도에 달해 목매어 죽기도 하고, 일부러 굶어 죽기도 하며, 심지어 수족을 잘라 이별을 보류하는 자도 있다. 추위와 굶주림에 괴로움을 당해 가는 도중이나 옥중에서 죽는 자도 많이 있다. 게다가 관리들이 엄한 독촉에 쫓기고 연루될까 두려워 여행하는 사람을 강제로 붙들어 대신 보내는 일도 있었다.

아, 싸움터에 나가 창을 맞거나 피난하다 포로가 된 것은 얼떨결에 생겼던 일이라 어쩔 계책이 없었을 것이며, 나 역시 손쓸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 쇄송은 나로 인해 빚어진 일인데도 관리들을 호령하여 결박하는 일을 스스로 하고 있으니, 이 어찌 인민의 부모가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느냐. 이번 일을 당한 백성들이 아무리 나를 꾸짖고 원망해도 이것은 나의 죄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전쟁에 패하면 가장 비참한 존재는 여자다.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목숨 걸고 탈출하거나 골육이 돈을 주고 사오는 방식으로 많은 포로들이 귀국했다. 하지만 오랑캐들에게 정조를 짓밟힌 후 귀국한 여자들에 대한 처리 문제로 조선사회는 한바탕 시끌벅적했다.
나라에서는 돌아온 여성들을 환향녀(還鄕女)라 불렀다. 환향녀들은 오랑캐 나라에 끌려가 정조를 더럽혔다는 죄로 집안에서 받아주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비구니가 되는 사례가 허다했다. 이것이 후일 ‘화냥년’의 어원이 되었으니, 불행하여라 조선의 여인들이여!

학계에서는 광해군 정권을 무너뜨린 인조 쿠데타를 ‘반정’(反正)이라고 정의한다. 반정이란 유교적 정통론에 입각하여 ‘잘못된 정치행위를 바로잡기 위해’ 혼군(昏君)을 폐하고 새 국왕을 세우는 것을 일컫는 용어다.

반정이란 용어가 정당성을 얻으려면 광해군 시대보다 인조 시대가 백성들의 삶이 더 윤택해지고 국가의 위엄과 자존이 높아졌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 역사는 그 반대로 진행되었다. 멍청한 지배층들은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파악할 만한 지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 망해가는 명나라에 줄을 서는 무뇌아적 외교로 정묘·병자호란의 침략을 자초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합의한 위안부 합의를 백지화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한일 감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사진은 문재인 대통령이 위안부 피해자로 알려진 곽예남 할머니와 인사하는 장면. 곽 할머니는 지난 3월 3일 별세했다(사진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합의한 위안부 합의를 백지화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한일 감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사진은 문재인 대통령이 위안부 피해자로 알려진 곽예남 할머니와 인사하는 장면. 곽 할머니는 지난 3월 3일 별세했다(사진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의 반일·친중외교, 그 결말은?

인조가 적장 앞에 나아가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이마를 아홉 번 땅에 찧은 것이야 잘못한 죄가 많으니 그렇다 치자. 수많은 백성들은 무슨 죄가 있어 전란의 와중에 굶어죽고, 매맞아죽고, 포로로 끌려가 정조를 잃었단 말인가. 

외교 잘못하면 나라가 망해 백성들만 죽어난다는 교훈을 확실하게 보여준 사례가 정묘·병자호란뿐이었다면 얼마나 다행이었겠는가. 하지만 참혹한 외교 실패를 경험하고도 조선의 지도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과 민비는 영국-러시아가 벌이는 그레이트 게임의 소용돌이 와중에 죽자 사자 러시아 편에 서는 망국 외교의 선봉에 섰다. 그 결과 민비는 끔찍하게 시해 당하고 나라가 망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재인 정부의 반일·반미·친중·친북 외교는 인조와 고종의 뒤를 잇는 자멸·자폭·폭망 외교의 제3탄에 해당한다. 그 결말이 어떻게 되리란 것쯤은 이미 역사가 그 정답을 두 번이나 명쾌하게 보여주었다. 한국인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무식한 족속들인가 보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