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 칼럼] 인공(人共) 치하 90일 간 서울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김용삼 칼럼] 인공(人共) 치하 90일 간 서울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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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대한민국이 제공하는 ‘자유’는 그저 물과 공기, 산소 이런 것처럼 날 때부터 거저 얻은 것이라 믿고 있다. 때로는 그 자유가 지나쳐 자기 체제와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자유란 것의 소중함을 아무리 목이 쉬어라 설명을 해도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자유를 빼앗겨 봐야 그 소중함을 아는 국민이라면 그 수준이 축생이나 견생과 다를 바 무엇인가?

장마전선이 오락가락하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불쾌지수가 인내심의 한계치를 오락가락하며 농간이 한창이다. 특히 올 여름은 무더위로 인한 불쾌지수에 더하여 문재인-트럼프-김정은 합작의 ‘북핵 쑈쑈쑈’ 덕분에 건전한 시민의식을 가진 유권자 및 납세자들의 정신건강을 더더욱 위협한다.

서울 강남지역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후배의 전언에 의하면 자기 병원 주변의 좀 산다는 집안 사람들은 대부분 해외 이주를 했단다. 가장(家長) 혼자 서울에 남아 돈을 벌다가 여차 하면 비행기 타고 뜬단다. 그저 애국심 하나로 이 험악한 적폐청산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그저 신기루같은 세상일 뿐이다.

6월 말 판문점에서 문재인-김정일-트럼프 합작의 ‘북핵 쑈쑈쑈’가 벌어진 후 “내년 4월 총선은 해보나 마나”란 절망감이 엄습하고 있다. 심지어 밑도 끝도 없이 내년 총선 이전 김정은 서울 답방설이 횡행하고,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달러가 급등할 것이니 현찰을 달러로 바꾸란 말도 심각하게 나돈다. 급기야 국방부가 6·25 남침 70주년을 맞는 2020년 남북 공동으로 6·25 기념행사를 기획하고, 보훈처도 비슷한 행사를 추진 중인 사실이 언론보도를 통해 드러났다. 가히 멘탈 붕괴 상태다.

춘추시대 말기의 잔인무도한 강도 두목 도척은 죄 없는 사람을 무시로 죽여 그 살점을 포를 떠서 씹어 먹었다. 악랄한 짓을 무시로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도척은 부귀영화 속에 천수를 누렸다. 반면에 중국 은나라 제후 고죽국의 왕자로 태어난 백이(伯夷)와 숙제(叔弟)는 부친이 사망하자 서로 후계자 되기를 사양하며 나라를 떠났다.

결국 다른 형제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백이 숙제는 주나라 백성 되기를 거부하고 수양산에 숨어들었다. 그들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청렴 고결하게 살다 굶어 죽는다. 이 모습을 전하며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과연 하늘은 있는가!” 하고 탄식한다.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바치고, 부상을 당해 암울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6·25 참전용사와 애국자들은 작금의 문재인 정부 하는 꼴을 보고 사마천과 거의 비슷한 심정이지 않을까?

인공 치하 90일은 연방제 통일국가의 선행학습

1950년 7월, 대한민국은 아비규환이었다.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전면 남침으로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이 점령당하고 7월 20일 대전을 방어하던 미 24사단장 딘 소장이 적의 포로가 된다.

수도 서울을 되찾은 것은 그로부터 두 달여 후인 9월 28일이었다. 인민군에게 서울을 빼앗긴 지 석 달 만에 다시 자유를 되찾은 것이다. 과연 적치(敵治) 90일 간 서울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끔찍했던 체험기를 돌아보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 국가’를 미리 체험하는 선행학습이 될 것이다. 하여 6.25 당시 인공 치하의 정황을 추적해 본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서울대 사학과 교수(전임강사) 김성칠은 자칭 “대한민국에 충성된 백성이 아니었기에”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 그는 자신의 적 치하 체험을 일기로 남겼는데, 그것이  『역사 앞에서-한 사학자의 6·25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일기와, 필자가 2016년에 발간한 『김일성 신화의 진실』을 중심으로 인공 치하의 서울 상황을 소개한다.

6.25 당시 적 치하의 적나라한 상황을 일기로 남긴 김성칠 서울대 사학과 교수의  『역사 앞에서-한 사학자의 6·25일기』
6.25 당시 적 치하의 적나라한 상황을 일기로 남긴 김성칠 서울대 사학과 교수의 『역사 앞에서-한 사학자의 6·25일기』

인민군은 창동-미아리에 방어선을 형성한 국군의 저항을 뚫지 못해 고전하자 2대의 전차와 소대 병력을 서울 동북쪽 홍릉 지역으로 우회시켰다. 6월 28일 새벽 2시 인민군 전차가 서울시내 진입에 성공한다. 등 뒤에 적 전차가 나타나 포를 쏘아대는 바람에 미아리 저항선이 무너지자 국군 지휘부는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 교량을 폭파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김일성은 즉각 서울로 달려왔다. 오전 11시 30분, 김일성은 인민군 전차부대를 중앙청과 서울시청 앞에 세워놓고 거청하게 서울 점령식을 거행했다. 서울시민들에게 인민군의 위용을 한껏 과시하기 위한 군사 퍼레이드였다. 만약 그 시각에 인민군 전차가 한강으로 쇄도하여 한강 다리가 끊겨 도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국군을 공격했다면 한강 북단 곳곳에서 끔찍한 학살극이 벌어졌을 것이다.

서울 점령식을 마친 김일성은 경무대에서 휴식을 취했으며, 중앙청 지하실에 마련된 전선사령부에서 승리의 향연을 베풀고 축배를 들었다. 인민군은 사흘 동안 전승 축하회를 열고 반동 숙청에 나섰다. 병사와 장교들은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고 시내 구경을 하는 등 마치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처럼 행동했다. 김일성은 7월 5일 서울 공략에 공을 세운 제3·4사단에게 서울 명예칭호를 붙이는 것을 허용했으며, 기갑여단에게는 서울 제105기갑사단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서울은 삽시간에 붉은 색 일변도로 변했다. 서울 시민 절반 이상이 거리로 나와 인공기를 흔들며 인민군을 열렬 환영했다. 인민군 전차는 서울에 들어오자마자 서대문 형무소로 직행하여 감옥에 있던 사상범(좌익 공산주의자)과 경제사범, 살인범 등 잡범들을 석방시켰다. 이승만 정부의 강력한 반공정책으로 잠적했던 남로당 등 공산주의자들이 제 세상을 만났다. 그들은 형무소에서 석방된 공산주의자들과 합세하여 인민군 점령정책에 적극 앞장섰다.

서울에는 ‘인민군 환영형’이 다수였다

인민군의 뒤를 따라 들어온 정체불명의 부대(보위대로 추측됨)는 이들을 ‘인민의 영웅’으로 추켜세워 ‘국가반역자’들을 잡아들이는 앞잡이로 이용했다. 인민군은 즉시 시내 소탕작전과 ‘국가반역자’(한국의 공무원, 우익인사, 자본가, 지주, 군인, 경찰 등)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체포된 자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일본육전사연구보급회편, 『한국전쟁(1)-38선 초기전투와 지연작전』, 1986, 명성출판사, 1986, 97쪽).

6월 28일 서울대 교수 김성칠은 자신의 일기에 좋든 싫든, 원했든 원치 않았든, 하룻밤 사이에 대한민국이 아닌 다른 나라 백성이 된 어리둥절함을 기록하고 있다. 거리에는 이미 붉은 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는 사람이 있고, 학교 깃대엔 말로만 듣던 인공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일기를 소개한다.

“되넘이고개(미아리고개)를 넘어서 동소문(혜화문)을 향하여 탱크며 자동차며 마차며 또 보병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들은 비록 억센 서북사투리를 쓰긴 하나 우리와 언어·풍속·혈통을 같이 하는 동족이고 보매 어쩐지 적병이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디 멀리 집 나갔던 형제가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오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그들이 상냥하게 웃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적개심이 우러나지 않는다.”(김성칠 지음·정병준 해제, 『역사 앞에서-한 사학자의 6·25일기』, 창비, 2017, 81쪽)

인민군이 남침하자 서울을 탈출하여 피난 떠난 시민은 약 40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 중 80%는 북한에서 공산주의의 포악성을 적나라하게 체험하고 월남한 사람들이었다. 나머지 20%는 고급 공무원, 자본가, 우익계 정치가, 자유주의자, 군인, 경찰관 등의 가족들이었다. 서울에 남은 시민들은 크게 세 가지 유형의 행동을 취했다.

첫째는 환영형. 이들은 미친 사람처럼 적기를 흔들어대며 북한군을 따라다니며 그 앞잡이 노릇을 했다. 둘째는 소극적 동조형 혹은 관망형. 이들은 인민군의 점령정책을 마지못해 따랐고, 전황이 인민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심스럽게 집에 숨어 있거나 산으로 도피한 사례다. 셋째는 잠행형. 미처 피신하지 못한 공무원, 군인과 경찰관, 기업인 등으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숨어 살면서 체포를 피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점령당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인공기를 들고, 붉은 완장을 차고 나타나 인민군을 열렬 환영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점령당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인공기를 들고, 붉은 완장을 차고 나타나 인민군을 열렬 환영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서울에서는 환영형이 많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부분 지하에 숨어 있던 남로당원이나 좌익 동조자들이었다. 국회의원 48명도 서울에 남았다. 자신이 중립 혹은 좌익계이기 때문에 공산당 치하에서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고 확신한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김효석 전 내무부장관, 공산당원이었다가 전향하여 국회 부의장을 지낸 김약수, 사회당 당수 조소앙, 원세훈(민족파), 김규식(상해 임시정부 원로) 등이 있었다. 그들은 기대와는 달리 인민군 후퇴 과정에서 모두 납북되었다.

서울 점령 직후 북한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서울 파견 연락사무소를 설치했다. 김일성 직계인 이범순이 평양의 당중앙 사무국원을 이끌고 나타나 ‘남조선 해방지구’의 당 조직과 정치활동을 장악했다. 동시에 인민군도 서울시 위수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박효삼이 임명되어 치안의 전권을 장악했다.

점령지에서 식량 강탈하여 인민군과 공산당 먹여

조선노동당 서울 파견 연락사무소는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남한 청년들을 징집하여 조선인민의용군을 조직했다. 또 도로와 교량의 수리 복구, 식량과 부상병 수송을 위한 노력대를 편성했다.

6월 29일 ‘자치대’라고 쓴 붉은 완장을 찬, 우락부락하게 생긴 청년들이 총을 메고 다니면서 집집마다 식량 보유량을 조사했다. 이들은 인민군을 위한 식량 징발 담당이었다. 그들은 “만고 역적 이승만 도당들의 학정으로 말미암아 선량한 인민들이 많이 굶어죽을 지경에 놓여 있으니 우선 가진 것을 다 같이 나눠 먹어야 한다. 그러면 인민공화국에서 1주일 안으로 식량을 넉넉히 배급해 줄 것이다”라며 모조리 강제로 빼앗아갔다(김성칠 지음·정병준 해제, 앞의 책, 84~85쪽).

남한 점령지에서 강제 징발한 식량은 인민군을 비롯한 당 기관, 정권 기관의 공무원에 한해 배급을 주고 시민들에게는 일체의 식량 배급을 중단했다. 인민군 점령지에서는 모든 공장과 직장이 문을 닫아놓고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선언했다. 이것이 인민군 치하에서 자행된 스탈린식 중점배급정책이다. 특히 인구가 밀집한 서울의 경우 150만 시민들에게 식량 배급을 중단하면서 아사자가 속출했다.

이 정책으로 인해 김일성은 서울시민을 완전히 적으로 만들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던 3개월간 서울시민은 기아선상에서 헤매었고, 식량을 구하러 농촌으로 흩어지는 바람에 9월 초에는 서울시 인구가 3분의 1로 줄었다(박갑동 지음·구윤서 옮김, 『한국전쟁과 김일성』, 도서출판 바람과 물결, 1990, 108쪽).

이어서 정치적 적대자의 숙청에 나섰다. 남한 정계를 초토화하여 김일성이 안심하고 서울로 천도하기 위한 조치였다. 북한에서 내려온 노동당원들은 급료 외에 같은 당원인 남한 출신 당원의 급료보다 3~4배가 넘는 출장비와 전시(戰時)수당을 받았다. 또 북한 화폐에 대한 교환비율을 8배로 높여 손목시계, 가죽구두, 피복류를 마구 사들였다. 이 모습을 본 서울시민들은 “북한 거지들이 서울을 지배하면 서울은 텅 비게 될 것”이라고 불평했다.

서울을 점령한 김일성은 사흘 간 남진을 멈추고 “남로당 20만 명 총궐기” 소식을 기다렸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조용했다. 몸이 단 박헌영은 6월 28일 남로당원과 당 조직에게 총궐기를 호소하는 방송연설을 했다. 그것은 연설이 아니라 차라리 남로당원들을 향한 힐책과 비난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인민군은 여러분 남조선 인민을 구하러 온 것입니다. 여러분의 원한을 풀어주고 역도들이 일으킨 내전을 끝내기 위해 진격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러한 엄숙한 시기에 모든 남반부 인민들은 왜 총궐기를 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주저하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 같이 일어서서 이 전 인민적, 구국적 정의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적의 후방에 있어서는 첫째도 폭동, 둘째도 폭동, 셋째도 폭동입니다. 전력을 다해서 대중적, 정치적 폭동을 일으키시오.”(하기와라 료(萩原燎) 지음·최태순 옮김, 『한국전쟁』, (주)한국논단, 1995, 266~267쪽)

박헌영이 "첫째도 폭동, 둘째도 폭동, 셋째도 폭동"이라고 다그쳤음에도 불구하고 남한 전역에서 인민군의 남침을 반기는 남로당의 폭동은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인공기를 대문에 내걸다

그늘에 숨어서 쥐구멍을 찾던 공산주의자와 그 동조자들은 제 세상을 만났다. 거리에는 붉은 완장을 차고 활보하는 청년들이 급격히 늘었다. 그들 중에는 어제까지 대한청년단 감찰부 완장을 차고 다니던 청년들도 있었다. “대한민국에 그다지 충성하지 않았던” 서울대 교수 김성칠도 시류에 편승하기 위해 붉은 잉크와 푸른 잉크로 인공기를 그려 자기 집 대문에 달았다.

깃발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 그는 일부러 동회 앞까지 가서 게양된 인공기를 열심히 관찰한 다음 그려서 대문에 달았다. 그는 7월 3일 일기를 통해 “이 모습을 본 아내와 서로 보고 멋없이 웃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6.25 당시 인민군 점령지에서는 인민재판이 벌어져 '반동'으로 몰리면 즉결처형되었다.
6.25 당시 인민군 점령지에서는 인민재판이 벌어져 '반동'으로 몰리면 즉결처형되었다.

인민공화국과 좌익분자들에게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김성칠의 생각은 불과 며칠 사이에 산산이 부서졌다. 명륜동에서 벌어진 인민재판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한 사람씩  성균관 앞으로 모이라기에 나가보았더니 청년 몇 사람을 끌어다놓고 따발총을 멘 인민군들이 군중을 향하여 “이 사람이 반동분자요 아니요?” 하고 물었다. 모두들 기가 질려 말이 없었는데, 그중에 한두 사람이 “악질 반동분자요”하고 소리치자 인민군이 말없이 현장에서 총을 쏘아 죽였다. 청년들은 피를 뿜으며 버둥거리다 숨졌다(김성칠 지음·정병준 해제, 앞의 책, 99쪽).

월북했던 남로당 간부들은 인민군 점령지로 내려와 당 조직을 재건했다. 이 작업의 총 지휘자는 이승엽으로, 그의 직책은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겸 서울시장이었다. 그는 박헌영 지지자들을 찾아내 남한 각 지방의 당위원회를 이끌 사람들을 임명했다.

북한은 남한에서 식량을 조달하려 했으나 남한 주민들의 비협조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농민들에게 “공짜로 땅을 나눠준다”는 토지개혁을 통해 식량을 염출하려 했다. 그들은 7월 4일 토지개혁을 시행하여 남한 지역 토지를 강제 몰수하고 재분배했다. 8월 18일에는 수확된 모든 곡식의 25%를 거두는 현물세제를 제정했다.

토지개혁을 하면 공산당을 지지할 것으로 믿었던 인공 당국은 농민들 반응이 떨떠름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알고 보니 이미 6·25 직전에 이승만 대통령이 농지개혁을 실시하여 자기 소유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로당 고위 간부였던 박갑동은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없었어도 인민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버틸 힘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유는 남침 때 북에서 한톨의 식량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민군의 최대 약점은 보급이었다. 인민군에는 아예 보급부대가 없었다. 이것은 러시아 혁명 내전시대에 적군(赤軍)들이 식량을 전적으로 혁명을 지지하는 민중에 의존하여 식량 수송을 하지 않고 부대 이동을 한 것을 모방한 것이다. 

김일성은 남한을 해방한 후 남한 인민을 어떻게 먹이며, 무엇을 입힐 것인가 하는 배려가 전혀 없었다. “남한에 무기만 갖고 내려가면 공짜로 공산혁명이 이룩된다”는 약탈적인 생각에서 남침을 한 것이다.

40만 명의 남한 청년 강제 징집, 총알받이로 삼다

북한은 점령지에서 전시동원령을 내려 19세~37세의 청년은 보이는 족족 ‘의용군’으로 강제 징집하여 전선으로 내몰았다. 심지어 19세 미만의 중학생들까지 강제로 동원해갔다. 김일성은 자기 입으로 남한 점령지에서 강제 징집한 남한 청년의 숫자를 40만 명이라고 밝혔다. 40만 남한 청년의 피를 이용하여 한반도를 공산화하려 한 것이다.

서울대 교수 김성칠은 7월 11일자, 7월 12일자 일기에서 인민의용군 강제모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당국은 조직적인 모든 기관을 동원하여 애국적인 청년남녀는 모두 의용군 대열에 나서라고 외치고 있다. 마을에선 동민을 모아 보내고, 학교에선 학생들을 끌어 보내고 직장에선 종업원을 채찍질해 보내고, 그래도 부족함인지 가두에서 젊은 사람을 붙들어 보낸다 하여 큰 공황을 일으키고 있다.”(김성칠 지음·정병준 해제, 앞의 책, 110쪽)

“신문에 보면 어느 대학에서 몇십명, 어느 중학에서 몇백명, 심지어 동덕 같은 덴 여자중학이면서도 5, 6학년 전원 2백명이 미적(美敵)과 이승만 도당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서 자진 의용군에 지원하였다는 시세 좋은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게재되어 있다. 지원하면 그날로 곧 출진하는 것이 이 나라의 특색이다.”(김성칠 지음·정병준 해제, 앞의 책, 111쪽)

인민군은 점령지에서 남한 청년 40만 명을 '인민의용군'으로 끌고 가 총알받이로 써먹었다.
인민군은 점령지에서 남한 청년 40만 명을 '인민의용군'으로 끌고 가 총알받이로 써먹었다.

백주 노상에서 젊은이들을 강제로 납치하여 총알받이로 내모는 일들이 자행되면서 인민군에 대한 민심이 크게 이반되었다. 7월 16일자 일기에서 김성칠은 ‘미국(美國)’은 어느새 아름다울 미(美)가 쌀 미(米)자로 바꿔 ‘미국(米國)’으로 변했고, 미국을 언급할 때면 늘 그 앞에 “강도 미제의 주구”, “흡혈귀 미제”라는 수식어가 붙었다고 전한다.

미군이 서울을 맹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제에 대한 일반시민의 적개심은 불타오르지 않았다. 더러는 시민의 머리에 폭탄을 퍼붓는 것이나 다름없는 미군 폭격에 대해 자신을 비롯한 서울 시민들이 “일종의 희망을 품는 것 같아 보이니 이상한 일”이라고 토로한다(김성칠 지음·정병준 해제, 앞의 책, 122쪽)

8월 19일자 일기에서 김성칠은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했을 때 어중이떠중이들이 모두 붉은 완장 차고 설쳤는데, 두 달도 안 돼 세상인심이 역전되었음을 토로하고 있다. “사람들 거의 전부가 공산주의를 외면했고, 어떤 명령이 내려와도 비협력적이고, 돌아서서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공산당들이 입버릇처럼 인민을 위한다는 정치가 일마다 인민에게 너무 각박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미국이 참전하고 그 폭격이 심해지자 세상이 머지않아 반드시 뒤집어질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김성칠 지음·정병준 해제, 앞의 책, 184쪽).

사라진 언론의 자유

세상이 바뀌면서 신문도 입장이 달라졌다. 적어도 좌경적 색채를 지녀서 대한민국에서 언론의 자유를 얻지 못해 고민하던 몇몇 신문은 적 치하가 되면서 좋은 세상을 보겠거니 기대가 컸을 것이다. 그런데 좌우 구분 없이 전부 하룻밤 사이에 신문이 폐간되었다. 이 모습을 본 김성칠 교수는 “우익신문들은 반동으로나 굴었으니 할 말이 없겠지만, 좌익신문들은 사형선고를 받으로 춤추고 덤빈 폭이 되었으니 그 감회 어떠하리. 하루아참에 폐간이 되어놓고 보면 언론의 자유니 무어니 하고 떠들 겨를도 없을 것이니 딱할 밖에” 라고 감상평을 남겼다. 인공 치하에서 신문 폐간과 관련한 김성칠의 일기다.

“그들의 시설을 전부 몰수해서 대신 나오는 것은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와 노동신문 등 모두가 정부와 당의 기관지뿐, 조보(朝報)만 발간되던 봉건시대에의 복귀랄까. 하여튼 무어라 표현해서 좋을지 모를 정도의 철저한 언론통제다. 대한민국 시절에 지저분한 신문을 자꾸 내어서 귀한 종이만 없애고 간상(奸商)과 정상배(政商輩)의 협잡할 무대를 제공하는 것 같아서 몹시도 언짢게 여기었더니, 이렇게 되고 보니 무능지(無能紙)의 난립이던 그 시절이 되레 그립다.

신문의 내용에 이르러선 더욱 심한 것이, 한 말로 표현한다면 지면이 아무리 커도 일종의 선전삐라에 지나지 않는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관보(官報)를 겸한 정부의 선전삐라랄까?”(김성칠 지음·정병준 해제, 앞의 책, 198~199쪽)

인공 치하의 방송 또한 문제 투성이였다. 힘차기는 해도 같은 내용을 날마다 되풀이하여 듣는 사람을 질색하게 만들었다. 김성칠 교수는 인공 치하의 방송에 대해 “날마다 이야기하는 사람의 이름은 바뀌지만 그 내용은 어찌나 그리 판에 박은 듯 같은지 두 번 듣고 나면 세 번째는 신물이 날 지경”이라고 토로한다.

“좀 더 머리를 쓰면 한 사람이 만드는 원고라도 그 내용에 있어 다소 다른 흥취를 가미할 수 있으련만” 하고 생각했던 김성칠 교수는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방송이 그 따위 저질이 된 것은 “원고를 쓰는 자의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김성칠 지음·정병준 해제, 앞의 책, 209쪽).

8월 23일, 불문학을 하는 손 선생이 김성칠 교수를 찾아왔다. 손 선생은 그 동안 양식을 구하기 위해 이천·여주 등지를 헤매다 팔뚝에 폭격 파편을 맞아 붕대를 감고, 발은 퉁퉁 부르튼 패잔병 몰골로 동료 학자 김성칠을 찾아온 것이다. 불문학자 손 선생은 광주 어느 산골에서 만난 피난민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을 김성칠 교수에게 실감나게 설명한다.

“광주 어느 산골길에서 피란민들이 모여서 애국가를 불렀다거든요. 아니 그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하는 것 말고 ‘동해물과 백두산’을 말요. 그럴 수가 있느냐구요. 있다마다 뿐입니까. 백성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이 오늘날과 같이 불타오른 건 일찍 없었을 것입니다. 인민공화국 백성이 되어보고 모두들 대한민국을 뼈저리게 그리워 하거든요.…”(김성칠 지음·정병준 해제, 앞의 책, 190쪽).

미군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인민군 잔당을 소탕한 후인 10월 6일 김성칠 교수는 대문 앞에 태극기를 내걸었다. 석 달 동안 낯선 인공기가 펄럭이던 바로 그 깃대에 다시 태극기를 달면서 김성칠 교수는 “저으기 마음이 후련해짐을 느꼈으나 해바라기인양 이 깃발 저 깃발을 갈아꽂는 내 골골이 몹시 서글펐다”는 감상을 일기에 남겼다.

자유는 빼앗겨 봐야 그 소중함을 안다

불문학도 손 선생, 자칭 회색분자로서 “대한민국에 그다지 충성을 바치지 않았고, 그 결과 언제든 한번은 인민공화국 백성이 되지 않을 수 없는 날이 오려니 하고 예견했던” 서울대 사학과의 김성칠 교수는 적 치하를 경험하며 개인의 자유를 빼앗기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대한민국과 그 체제가 제공한 ‘자유’를 갈망하고 그리워한다.

그 전까지는 일제의 입제에 신음하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서자 실망이 커서 이남에 대한 반발심이 이북에 대한 동경으로 변했다. 이북의 활발한 선전공작이 주효하여 지식인, 학자, 언론인의 정신이 불그레해졌다. 그들은 불그레해진 정신으로 신생 국가로서 모든 것이 미흡하고 부족하고 허점투성이였던 대한민국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알고 보니 그 미흡하고 부족하고 허점투성이 대한민국이 인간의 기본적 ‘자유’를 제공한 고마운 존재였음을 인공 치하를 경험하며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이 제공하는 ‘자유’는 그저 물과 공기, 산소 이런 것처럼 날 때부터 거저 얻은 것이라 믿고 있다. 때로는 그 자유가 지나쳐 자유민주 체제와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자유의 소중함을 아무리 목이 쉬어라 설명해도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빼앗겨 봐야 그 절실함을 이해하는 것이 인간이란 짐승들의 심리구조인가 싶어 세상이 허허롭다. 그런 수준의 인간들이라면 축생이나 견생보다 나을 것이 무엇인가….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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