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희 칼럼] ‘김원봉’ 소동 이후, 우파는 외양간을 고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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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7.05 10:18:34
  • 최종수정 2019.07.0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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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로는 승리할 수 없다. 선제 공격만이 우리의 것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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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주 유명한 고전동화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를 해보자. 선녀들 목욕하는 곳에서 옷을 훔쳐 그들 한 명과 결혼하여 살던 나무꾼은 아이 둘을 낳자 방심하여 아내에게 선녀 옷을 내준다. 그러자 선녀는 망설임 없이 아이 둘을 양팔에 하나씩 안고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졸지에 아내와 아이들을 잃은 나무꾼은 자신의 경솔함을 한탄하며 하늘을 우러러봤다. 그때 하늘에서 두레박 하나가 내려왔다. 선녀 아내가 보낸 것이다. 나무꾼은 냉큼 그 두레박을 타고 천상으로 올라가 처자를 상봉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였는지 예전에는 이 대목까지의 이야기가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무꾼과 선녀’의 전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 뒷이야기에는 비극적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처자를 만난 나무꾼은 행복감에 겨워하다가 문득 노모에게 인사도 못하고 온 것이 생각났다. 그는 아내에게 부탁한다.

“여보, 나 지상에 내려가서 어머니를 뵙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소? 작별 인사만 하고 곧장 돌아오리다.”

“아, 그러셔야죠. 제가 천마를 빌려드릴 테니 그걸 타고 다녀오세요. 다만 절대 천마에서 내리면 안 됩니다.”

천마를 타고 어머니 집에 내려온 나무꾼은 노모에게 자신의 상황을 얘기하고 말 위에서 작별을 고했다. 아들이 더 좋은 세상으로 간다는데 그까짓 거 문제 삼을 어머니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 어서 올라가라. 그런데 섭섭하니 팥죽 한 그릇 먹고 가렴. 방금 막 쑤었으니 맛있을 게다.”

나무꾼은 말 위에서 팥죽 그릇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첫 숟가락을 입에 넣은 나무꾼은 너무 뜨거워 그릇을 놓치고 말았다. 뜨거운 팥죽을 천마 등에 쏟았고 놀란 천마는 나무꾼을 떨군 채 천상으로 올라가버렸다.

이게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의 끝이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지은 작가가 전하고 싶은 교훈은 이 뒷이야기에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 이상은 얻을 수 없다는 것, 신분이 엄존했던 전근대 사회의 지엄(?)한 교훈이었던 것이다.

‘나무꾼과 선녀’ 외에도 앞 이야기는 유명한데 진짜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는 뒷이야기는 잘 안 알려진 경우가 많다. 그 중 하나가 일제 시대의 독립군의 이야기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정차하는 러시아 스바보드니 역

2.

독립군 이야기는 동화나 소설이 아닌 실화이다. 그래서 진짜 피가 튀고 진짜 죽음이 있으며 그 희생자의 후손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진행형의 이야기이다. 그러니 뒷이야기와 그 교훈은 놓쳐서는 절대 안 되는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독립군의 이야기는 청산리 대첩, 봉오동 대첩까지이다. 그리고 그 대첩의 주역인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의 이름 정도이다. 그런데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큰 승리를 거둔 독립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전쟁들을 승리로 이끈 김좌진 ‧ 홍범도 장군은 그 뒤에 무슨 일을 했을까? 그 뒷이야기의 중심에 ‘자유시 참변’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있다.

예전 내가 배우던 역사 교과서에는 청산리 ‧ 봉오동 대첩 이후 ‘자유시 참변’이라는 사건이 뜬금없이 등장한다. 그냥 1921년에 그런 사건이 있었다고만 쓰여 있었을 뿐이지 ‘자유시’가 어디이고 ‘참변’의 전모가 무엇인지, 또 그 사건이 우리 독립군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그 머나먼 러시아 땅 ‘자유시’에서 일어난 참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독립군이 사실상 궤멸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저 제목만 알고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자유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횡단열차로 25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현재의 러시아 지명은 스바보드니(Svobodny)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흔히 ‘자유시’라고 불린다.

자유시 참변 당시 총격이 시작된 급수탑 주변

참변이 일어난 날짜는 1921년 6월 28일이다. 바로 전 해인 1920년은 봉오동 ‧ 청산리 대첩이 있었던 해이다. 봉오동 전투에서의 크게 패한 일본군은 그 보복을 하기 위해 간도를 침략했다. 이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그 수습을 빌미로 간도에 군대를 투입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은 청산리에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독립군에 다시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후 그들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보복 학살과 독립군 토벌 작전을 펼쳤다.

당시 소련에는 혁명 이후 내전을 치르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적군(赤軍)과 혁명을 반대하는 백군(白軍)과의 치열한 전쟁이었다. 처음 일본은 백군 편을 들었다. 백군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시베리아에 군대를 보낼 수 있었다. 그 병력으로 러시아 내 한인 거주 지역을 습격한 것이다.

일본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잠시 몸을 사려야 했던 우리 독립군은, 분산되어 있던 여러 조직을 모아 전열을 정비하였다. 김좌진과 서일의 북로군정서, 이청천의 대한독립단,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10개 부대를 모아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했다. 3천5백 명 정도의 병력이 중국 헤이룽장 성 미산[密山]에 집결했다. 이들은 무기를 포함한 군수 물자가 변변찮을 수밖에 없었다. 남의 땅에서 군대 조직을 꾸려가려니 오죽했을까? 당연히 다른 나라의 군사 지원에 의지하게 되었다.

그 무렵 우리 독립군은 적군 편에 섰다. 적(敵)의 적(敵)은 우리 편이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적군은 약소 민족의 독립을 돕겠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내세우고 있었다. 대한독립군단은 소련 적군(공산군) 정부의 도움으로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소련 적군을 아군으로 믿고 있던 대한독립군단에게 자유시로 집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대한독립군단은 우수리 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의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에 이르렀다.

제야 강. 총격을 피해 이곳까지 달려온 많은 독립군이 강물로 뛰어들어 익사하였다.
제야 강. 총격을 피해 이곳까지 달려온 많은 독립군이 강물로 뛰어들어 익사하였다.

김좌진은 당초부터 소련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공산주의자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한반도와 너무 멀어지면 독립군으로서 활동하기 어려워질 것도 우려했다. 그는 이만에서 군사를 돌려 중국 미산으로 돌아왔다.

김좌진 부대를 제외한 나머지 독립군은 1921년 6월 자유시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사이 일본은 적군과 손을 잡고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적군은 일본으로부터 오오츠크 해 어업권을 받고 독립군을 배신했다고도 한다. 소련은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에 집결한 우리 독립군에게 무장 해제의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저항하는 독립군을 학살하였다.

학살이 시작된 자유시의 작은 역에 가면 아직도 그날의 참상을 지켜본 급수탑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 급수탑 근처에 집결해 있던 우리 독립군에게 총격이 시작되었다. 아비규환이 되는 것은 순간이었다. 일부는 현장에서 사망하고 일부는 총격을 피해 무작정 달렸다. 지리도 알 수 없는 낯선 마을이었다. 달리다보니 강이 앞을 가로막았다. 중국의 헤이룽[黑龍] 강과 이어지는 제야(Zeya) 강이었다. 총탄을 피하려면 강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날 총에 맞아 혹은 강물에 빠져 사망했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은 5백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자유시에 집결한 병력이 1천여 명, 살아남은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이르쿠츠크 등으로 끌려가 공산 치하 소련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그 중 극장 경비원으로 살다가 카자흐스탄 크슬오르다에서 숨진 봉오동 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도 포함되어 있다.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우리 독립군은 그렇게 궤멸되고 말았다.

자유시 참변 사건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다. 일본과 소련 공산당과의 결탁, 독립군 세력이던 고려공산당의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 사이의 정치적 투쟁 등, 그 복잡한 배경들 자체가 이 사건을 희석해버릴 정도이다. 심지어 현재 자유시에 서 있는 ‘자유시 사건 독립군 순절지’ 비석에는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도록”이라고도 쓰여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데 ‘우리끼리’라니, 마치 북한의 남침이 분명한데 6.25는 쌍방 과실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이다. 그러나 우리 독립군을 궤멸시킨 이 사건을 정리하면 정말 한 마디로 단순해진다.

“우리 독립군이 공산당에게 배신당하고 학살당한 사건이다.”

-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도록”이라고도 쓰여 있는 ‘자유시 사건 독립군 순절지’ 비석

3.

중국으로 돌아온 후 이 참람한 소식을 접한 김좌진은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흩어진 동지들을 다시 모아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었다. 또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정예 간부를 키우는 데도 힘썼다. 그 무렵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독립군을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29년 신민부의 후신으로 한국총연합회(韓國總聯合會)가 결성되었고 김좌진은 주석이 되었다. 그런데 1930년 1월 ‘공산주의자 박상실’의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길고 먼 길을 돌아 드디어 이 글의 본론을 쓸 배경이 마련되었다. 공산주의자를 믿지 못해 자유시로 가지 않고 휘하 부대의 궤멸을 피했던 김좌진은 공산주의자들의 확실한 적이 되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 박상실’이 그를 암살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한 1년 전부터 박상실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혹은 드라마가 제작된다는 소문이 솔솔 들려오고 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모골이 송연해진다. 만일 잘 생기고 멋진 배우가 박상실 역을 맡아 감성적인 메시지로 김좌진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면 우리는 청산리 대첩의 주인공 김좌진 장군이라는 소중한 인물을 잃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일생을 오직 항일 독립에 바쳤던 김좌진 장군, 확실한 반공주의자 김좌진 장군이 ‘왠지 살해당해 마땅한’ 인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난 후에는 돌이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조승우가, 혹은 이병헌과 유지태가 김원봉 역을 맡았던 ‘암살’, ‘밀정’, ‘이몽’ 등의 영화 혹은 드라마가 최근 우리 사회를 얼마나 휘저어놓았는지를 생각하면 그 여파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김원봉 소동’ 후 우파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가? 싸우면 저들을 막을 수 있다는 교훈? 그런 수세적 자세 가지고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소는 잃었지만 외양간을 고칠 대책은 마련이 되었는가?

우파가 선택할 길은 하나뿐이다. 저들이 박상실을 미화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기 전에, 그래서 김좌진을 구렁텅이에 빠트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청산리의 영웅 김좌진을 구해야 한다. 방어로는 승리할 수 없다. 선제 공격만이 우리의 것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글 황인희 / 사진 윤상구)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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