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샘의 교실 이야기]④脫빈곤·克日의 아이콘, 박정희를 만나다
[유니샘의 교실 이야기]④脫빈곤·克日의 아이콘, 박정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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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교사가 체험한 박정희 아카데미 5박 6일
독재자·친재벌·친일 지도자?…배워보니 '아니다'
'빌어먹던 나라’를 ‘벌어먹는 나라’로 만든 지도자
조윤희 부산 금성고 교사
조윤희 부산 금성고 교사

이승만이 그렇듯 박정희 역시 역사에서 가장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엇갈리는 평가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방학 중 의미 있는 자기연찬을 해보려고 찾은 공부가 ‘박정희 바로알기’였다.
 
●독재자? 그렇게만 볼 수 없다

 박정희를 독재자로 부르기 전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은 당시의 ‘역사적 맥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의 중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자면 이런 것이었다.

“공도 있고 과도 있다는 식의 평가는 사실 쓸모없는 평가다. 어떤 역사적 인물인들 그렇지 않겠는가. 그것은 ‘모든’인간의 공통된 보편일 뿐이다.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준거는 ‘역사적 맥락’이어야 한다. 공과를 모두 따지자는 평면적 논쟁이 아니라 어떤 역사적 과제가 있었으며 그 과제를 두고 ‘어떤 역할’을 했느냐는 것이다.” 

요즘 시쳇말로 ‘사이다’같은 발언이었다. 정작 부정선거를 청산하고 치러낸 4.19 혁명이 부정 대신 ‘시민정의’를 깃발로 들었다면 민주시민 사회, 자유민주가 그 목표이어야 하지 어떻게 ‘민족’통일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민족통일연맹(민통련)의 출범과 더불어 식민지, 反식민지의 민족해방 투쟁으로 이어진 학생운동의 지향점은 놀랍게도 ‘북한 주도의 통일’ 시도였다. 6.3사태, 동백림사건, 민비연 사건 등이 그것을 뒷받침 했으니 그 이후 이어진 닉슨 독트린에 이르기까지 당시 북한 김일성의 그러한 기도를 무산시키기위해선 ‘박정희의 5,16’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당시의 위급했던 상황, 긴박하게 돌아가던 상황 속에 이루어진 선택을 지금의 잣대로 보아 ‘과’로 낙인찍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재벌만 챙겼다? 결단코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정희는 경쟁원리를 가장 잘 알았던 시장주의자였다. 박정희의 ‘창조경제’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19601990).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산업구조를 바꾸었으며, 농업은 40%에서 10%로 바뀌었고, 제조업은15%에서 28%로, 중화학공업은 30%에서 70%로, 1인당 GDP는 지금 무려 80배로 성장시켰다.

그의 패러다임은 ‘기업부국’의 패러다임으로, 중소기업을 육성시켜 성공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그 결과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지금 굴지의 대기업인 기업들이 그 당시엔 작은 중소기업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삼성상회는 삼성그룹으로, 현대자동차수리소는 현대그룹, 럭키 치약은 LG그룹, 500만원 오퍼상은 대우그룹, 선경직물은 SK그룹, 한진 상사는 대한항공그룹, 박승직 상점(1896)과 두산 상회(1951)는 두산 그룹으로. 처음부터 대기업은 없었다. 중소기업을 키워서 대기업을 ‘만든’ 것이었다. 

‘불균형과 차별을 가져왔다’는 것도 시장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지도자의 탁월한 진면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정희는 시장의 경쟁원리를 가장 잘 알았던 지도자로서 정치의 민주화와 경제의 민주화를 분리 할 줄 알았다. 새마을 운동의 지원에서도 성과목표를 가장 먼저 많이 달성한 마을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례에서만 보아도 경쟁과 자유를 존중한 면면이 드러난다. 치열한 경쟁에는 ‘자유’가 관건이다. 박정희는 경제적인 자유를 보장해 성과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서 경제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도리어 정치에는 강력한 ‘억제’의 드라이브를 걸어야 했다. 지금 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민주화’만이 시대의 요구라 생각한다. 그러나 민주화의 대상은 정치일 뿐, 시장이나 경제가 민주화의 대상일리 없다. 박정희에 대한 오해는 정치를 민주화하듯 경제도 민주화해야 한다는 착각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한다. 박정희는 불평등이 발생하면 그것을 줄여가고 지원해가는 쪽으로 문제를 해결해야지 불평등을 안 생기게 하겠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親日? 아니다, 克日을 넘어 用日이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문경보통학교에서 3년 간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39년 만주로 가서 1940년 4월 신경 육군군관학교 입학, 1942년 3월 졸업과 동시에 일본 육사 편입, 1944년 일본 육사 졸업한 후 만주 관동군 635부대에서 견습 사관도 경험했다. 군관학교에 왜 왔느냐는 질문에, “왜놈 보기 싫어 왔소.”라고 답했다는 박정희. 그렇게 말하는 박정희에게 일본은 당시의 선진문물을 배울 수 있었던 창구로서, 보기 싫었지만 넘어야만 했던 산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당시 만주의 관동군 홍사익이란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배워라.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이 모든 것을 모조리 먹어치워라.” 박정희는 이러한 가르침대로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던 나라를 배우고 익혀 끝내는 넘어서려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두고 단지 외형만으로 판단하여 비난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일본을 상대로 한일협정을 체결한 경과만 보아도 그러하다. 1965년 당시 박정희는 국민 다수가 함몰되었던 반일 정서를 돌파해 전향적인 한일관계를 만들어냈고, 회담을 타결시켰다. 청구권 협정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일본 정부예산의 총 금액 대비 만만치 않은 약 8억 달러의 자금을 일본으로부터 받았다. 이것이 우리 경제발전의 종자돈 역할을 할 수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금하려고 해도 쉽지 않았을 한일관계를 궤도에 올려놓은 지도자를 들어 친일로 몰아가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이다. 일본을 ‘이용’하고자 했던 ‘用日 지도자’라면 모를까 말이다.
 
●‘빌어먹던 나라’를 ‘벌어먹는 나라’로 만든 지도자 박정희 

나라를 잃고 만주로 건너간 한국의 두 젊은 청년이 있었다. 한쪽은 중국공산당의 일원이 되어 일본· 만주국을 타도하기 위해, 다른 한 쪽은 일본·만주국의 일원이 되어 중국공산당을 섬멸하기 위해 서로 총부리를 들이대고 싸웠다.

위성사진으로 보는 남북한 야경
위성사진으로 보는 남북한 야경

그 결과 한 쪽은 나라를 부국으로 이끄는 초석이 되었고, 한 쪽은 민주주의지수(Democracy Index) 167개국 중 167위, 언론자유도(Freedomof the Press) 195개국 중 195위, 정치권리 및 시민자유도(PoliticalRight-Civil Liberty) 193개국 중 최악국가 8개국으로, 실패국가지수(The Failed States Index) 177개국 중 15위, 세계최악의 지도자 177개국 중 2위로 만드는 기염을 토했다.

한 사람은 박정희이고 다른 한 사람은 김일성이다.

‘flightradar 24’로 확인한 신시간 현황.
‘flightradar 24’로 확인한 신시간 현황.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갈리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사진을 두 개 제시 하고자 한다. 하나는 야간의 한반도 위성사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실시간으로 한반도에서 이착륙하는 항공기 대수를 비교한 그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의 공항을 뜨고 내리는 비행기대수를 보자(우리나라 항공기와 코드를 쉐어하는 비행기노선을 포함한다). 북한은 지금 이 시각, 한 대도 없다.

박정희. 그는 먹을 것이 없어 정말 굶어 죽는 사람이 있던 시절을 벗어나게 한 지도자였다. ‘빌어먹을’ 수밖에 없었던 국민을 이렇게 이끌어 이젠 정말 ‘벌어먹고’ 살게 했고, 도와주며 살게 만든 지도자였다.

오늘날의 북한을 있게 한 것이 누구인가. 그리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것은 또 누구인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고 한다. ‘박정희의 성공신화’ 역시 우리가 잊지말아야할 우리의 역사일 뿐이다.

조윤희(부산 금성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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