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당독재, 아니 대통령독재 체제 완성하는데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집권여당
文대통령과 이념 같은 사람으로의 권력집중은 한국 역사상 유례없는 정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절차의 공정성과 투명성이 결과의 형평성 만큼 중요
국회가 앞장서 삼권분립 원칙을 무너뜨리는데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누가 막나
대통령의 눈치를 지나치게 살피기 때문에 檢·警·法 기능 제대로 발휘 못하는 것
삼권분립의 종식은 공포정치의 시발점이라는 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무서운 교훈

이인호 객원 칼럼니스트
이인호 객원 칼럼니스트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법안을 비롯한 3개 법안의 “패스트 트랙”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적 난투극을 바라보며 문득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 제목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떠올랐다.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민주주의”라는 말을 주술처럼 외우며 살았고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을 포기하다시피 하며 민주화 운동에 몸과 마음을 바치고 때로는 목숨까지 잃었는가? 그런데 70년 넘게 그처럼 피땀 흘려 쌓아온 민주주의의 공든 탑이 하루 아침에 와르르 무너지는 상황이 정작 코앞에 닥치니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종언을 예고하는 일임을 감지할 줄 아는 사람은 국민 가운데 극히 일부 밖에 되지 않는 듯 하다. 민주주의의 숨통이 완전히 막히기 전에 그런 상황을 뒤늦게 나마 몸으로라도 막아보려는 제1야당의 몸부림을 열세에 몰린 야당이 의례껏 하는 의정파괴 행위 쯤으로 태연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으니 민주주의에 대한 그러한 무지와 무감각에 더욱 더 자신감을 얻은 여당은 자기 당 내부의 반발까지 불법으로 밀어버리며 일당독재 체제, 아니 대통령독재 체제를 완성시켜가는데 한치의 주저함도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남용”을 성토하며 탄핵이라는 극약 처방을 이끌어 냈던 그 많던 민주화 투사들은 다 어디 갔을까? 그 촛불 혁명의 냄새에 취하고 민주화 보상금으로 배가 불러 달콤한 잠에 빠져들며 민주주의 따위 같은 골치 아픈 일에는 관심이 없어진 것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그들이 말하던 민주주의란 “권력은 네가 아니라 내가 쥐어야 한다”는 계산된 정치 쇼에 불과했던 것인가? 민주주의 제도와 절차가 파괴되건 말건 의석 몇 개라도 건지겠다고 거대여당에 빌 붙는 보수 진보 가릴 것 없는 군소 야당들의 추잡한 모습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앞날에 대해 절망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이 권력의 분립과 상호견제 구도에 있다는데 이의를 제기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권력은 원래 사람을 부패시키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권력이 집중 될수록 부패의 가능성은 그 만큼 더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것이다. 그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으로 탄생한 이래 지금까지 사투(死鬪)를 벌려온 것이다. 약자는 강자의 먹이가 되거나 그 눈치를 살피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은 동물 세계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간이 인격체로서 최소한의 자유와 존엄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쓰라린 경험을 거치며 어렵게 마련한 것이 폭 넓은 합의를 통해 운명되는 “법치”라는 장치이고 “법 앞의 평등”이라는 개념이다. 그것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경제적으로 평등하게 살도록 보장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지유롭게 자신의 역량을 펴 나갈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지며 법의 심판의 잣대가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투명하게 적용된다는 이야기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말로는 항상 강조하듯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절차의 공정성과 투명성이 결과의 형평성 만큼 중요한 것이다. 좀 더 알아듣기 쉬운 말로 표현한다면 서로 경우를 지키며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보아도 큰 불만이 없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정의가 달성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민주적 정치체제는 권력의 편중을 허용하는 다른 어떤 정치제도보다도 우월하다고 평가 받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이래 지금까지, 아니 박근혜대통령 탄핵 운동 시작에서 지금까지 보여온 행태는 어떠했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반역이나 내란죄로 탄핵 된 것이 아니었다. 많은 국민을 분노시킨 것은 대통령이 권한을 “제왕적으로” 남용했다는 의혹이었고 한때 한국 국민은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의지가 어느 누구보다도 투철하다고 세계 언론의 칭송의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불과 2년이 지난 지금도 그럴까? 문재인 대통령과 이념을 같이 하는 사람들 손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은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정도인 것을 이제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한때는 공직자의 인사에서 혈연, 지연, 학연이 작용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는데 이제는 이념이 같은 사람들 끼지 이른바 “코드” 인사를 하는 것은 당연시 하는 이상한 반민주적 사회분열적 풍토가 조성되었다. 그 뿐 아니라 “친문”이니 “우리법 연구회 회원”이니 하는, 현재 권력 기구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관이나 헌법에 대한 해석은 일제 식민지 지배와 해방, 분단, 6.25 전쟁을 겪으며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국가로 독립시키고 발전시켜온 앞선 세대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 뿐이 아니다. 야당 시절, 아니 정권출범 이후로도 문재인 대통령 자신이 크게 강조했던 인사발탁 원칙이 있었지만 그 원칙들에 전면적으로 위배되기 때문에 국회가 동의를 거부해도 그것을 무시하고 국무위원들을 임명하는 사례가 빈번하며 심지어는 헌법재판관의 임명까지도 국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하는 고압적 자세를 견지한다. 대통령에게 허용되는 권한은 한치의 도덕적 주저함도 없이 최대치로 가동시키는 것이 지금까지 일관되게 보여온 문대통령의 대권행사 스타일이다. 그런데 그런 대통령에게 이제는 고위공직자 비리를 다스린다는 명분아래 겸찰과 법원까지 통제 할 수 있는 권리까지 “공수처법”이라는 이름으로 국회가 선물을 한다는 것이다.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 원칙을 무너뜨리는데 국민의 대의기구인 국회가 앞장을 서는 모양새니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고위공직자들의 도덕적 기강이 해이해지고 검찰과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데 대해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는데 동의하지 않을 국민은 별로 없다. 문재인 이전의 정권하에서도 여야 모두가 고위공직자들의 비리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특별기구가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법 위에 법을 만들고 기구 위에 또 특별기구를 설치하며 정부기구를 누더기처럼 만들어 모 법의 취지를 희석시키고 비용은 늘지만 효능은 그렇지 못하게 만드는 폐단은 불행히도 오랜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비리를 다스릴 수 있는 법이 없어서 공직자들의 비리가 만연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현재 있는 법 만으로도 최근에 임명된 이미선 헌법재판관 내외는 이 나라 법치의 최고 권위인 헌법재판관에 임명되지 못함은 물론 공직수행과정에서 이해상충기피 규정을 위반한 혐의로 처벌 받았어야 할 것이다. 그 밖에도 문재인 대통령 치하에서는 현행법을 여러 차례 위반한 것이 분명한데도 장관으로 또는 다른 공직에 임명되는 된 사례는 너무도 많고 오히려 후보를 자진 사퇴한 사람들이 능력이나 도덕적 자질 면에서 임명이 강행된 경우보다 나은 사람들이었다는 평이 나온다. 결국 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검경이나 법관들이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도록 압력을 받기 때문에 법을 제대로 집행할 수 없고 일반국민이나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법 집행의 형평성에 대한 도덕적 인식이 부족하고 정치적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공직자 근절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공수처의 설치로 공직사회의 비리가 근절 될 수 있다는 것인가? 더구나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친인척의 비리는 다스리지도 못하도록 법안의 이가 빠져버린 상태에서.

검찰이나 경찰, 법원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을 다스릴 수 있는 대통령의 권한이 너무 약해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눈치를 지나치게 살피기 때문이라는 것은 대한민국의 삼척동자도 다 알만한 사실이다. 그런데 검경과 재판부에 대한 감시권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공수처장에 맡기고 검찰 대비 경찰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킨다고? 검경에 대한 임명권에 더해 검찰과 사법부에 대한 감시권까지 대통령 직속기관에 맡긴다니 독재적 경찰국가의 설계로서 더 이상 완벽한 것이 없다. 대통령은 어떤 인간적 유혹이나 약점에서도 자유로운 전지전능, 무결함의 존재란 말인가?

집권 여당은 앞으로 20년이 아니라 50년 집권을 꿈꾼다고 대표의 입을 통해서까지 공공연하게 밝히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문재인 정권이 출범이래 추구해 온 것은 일당독재 체제의 구축 이상 이하도 아니다. 국가는 국민전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집권세력이 자기들의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는데 이용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잘못된 계급투쟁 이념을 젊어서부터 주입 받아온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이상한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때는 민주화 투사로서 이름을 날렸던 현재의 국회의장이나 군소 야당 대표들까지도 대통령 독재체제의 위험을 감지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관련 법과 공수처 설치법, 검경 수사권 조정안등은 그 하나 하나가 국가의 골간을 좌우할 수 있는 사안으로서 서로 묶 일 수 있는 것도, 이른바 “패스트 트랙”으로, 자기당 내의 반대를 억지로 누르고 제일 야당과의 물리적 대치를 불사하면서 까지 처리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의 발췌개헌이나 사사오입개헌을 독재의 증거라고 몰아부쳐온 과거의 민주화 투사들이 할 일은 더욱 더 아니다. 대통령 권력강화에 대한 양보가 군소야당으로서 몇 개의 의석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면 군소야당 대표들은 그렇게 구걸하다시피 해서 얻는 의석이 과연 지켜질 수 있고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1933년 나찌 독일에서 히틀러가 어떻게 권력을 장악했고 소비에트식 민주주의를 내세운 레닌의 10월 혁명은 어떻게 공산당 일당독재와 스탈린의 개인숭배로 전락했으며 두 세력은 모두 초년의 혁명 동조세력들을 제거하는데 어떤 신속함과 무자비함을 보였는가를 조금이라도 알고 생각해 본다면 지금 공수처법 제정에 동조하고 있는 자기들은 이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에 종지부를 찍는 일에 동참하면서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문재인의 하수인쯤으로 매도당하기도 하는 김명수 대법원장 마저도 공수처 신설은 삼권분립을 위협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모처럼 옳은 말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삼권분립의 종식은 공포정치의 시발점이라는 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무서운 교훈이다.

이인호 객원 칼럼니스트(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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