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 칼럼] 흘러간 서부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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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4.01 09:25:37
  • 최종수정 2019.04.0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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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사랑하는 내 가족, 내 이웃의 생명과 재산은 내가 지킨다! 그러기 위해서는 총이 필요하다. 죽음을 겁내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비겁자다. 평화는 훌륭한 언변이나 논설이 아니라 무장을 통해 지켜지는 것이다.

 

어제 밤, 잠이 오지 않아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흘러간 서부 영화와 마주쳤다. 제목도, 주인공도 기억나지 않는 낯선 영화였다. 주인공이 카페에서 위스키 스트레이트 한 잔 마시던 중, 마을 주민을 괴롭히던 비루한 악당 무리와 시비가 붙는다. 주인공이 쌍권총을 뽑아 악당들을 단숨에 쏴 죽인다.
선인장이 듬성듬성 서 있는 황야로 말을 내달리는 거친 서부의 사나이들…. 자신과 가족과 이웃, 마을을 지키기 위해 일어선 주민들은 스스로 무장하고 악당 무리와 목숨 걸고 싸운다. 보안관이나 순회 판사가 있긴 하지만, 이들은 별로 믿은 게 못된다. 언제 어느 순간에 깡패, 부랑자, 인디언, 악당들이 들이닥쳐 자신과 가족, 이웃의 생명을 앗아갈지 누가 아는가. 내가 총에 맞아 숨이 끊어진 다음 보안관이 나타나 봤자 이미 게임 오버다.
서부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확고하다. 나와 사랑하는 내 가족, 내 이웃의 생명과 재산은 내가 지킨다! 그러기 위해서는 총이 필요하다. 죽음을 겁내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비겁자다. 평화는 훌륭한 언변이나 논설이 아니라 무장을 통해 지켜지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현실주의적 전략론자들은 국제사회란 약육강식, 힘 센 자가 왕 노릇을 하는 정글임을 목이 쉬도록 외쳐 왔다. 정글에서 사자가 배가 고프면 한 끼 식사를 위해 얼룩말이나 가젤, 사슴을 잡아먹는다. 사자 입장에서 볼 때는 훌륭한 한 끼 식사다. 하지만 잡아먹히는 쪽에서 보면 그 즉시 우주의 운행이 멈추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은 자주국방이란 단어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 개념이나 본질조차 망각한지 오래다. 내 나라와 국민의 생명과 안전, 재산은 우리 힘으로 지킨다는 인류 생존의 기본원칙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있다. 핵무장을 하고 여차 하면 적화통일 운운하는 김정은과 남북군사합의서 괴문서에 서명한 나라 아닌가.
스스로 무장해제를 한 다음 “무장 강도와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서” “살인범과 평화적인 대화를 위해서”라고 강변하는 철부지들이 지금 청와대를 접수하고 이 나라를 국가자살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안보를 책임져본 일이 있는가?

조선시대에는 사대의 종주국인 중국이 조선의 안보를 책임져 주었다. 일본 식민지가 된 후에는 당연히 일본이 알아서 지켜주었고, 해방 후에는 미국에 안보를 의탁한 채 무뇌아처럼 행복하게 살아 왔다. 1270년 고려 무신정권이 붕괴한 후 스스로의 힘으로 안보를 책임져본 일이 있기나 했었나? 이 나라 지도자들은 서부 영화도 안 봤나?

문재인 정부는 핵무장을 한 북한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고 무장해제를 시작했다.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서 "스스로 무장해제하고 적에게 백기투항 하는 나라”로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연합뉴스 제공).
문재인 정부는 핵무장을 한 북한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고 무장해제를 시작했다.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서 "스스로 무장해제하고 적에게 백기투항 하는 나라”로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연합뉴스 제공).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을 적나라하게 설파한 인물은 역사학자 S. C. M 페인이었다. 페인은 『중일전쟁 1894~95: 인식(認識), 힘 및 우선순위』(The Sino-Japanese War 1894~95 : Perception, Power, and Primacy)라는 책에서 한반도를 “극동에서 가장 전략적인 위치의 하나”로 꼽았다. 그는 한반도가 지정학적 속성 상 다음과 같은 숙명을 안고 있다고 분석했다.
①한반도는 동아시아의 주요 3국인 중·일·러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들은 저마다 한반도를 자국 안보에 사활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한국은 동아시아 대륙에서 일본을 향해 돌기해 있는 곳이다. 일본 편에서 보면 아시아 대륙으로 군대가 진출하는 가장 편리한 출발점이 된다.
②러시아에게 한반도는 러시아가 갖고 있지 않은 따뜻한 항구들을 보유한 가운데 러시아를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③중국 입장에서 볼 때 황해는 중국 남부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쌀과 중요 물자를 실어 나르는 해상로다. 한반도는 그 황해의 동편을 에워싸고 있다. 어떤 세력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느냐는 중국의 전략적 지형에 커다란 변수가 되었다.
한반도 같은 반도국가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격돌하는 반도국가들은 여차 하면 양대 세력의 타협에 의해 반도 중간부에서 분단되는 경향이 있다. 분단된 반도의 해양세력이 대륙세력의 압력에 맞서 생존하려면 해양세력의 지원을 얻든지, 아니면 스스로의 힘으로 대륙세력에 강렬한 반격을 가할 군비를 보유하든지 둘 중 하나밖에 길이 없다.
한반도와 똑같은 반도 국가였던 로마는 여차하면 해양으로 나가 적을 분쇄했고, 여차하면 대륙으로 뻗어나가 영국, 프랑스, 독일의 절반, 발칸반도와 지중해 연변의 모든 지역을 자신들의 판도로 편입시켰다. 
한국인들의 불행은 로마처럼 무력과 국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외세의 관심이 상상 이상으로 큰 반도에 살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페인은 “외세가 움직일 때마다 한국인들은 황폐화와 슬픔을 겪어야 했다”고 평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대한제국이 국권을 빼앗기는 1905년을 전후한 무렵, 대한제국 군대는 8,000명 수준이었다. 비슷한 시기,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100만 대군이었다. 이토록 참혹했던 군사력이 65만 대군으로 탈바꿈한 것은 김일성의 6·25 남침전쟁 덕분이다.
김일성의 6·25 덕분에 군부가 급팽창했고, 다 죽어가던 박정희를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켰다. 소총 한 자루, 총알 한 발 못 만들던 나라를 미사일과 전투기, 각종 전쟁 물자를 자급자족하는 나라로 탈바꿈시킨 인물이 박정희였다. 

‘박동선 게이트’의 진실

1971년 11월 초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ADD)에 “오늘부터 당장 국산 병기 개발에 착수하되, 우선 금년 내에 1차 시제품을 만들어 오라”고 지시했다. 국산무기 개발에 성공한 박정희는 무기 양산을 위한 중화학공업 건설에 나섰다. 그는 미군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박살내기 위해 대구경 화포의 국산화, 지대지(地對地) 미사일 개발, 해군 함정과 항공기·국산 전차 개발, 그리고 핵폭탄 개발에 착수했다.
박정희의 자주국방 프로젝트 추진에 대해 조영길 전 국방부장관은 “그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박 대통령의 거대하고 야심찬 국가 동원령”이라고 평했다.
번갯불에 콩 튀겨먹듯 시동이 걸린 자주국방사업은 1977년 상반기까지 지상군 기본 병기인 105·155㎜ 곡사포, 20㎜ 대공 발칸포, 60·81㎜·4.2인치 박격포, 3.5인치 로켓포, M79 유탄발사기, 90·106㎜ 무반동총 등 각종 화기와 500MD 헬리콥터, 산악전용 경장갑차, 월남전에서 위력을 발휘한 스마트탄 등 각종 실탄과 포탄류 양산체제를 갖추었다. 1978년 4월에는 전차 국산화에 성공하여 양산에 들어갔고, 9월에는 한국형 지대지 유도탄 ‘백곰’을 개발하여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무기의 성능도 해외시장에서 호평을 받자 박정희 대통령은 방산물자 수출을 적극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이익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불법로비 사건’ 혹은 ‘코리아 게이트’로 명명된 박동선 사건은 사업가 박동선을 앞세워 미국 의회 의원들과 정부 관리들을 현금이나 선물 혹은 정치자금을 제공하여 매수한 행위로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박동선에 대한 미국 의회와 정부, 언론의 공격은 전형적인 ‘한국 패주기’였다. 박동선이 미국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진짜 이유는 그가 의회 의원과 정부 관리들에게 로비를 한 때문이라기보다는, 국산 무기 수출을 위해 국제 무기상과 접촉하고 해외에 한국산 군수품 판매점 설치를 추진하려 했기 때문이다.
1977년 5월 12일, 박동선은 미국의 유명한 국제 무기회사 인터암스의 사장 새뮤얼 커밍스를 만났다. 이날 박동선은 커밍스 사장에게 한국산 무기의 해외 판매 문제를 협의했다. 인터암스는 그로부터 5개월 후 박동선의 다른 부하 직원인 로버트 콩클링으로부터 무기생산 합작투자를 알선해 달라는 편지를 받았다.
콩클링은 박동선이 박 대통령 및 한국의 방산업체들과 일할 수 있는 관계를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1978년 6월 16일, 콩클링은 커밍스 사장에게 좀 더 진전된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한국이나 제3국에 무기 공장을 합작 투자하여 그 생산품을 수출하자는 것이었다(김재홍, 『軍-핵개발 극비작전(2)』, 동아일보사, 1994, 106~108쪽 참조).
문제는 한국에서 생산되는 무기들은 거의 모두 미국 특허기술을 도입한 것들이라는 점이었다. 특허 계약에 의하면 특허권 사용료만 지불하면 생산품은 자유의사대로 판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미국은 방위산업 기술이 적성국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제3국 수출의 경우 미국 측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도록 하는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했다.
1977년 초 한국은 아프리카에 M16 소총 판매를 위해 미국의 동의를 요청했으나 미국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얼마 후 한국이 리비아에 M16을 비밀 판매한 사실이 미국 정보망에 포착됐다.

김영삼·김재규는 무슨 짓을 했는가?

미국의 월스트리스 저널은 1978년 1월 6일, 한국이 버마(미얀마), 에티오피아, 방글라데시, 남예멘, 남아프리카,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등에 군수품을 팔아왔다는 내용을 보도했다(김재홍, 『軍-핵개발 극비작전(2)』, 동아일보사, 1994, 73쪽). 3월 16일 미 국무부는 주한 미국대사관으로부터 한국 정부가 말레이시아에 M203 유탄발사기 대여를 요구한다는 전문을 받았다. 미 국무부는 4월 29일 이를 거절하는 전문을 보냈으나 한국은 답전을 받기 전인 4월 15일, 말레이시아에 이 무기를 이미 보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의 군수회사들은 충격을 받았으며, 소식을 접한 미국의 의원들이 한국 정부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미국의 방산기술을 이용하여 제조된 값싸고 우수한 소총과 박격포, 야포 등 무기들이 대량생산되어 제3국에 판매될 경우 미국 무기회사들의 이익이 침해될 우려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박동선 사건의 본질이다.
1979년 1월 3일 박정희는 부산에서 신년 구상을 하던 중 청와대 공보비서관으로 근무하다가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나간 선우연(선우휘 조선일보 주필의 동생)을 급히 불렀다. 부산으로 달려온 선우연에게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1981년 전반기에 핵폭탄이 완성된다고 국방과학연구소장에게 보고를 받았어. 핵폭탄이 생기면 김일성이도 감히 남침을 못할 거 아닌가. 북괴가 남침하더라도 우리가 핵을 던지면 북한도 날아갈 것 아닌가. 쳐내려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 1981년까지 완성이 되면 그해 국군의 날 여의도 행사를 부활시켜서 사열할 때 원자탄을 세계에 공개하겠어.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퇴 성명을 내고 물러나겠다.”
한국은 1979년 농축과 재처리 부분을 제외한 원자력 산업의 기술적 자립을 이루었다. 같은 해 10월 핵폭탄 원료인 플루토늄 추출을 위한 재처리 설비 설계가 완료됐다. 이 와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1981~82년 무렵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공개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은밀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인 1979년 9월 10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희 정권 타도”를 선언했다. 그는 “국민들이 총궐기하여 항쟁하지 못하면 우리 모두 역사의 죄인이 된다”고 외쳤다. 6일 후인 9월 16일, 김영삼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카터 미 행정부에 “소수독재 일삼는 박정희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그는 카터 대통령에게 “미국은 민들로부터 점점 소외되고 있는 독재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 다수 중에 선택을 할 시기가 왔다”고 발언했다.
이 내용을 문제 삼아 여당 의원들이 10월 4일 국회에서 김영삼 의원을 제명하자 미 국무성은 항의 차원에서 다음날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를 본국 소환했다. 부산과 마산에서는 김영삼의 제명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1979년 10월 26일 밤 김재규는 박정희를 쏘았다.
박정희는 서거하기 전까지 핵폭탄 개발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구상했던 자주국방의 모든 목표를 다 이루었다. 한민족 국가 출범 수천 년 만에 최초로 “자주국방 좀 해야 되겠다”고 두 팔 걷어 부치고 나선 지도자를 이 나라 사람들이 쏴 죽인 것이다.
만약 그 시절, 김영삼과 김재규가 1981년까지만 인내해 주었다면, 북한 핵에 인질이 된 이 나라의 운명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오래 된 서부영화를 보면서 부질없는 망상을 해 보았다. 이제 대한민국은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서 “스스로 무장해제하고 적에게 백기투항 하는 나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탄을 하면서….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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