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범 칼럼] 핵 시대의 목회자들
[김행범 칼럼] 핵 시대의 목회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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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기독교 지도자들마저 배교자로 만드는 북핵
좌파 기독교 사제들뿐만 아니라 보수교회들마저 북핵 앞에 하나둘 넘어가기 시작
'김정은을 환영하라'며 핵폭풍의 신 바알(Baal)에게 무릎 꿇을 제사장들은 누구인가
김행범 객원 칼럼니스트
김행범 객원 칼럼니스트

이문열이 기독교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겁 없이 쓸 수 있었다고 자평했던 『사람의 아들』은 가진 자로부터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사회주의라는 환상이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큰 미혹임을 보여준다. 한국계 미국작가 리처드 김(김은국)의 소설 『순교자』는 노벨문학상후보로 올랐던 소설이다. 6.25직전 평양, 공산당의 10명의 목사 학살이라는 플롯에서 목회자가 그리스도 복음을 위해 진정 순교한다는 의미를 묻고 있다. 북핵은 이제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문화를 넘어 신앙의 영역에 있는 사람도 굴복시키고 마침내 기독교 지도자들마저 괴이하게 바꾸고 있다. 구약 아가서 기록처럼 ‘죽음도 사랑만큼 강력’하니, 죽음의 위협은 복음만큼이나 힘이 있었다. 목회자들을 배교자로 만들고 파라오의 태양신(Ra)같은 섬광 구름의 핵신(核神) 앞에 무릎 꿇게 하는 듯하다.

우리에겐 적어도 신도 수에서 세계 수준 교회들이 많다. 한 대형 교회 목회자가 재벌이 재산 절반만 내 놔도 국민 복지 수준이 확 달라질 것이라고 한 말이 반추되고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세상 마지막 날 나눠먹을 거라면. 세계 굴지의 대형 교회인 당신의 소속 교회가 자산의 절반만 내 놓으면 이 땅의 가난한 수많은 미자립 교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대답해보자. 큰 교회로서 할 큰 일이 있어 그러지 못한다고? 그렇다면 대기업도 그러하지 않겠는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 던지는 사회주의 함정에 다시 들어 와 있다.

이북에서 공산주의 피해 월남했다는 선대를 두었다며 좌파 혐의에 방패를 치는 목회자들이 실제로는 북핵 앞 굴복의 선두에 선 모습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공산주의를 직접 겪어 얻은 피의 교훈은 오직 본인에게만 유효하며 설령 한 가족 사이에도 자동으로 유전되지는 않는 듯하다. 과거 6.25 이전에 월남한 사람의 후손들과 지금 북한에서 탈북한 사람들의 친북 정도가 크게 차이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큰 교회를 이어받은 2,3세대 목회자들이라도 건물과 신도들 이어받았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선임 목회자들이 신의 임재 속에 겪은 것과 똑같은 영적 훈련과정을 고난의 학교를 통해 내적으로 직접 거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 오히려 부자(父子)가 교회를 이어받았는가라는 피상적 국면보다 이것이 더 중요한 본질이다.

껍데기만 기독교이고 위수김(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친지김(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을 부르던 좌파 기독교 사제들이야 애초부터 그렇다 치고 보수신앙을 고수하던 교회들마저 하나둘 넘어가고 있다. 그 선봉에 목회자의 그릇된 신앙노선이 있다. '대통령 물러나라'는 군중의 탄핵난동이 밤낮 이어지던 시절, 설교 시간에 어느 여대 총장이 대학의 갈등이 있자 스스로 물러나는 예화를 들다 돌연 청와대있는 쪽으로 손을 가리키며 ‘저기는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가고 있다’는 설교는 그 정치 평가의 타당여부를 떠나 세계 굴지의 교회에 한참 미달되는 수준의 콘텐츠이다. 이천년 전 십자가 재판도 그렇게 군중 함성에 맞추어 이루어졌었다. 주일 예배는 정치 사견을 듣는 시간이 아니건만 그 영적 방사능 오염으로 상처받은 신도들을 헤아리는 눈이 있는지 모르겠다. 눈치 있는 녹화담당 집사들이 얼른 그 화면부분을 잘 삭제해 주었을 듯하다. 마침내 김정은 서울 방문을 환영해야 한다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나라가 망하는 장면은 이스라엘로 예증함이 목회자들에겐 잘 인식될 것이다. BC 722년 앗시리아에 의해 북왕국 이스라엘은 멸망했고 그로써 유대 12지파 중 10개 지파가 역사에서 사라졌다. BC 586년 바빌론의 느부가넷살은 남은 남왕국 유다를 멸망시켜 성전을 말살하고 살육극을 벌인 뒤 수만명을 포로로 끌고 갔다. 당시 포위된 상태에서 주민들은 굶주림과 공포로 미쳐 제 아이를 잡아 구워 먹기도 했다. 망국은 후일에도 반복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이자 에피파네스(Epiphanes 신의 발현이란 뜻인데 백성은 에푸마네스 Epumanes 즉 미친놈이라 불렀다)라 자처한 북방왕 안티오코스는 BC 167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대살육극을 벌인다. 그리고 돼지를 제물로 바쳐 성전을 더럽히고 창녀들과 방탕과 향락의 난장판이 되도록 만들었다.

AD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유대정벌 도중 로마 황제가 되어 로마로 돌아간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이다)가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파괴한다. 그때 정치지도자인 왕(헤롯 아그리파 2세)은 전쟁을 피하자며 로마에 조공을 바치자고 제안했다. 왕의 누이였으며 카이사르와 결혼해 두 번이나 왕비가 되었고 지금 예루살렘을 정복하러 오는 티투스 장군의 연인이기도 한 베레니스는 로마에 붙어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후일 로마인들은 그녀를 ‘유대인 클레오파트라’라고 경멸했다. 유대측 영적 지도자로 제사장이자 후일 유명한 역사가로 알려지는 요세푸스는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통역 및 선전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예루살렘 안 유대인들도 갈가리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다 60만~100만의 예루살렘 주민이 진멸되었고 성전은 이천년 지난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회복불능의 마지막 멸망은 정치지도층이 평화라는 이름으로 북에 머리를 조아리고 영적 지도자인 목회자들이 친북의 선봉에 서고 사회가 갈라진 이 나라 현실과 무섭도록 비슷하다.

그래서 얻는 게 핵피폭 면제 쿠폰이라도 되는가? 내가 원하는 대북사업을 할 수만 있다면 그만인가? 거기서 내 이름의 병원 짓고 교회 이름 내면 좋은가? 한반도 전체에 대한 통시적 진중함은 없는가? 그래봤자 항복한 목회자에게 돌아오는 폭군의 자비는 없었다. BC 586년 예루살렘을 파괴하면서 바빌론 느부가넷살은 항복한 사제들을 그 목전에서 살해한다. AD 70년 로마 티투스 역시 사제들은 성전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옳다며 다 몰살했다. 공산주의자이야 말로 기독교의 최대 적이다. 네로식 폭정이 즉흥적으로 기독교도를 처형했다면 공산주의는 애초에 정교한 교리로 기독교를 아편으로 규정하고 핍박한다. 북한 선교의 각종 ‘사업’, ‘프로그램’ 말고 그곳의 실시간의 진정한 순교자들에 대한 고뇌는 얼마나 관심을 가지는지 모르겠다.

너무나 큰 교회의 너무나 큰 목사님들, 당신들의 모순을 지적하는 사람들을 그대들이 가진 미디어를 동원해 ‘극우 분자들’ 선동이라 치부하는 것은 매우 간편한 방법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당신들이 세속에서 쌓은 교만과 왜곡되고 미성숙한 정치지향이 만든 실언 및 무엇보다도 당신들의 선대가 목숨 걸고 헌신하고자 해 왔던 복음 가치 자체를 훼손하는 죄과를 조금도 가려주지 못한다.

핵으로 7천만 협박하는 김정은을 환영하라는 것은 6.25때로 시간을 되돌려, 월남하던 당신네 아비와 할아비들로 하여금 피난 봇짐 도로 싸게 해 이북으로 돌려보내는 것과 같다. 목회자를 비판한다는 큰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바른 소리를 내는 몇 사람 목소리 덮어버리고자, 대통령 선거판에나 쓰는 거대화면 달린 방송차량을 교회마당에 동원해 대형 스피커로 그에 맞서려함은 다윗에게 밧세바와의 과오를 지적하는 선지자 나단의 소리를 거부함과 같다.

김은국의 소설에서처럼 순교자로 알려졌으나 실은 복음 본질과 거리가 멀어진 열 명에 해당되는 목사들은 누구인가? 제 동포 교인은 극우분자라 비난하면서 기독교인을 학살하고 제 가족마저 죽이는 살인마에 대해 경칭을 결코 빠뜨리지 않으며 성경 요한계시록의 끝 구절을 ‘아멘, 주 핵신(核神)이여, 오시옵소서’라 바꾸어 부를, 핵폭풍의 신 바알(Baal)에게 무릎 꿇을 제사장들이 누구인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오염될 때마다 나타났던 돼지를 부르고 있지 않은가. 그 돼지(亥)는 바로 핵(核)이란 글자 안에 숨어 있다. 십자가는 어디에 내버리고 그를 위한 환영의 플래카드를 들려는가.

김행범 객원 칼럼니스트(부산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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