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바라본 다른 동물들의 문화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지난 8월 중순에 임광규 변호사가 서거했습니다. 좌파 정권들 아래서 ‘헌법을 생각하는 모임’ (헌변)을 실질적으로 이끌면서 대한민국의 기틀이 허물어지는 것을 막으려 애쓰신 분입니다.

신문에 부고가 나오지 않아서,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전해 듣고 인터넷에 들어가보니, 그 날 발인했다고 나왔습니다. 임 변호사는 원래 ‘인권변호사’로 불린 분이었습니다. 이후에 우파 지식인으로 활동하지 않았으면, 아마도 신문마다 부고가 크게 났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더욱 쓸쓸해졌습니다.

제가 책을 펴내서 보내드리면, 임 변호사는 이태리 음식점으로 저를 초대했습니다. 그런 자리를 통해서, 저는 많은 것들 배웠고 법조계의 상황도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좌파 정권 아래서 우파 시민단체를 운영하는 어려움’으로 얘기가 번졌습니다. 마침 저도 우파 문화예술인들의 모임인 ‘문화미래포럼’을 이끌던 때여서, 실은 절실한 주제였습니다.

그는 싱긋 웃으면서 느릿한 말씨로 얘기했습니다, “내가 지학순 주교를 변호했으니, 저쪽 사람들도 대놓고 내게 뭐라 하지 못합니다.” 그의 눈에 고인 웃음이 문득 짙어졌습니다. “지학순 주교를 변호한 일이 알려져서, 실은 내가 우파 시민운동을 한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유신 시절 얘기니, 임 변호사는 ‘인권 변호사 1세대’에 속합니다. 서울법대 동기인 고 황인철 변호사와 함께 그는 압제적인 정권 아래서 어려움을 겪던 사람들을 변호했습니다.

황인철 변호사는 ‘문학과 지성’ 동인으로 동명의 잡지와 출판사의 운영 자금을 댔습니다. 제가 문학과지성사를 통해서 등단했고 동향이었으므로, 황 변호사의 활동에 대해선 저도 익히 알았습니다. 바둑이 저보다 조금 약했는데, 두고 나선 으레 고개를 저으면서 “작가가 글은 안 쓰고 바둑만 뒀나?”하고 핀잔을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쉰 갓 넘기고 서거했습니다.

지학순 주교가 박정희 정권의 박해를 받게 된 것은 1974년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서 자신의 소신을 밝힌 일 때문이었습니다. 원주교구장이었던 지 주교는 원주교구의 자문 변호사였던 임 변호사에게 변호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임 변호사를 통해서 ‘양심의 선언’과 ‘옥중 선언문’을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 일로 임 변호사도 정권의 탄압을 받았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지 주교를 도우려 천주교 사제들이 나섰죠. 그 움직임이 뒤에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으로 발전했습니다. 지 주교를 변호한 뒤, 그 단체가 점점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자, 임 변호사는 그 단체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임 변호사는 ‘민청학련 사건’의 피고인들도 변호했습니다. 워낙 흉흉한 시절이었고 군사재판을 받는 터라, 당시 피고인들은 변호사를 구하지 못했는데, 황인철 변호사와 임 변호사가 서울 법대 동기들과 함께 변호인으로 활약했습니다.

임 변호사는 1980년의 ‘사북사건’에서도 활동했습니다. 좌파 매체들의 공격을 받아 곤경에 처한 오웅진 신부의 ‘꽃동네 비리 사건’도 변호했습니다. 그 사건의 결심 판결을 앞두고 판결에 대한 예상을 묻는 기자에게 “무죄가 나면 당연하고, 만약 일부라도 유죄가 나면, 그건 변호사의 잘못이다”라고 대답한 일화는 널리 알려졌습니다.

1997년 ‘한국논단’이 주최한 대통령선거 후보 사상 검증 토론회에서 일어난 일로 ‘한국논단’ 발행인 이도형 선생님이 소송을 당해 큰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임 변호사가 변호인으로 활약했습니다.

이런 활동들은 물론 큰 업적입니다. 그러나 제가 임 변호사에게 큰 감사와 감탄의 마음을 품게 된 것은 좌파 정권 아래 ‘법의 지배’ 원칙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그가 한 일들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쓴 글들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좌파 정권들이 만든 갖가지 ‘조사위원회’들이 법 체계 밖에서 활동하는 실정을 걱정스럽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명석한 글들로 그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번에 좌파 정권이 다시 들어선 뒤, 그런 상황이 다시 나왔습니다. 임 변호사의 글들은 실질적으로 사법적 권한을 지닌 ‘조사위원회’들이 법의 지배에 대해 제기하는 심각한 위험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몇 해 전 제게 글을 주셨습니다. 공주로 내려왔는데 한적한 곳이라 정양에 좋으니 한번 들르라고. 꼭 찾아 뵙겠노라고 답신을 썼지만, 결국 찾아 뵙지 못했습니다.

고인은 신심이 깊은 분이었습니다. “Sancta Maria, Mater Dei, Ora pro nobis peccatoribus.”]

 

다른 동물들의 문화

우리는 사람이 특별한 존재라고 여긴다. 그런 인간중심주의는 우리의 천성이어서,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빠져 나오기 힘들다.

진화론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는 이유들 가운데 가장 큰 것도 바로 그것이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이 하나의 조상으로부터 진화했다는 세계관은 사람과 다른 생명체들이 크게 다르다는 인간중심주의와 부딪치게 된다.

문화에 관해서도 사정이 같다. 사전들과 백과사전들의 ‘문화’ 항목을 찾으면, 거기 나온 정의와 설명엔 문화가 인류만의 현상이라는 가정이 깔려있다. 지금 돌아보면 놀랍게도, 반 세기 전만 하더라도 문화는 인류만이 지녔다는 생각이 생물학의 정설이었다.

그런 생각에 처음 이의를 제기한 것은 일본 학자들이었다. 1952년 일본 영장류학(primatology)의 지도자 이마니시 긴지(今西錦司)는 다른 동물들에게도 문화가 있다고 주장했다. (영장류학은 사람의 천성이 진화한 과정을 밝히려는 학문이다.) 어떤 동물의 사회에서 개체들이 다른 개체들로부터 배워서 집단들 사이에 행태적 다양성이 존재하면, 그 동물은 문화를 지녔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얘기였다.

이마니시의 주장은 서양 학자들에겐 너무 생소하고 급진적이어서, 이내 거부되었다. 아마도 인종적 편견도 작용했을 터이다. 그의 주장이 서양에서 받아들여져서 정설이 되기까지는 무려 40년이 걸렸다.

이마니시는 야생에서 자유롭게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동물들을 연구했다. 그는 처음엔 몽골과 일본의 야생마들을 관찰했고 이어 큐슈 동남부의 외딴 섬 고지마(辛島)에서 서식하는 야생 일본 원숭이(Japanese macaque) 무리들을 집중적으로 관찰했다.

이마니시와 동료들은 원숭이마다 별명을 붙여서 식별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어 친근해지고 자신들의 존재를 원숭이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원숭이들과 사귀면서, 그들의 행태가 장기간에 걸쳐 어떻게 바뀌는가 살폈다.

당시 서양에선 스키너 (B. F. Skinner)의 학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는 동물들의 행태에서 자극과 반응 사이의 관계에 주목했고 자연스러운 환경 속의 동물의 행태보다 실험실의 통제된 상황에서의 실험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야생 상태의 동물들의 행태를 연구한 이마니시의 방법론은, 이제는 모두 당연히 따르지만, 당시엔 독창적이었고 이단적이었다. 다른 동물들도 문화를 지녔다고 보아야 한다는 그의 통찰이 그리도 오랫동안 무시된 것이 이상하지 않다.

이마니시가 그렇게 독창적 방법론을 생각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원래 사회를 중요한 단위로 여기는 전체론적 견해(holistic view)를 품었기 때문이다. 우연적 요소는 발전된 나라들 가운데 야생 영장류가 사는 곳은 일본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영쟝류는 200이 넘는 종들이 있는데, 모두 열대와 아열대에 산다. 사람을 빼놓으면, 일본 원숭이가 가장 북쪽에 사는 종이다. 덕분에, 서양 학자들은 동물원에 갇혀서 제대로 무리를 이루지 못한 영장류들을 관찰할 때, 이마니시는 자연 환경에서 간섭을 받지 않고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야생 원숭이를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이런 노력은 성과를 거두어 일본 원숭이들이 문화를 지녔다는 증거들이 확보되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증거들은 ‘이모’라는 별명을 지닌 여성 원숭이의 행태였다.

1953년 9월 어느 무덥던 날, 나이가 한 살 반인 여성 원숭이가 냇가에서 연구자가 나누어준 고구마를 물에 씻어 먹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때까지 원숭이들은 고구마를 그대로 먹었으므로, 이것은 흥미로운 혁신이었다.

그 뒤로 연구자들은 고구마를 물에 씻어 먹는 혁신이 이 원숭이 무리에서 확산되는 것을 관찰했다. 맨 먼저 그 어린 원숭이의 엄마가 본받았고 이어 그녀의 형제들이 본받았다. (그리고 이 경이로운 혁신을 생각해낸 여성은 고구마를 뜻하는 ‘이모’라는 별명을 얻었다.)

고시마는 작은 섬이므로, 원숭이들은 냇물이 없는 곳에선 바닷물로 고구마를 씻어서 먹었다. 처음엔 냇물 대용이었지만, 바닷물에 씻으면 짠 맛이 배고 숙성되어서 맛이 훨씬 좋아졌으므로, 나중엔 바닷물이 잘 스며들도록 고구마를 깨물어서 흠집을 낸 뒤 바닷물에 씻어 먹었다. 문화의 중요한 속성인 창발(emergence), 전파(transmission) 및 변용(modification)이 일어난 셈이다.

몇 해 뒤, ‘이모’는 다시 중요한 혁신을 생각해냈다. 연구자들은 원숭이들에게 주는 밀을 바닷가 모랫벌에 뿌렸다. 모래가 섞이니, 원숭이들로선 밀을 주어 먹기가 번거로웠다. 어느 날 ‘이모’는 모래와 섞인 밀을 바닷물에 뿌렸다. 그리고 바닷물에 뜬 밀알들을 건져 먹었다. 이 혁신은 ‘이모’와 잘 어울리는 어린 원숭이들로부터 어른 원숭이들로 차츰 퍼졌다. ‘이모’ 또래들과 가장 드물게 어울리는 어른 남성 원숭이들이 가장 뒤늦게 이 혁신을 배웠다.

‘이모’가 시작한 혁신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뜻밖의 방향으로 진화했다. 음식들을 바다로 가져오고 바닷물 속으로 들어와서 ‘요리’하고 건져 먹는 관행이 정착되자, 엄마 등에 업힌 갓난 원숭이들은 어릴 적부터 바닷물에 익숙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닷물 속에서 놀면서 뛰고 헤엄치는 것을 배웠다. 일본 원숭이들 사이에 ‘해변 문화’가 나온 것이다.

이런 ‘해변 문화’가 자리잡자, 원숭이들이 바닷가에서 사는 시간이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원숭이들의 행태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배고픈 어른 남성 원숭이들은 어부들이 버린 물고기들을 주어 먹는 습관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 습관이 차츰 퍼지더니, 마침내 물고기가 없으면, 바닷가에서 고기들과 조개들을 잡아먹게 되었다.

이제 고시마의 일본 원숭이들에겐 해마다 두 차례 고구마가 배급된다. 고구마의공급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고구마와 관련된 문화는 부모에서 자식들로 이어지고 있다.

‘이모’는, 사람으로 치면, 존 폰 노이먼(John von Neumann)과 비슷한 수준의 천재였다. 그녀는 오래 전에 19살 나이로 죽었지만, 고시마 입구에 선 그녀의 동상은 자기 부족의 문화를 혁명적으로 바꾸고 그 과정에서 인류가 자신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 그녀의 업적을 기린다.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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