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 칼럼] 한국인에게 개인은 있는가?
[박정자 칼럼] 한국인에게 개인은 있는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서울대 불어불문학 전공.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인파 속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사진은 참으로 불쾌했다. 평양 시민들이 흔들어대는 빨간 꽃은 영락없이 무당 꽃 같았고, 여자들이 입은 한복은 무늬와 색깔이 난잡하고 야단스러웠다. 대리석 기둥과 아치로 치장한 노동당사(3층 서기실)는 그냥 값비싼 키치였고, 그 호사스러움은 평양 밖 주민들의 혹심한 가난과 대비되어 민망했다. 그래도 남한의 수많은 개인들은 젊은 김정은의 통 큰 리더십을 찬양하느라 입에 침이 마를 것이다. 생각 있는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나라 망했다’고 나지막하게 되뇌이는 요즘, 시대를 거슬러 올라 미술사 속에서의 개인의 탄생을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인류 최초의 개인

글자 뜻 그대로는, 개인은 개별적 인간이다. 그렇다면 원시 시대 광활한 평원에 혼자 서 있는 인간도 개인일까? 어쩐지 아닐 것 같다. 예컨대 라스코 동굴 암벽에 그려진 선사시대 인간을 우리는 개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한 실루엣으로 처리되어 있을 뿐 개별 인간의 특징이 묘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의 그림에서도 개인은 찾아볼 수 없다. 무덤 벽에 많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지만, 그들은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징이 아니라 뚱뚱한 여자, 장난기 있는 무희, 흑인 노예 등 추상적 속성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파라오의 초상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각기 고유의 이름이 있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차이점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투탕카멘이건 람세스 2세건 얼굴 모습은 언제나 동일하다. 더군다나 그 초상들은 인간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에게 바쳐진 것이다. 초상의 모델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인간세계에서 뽑혀져 나와 탈 개인화되고 비물질화되어 하나의 도상(圖像)이 되었을 뿐이다.

폼페이 유적에서 발견된 Terentius Neo 부부의 초상
폼페이 유적에서 발견된 Terentius Neo 부부의 초상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이 등장한 것은 서기 1세기 때였다. A.D. 79년 베수비오스 화산 폭발로 잿더미에 뒤덮였던 폼페이 유적에서 발굴된 한 젊은 부부의 프레스코 벽화가 그것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젊고 부유한 제빵업자 테렌티우스 네오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다. 도시에 빌라를 소유하고 있던 테렌티우스는 왕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었다. 단지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대가를 지불할 만큼의 부(富)를 소유했던 평범한 개인이었다. 그가 자기 집 벽에 그려 넣은 부부 초상화는 신(神)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고, 온 나라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과 이웃들 혹은 친지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화가를 불러 자기 집 벽에 자신들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자연스럽게 빗어 넘긴 남자의 머리와 금발의 웨이브가 이마 위에 파도처럼 흘러내린 아내의 헤어스타일은 2천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모습이다. 부부의 손에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물건이 들려 있고, 그들의 얼굴에는 개인적 특징이 확연하게 드러나 있다. 만일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곧장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보바리 부인』을 쓴 소설가 플로베르의 말마따나 서기 1세기는 “신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리스도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오직 인간만이 존재했던” 시대였으므로,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개인이 꽃피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였을 것이다.

기독교의 발전과 함께 사라진 개인

과연 그리스도가 오고, 기독교가 발전해 가면서 개인은 다시 사라졌다. 처음에는 기독교도 개인을 강조했다. 인간은 누구나 직접적으로 신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했다. 그러나 곧 중앙집권적 교회와 교황제도가 확립되면서 신과 개인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부정되었다. 신에게 직접 말하는 대신 개인은 이제 교회의 중개를 거쳐 신과 대화했다. 더군다나 육체는 사탄에 속하고 영혼은 주님에 속하는 것이라고 바울이 말한 이래 신과 신적인 것만이 가치가 있고, 물질적 차안(此岸)의 세계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폄하되었다. 가시적 세계는 일시적 유용성 밖에 없는 것으로 여겨졌고, 감각은 한없이 평가절하 되었다. 당연히 개인도 가치를 지닐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감각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교황, 황제, 고관대작들만이 개인일 뿐, 일반 대중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아래 것들’이라는 집단의 이름 속에 익명의 얼굴로 남아 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가시적 세계를 재현하는 회화가 하찮은 것으로 여겨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추세였다. "그림은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의 독서"(AD.600)라고 그레고리 교황이 말했듯이 이제 이미지들은 의미에 종속되고, 인식에 봉사하게 되었다. 회화는 회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떤 의미나 이념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회화는 눈에 보이는 대상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비가시적, 추상적 진리와 올바름을 보여주는 기능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까 미술은 예술이 아닌 인식의 영역으로 넘어 간 것이다.

이렇게 인류 역사에서 개인은 다시 사라졌다. 그림 속 인물의 모든 디테일과 뉘앙스는 그의 개별적 특성이 아니라, 그 인물이 속한 신분의 일반적 속성을 표현했다. 그렇게 회화는 하나의 도상(icon)이 되었다.

개인(individual)이 개화하기 위해서는 근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근대적 개인의 탄생

베리 공의 기도서 10월 그림
베리 공의 기도서 10월 그림

마침내 15세기, 근대적 개인이 등장한다. ‘베리 공(公)의 매우 호사스러운 기도서’(The Very Rich Hours of the Duke of Berry, 1412~1416)라는 제목의 프랑스 기도서 속에서이다. 1년 중 각 절기의 기도문을 수록한 이 아름다운 채색 수사본은 요즘 달력이 그렇듯이 1월부터 12월까지의 세시 풍속이 그려져 있다. 질 좋은 양피지에 화려한 안료와 금가루가 칠해진 채색화들은, 회화가 이제 더 이상 어떤 특정한 의미에 종속되지 않고, 그저 단지 가시적인 것을 위해 봉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무심하게 증언하고 있다.

10월의 풍경을 보자. 까치와 까마귀가 이삭을 쪼아 먹고, 농부는 다음 해 농사를 위해 파종하고, 행인들은 저 멀리 화려한 성(城) 앞에서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고 있으며, 배는 강기슭으로 다가온다. 때는 1410년대, 모름지기 그림이라면 반드시 성모 마리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어야만 했던 중세의 가을이다. 그런데 여기 이 그림의 광경들은 그 어떤 기독교 교리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그 시대, 그 곳에서 귀족의 성은 동화처럼 아름다웠고, 농부들은 다음 해 수확할 곡식을 위해 10월에 낟알을 파종하고 있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베리 공의 기도서 2월
베리 공의 기도서 2월

2월의 풍경에는 불 앞에서 몸을 녹이는 농부의 아낙들과 눈으로 뒤덮인 마을이 보인다. 이것 역시 어떤 신학적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그림이 아니다. 그저 한 해의 그 시점에 그 고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묘사되었을 뿐이다. 눈(雪)이나 수레, 언덕길을 오르는 나귀, 우리 안의 양들, 불 쪼이는 아낙네들이 화려한 그림 속에 등장하여 한 해의 어느 시기를 재현하고 있는 것은 유럽 회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채색 삽화들은 한 해의 순환과정만이 아니라 하루의 순환과정도 자연스럽게 보여주었다. 하루 중 어느 시간의 흔적들과 어느 한 순간의 움직임들이 마치 현대의 스냅 사진처럼 재현되고 있다. 땅에서 들어 올려 진 발이 다시 땅에 닿기 직전의 한 순간, 또는 파종하는 농부의 경쾌하게 들려진 손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감각 자체가 개인성

특이한 표정을 살린 얼굴만이 개인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개인성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별 인물의 초상을 그려야 할 필요도 없다. 한 인물 주변의 풍경을 그렸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개인성의 표출이다. 그것은 그려진 인물의 개인성이기도 하지만, 그림을 그린 화가의 개인성이기도 하다. 감각을 통해 세계를 인지한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풍경을 보고도 그것을 감각으로 인지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지 않은가. 그러므로 인물 주변에 주위 환경을 배치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개인으로서의 화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암암리에 확인해 주는 것이다. 15세기 전반기에 플랑드르, 부르고뉴 등지에서 근대적 '개인'이 출현했다고 미술사가들이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남의 나라는 15세기에 벌써 주위 풍경을 곁들인 개인의 그림을 그렸는데, 우리나라는 20세기가 시작되기 3년 전에 죽은 장승업(張承業, 1843~1897) 마저도 세 사람의 신선이 서로 나이 자랑을 했다는 중국의 고사 ‘삼인문년(三人問年)’을 그리고 있다. 소재만 중국 것이 아니라 그림의 구도 전체가 중국의 신선 그림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유럽의 화가들도 물론 언제나 고대 그리스 신화와 성서 이야기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네덜란드 화가가 예수 탄생의 그림을 그릴 때 화면에 그려지는 베들레헴은 그 옛날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이 아니라 오히려 플랑드르의 풍경이다. 그들은 자기 집 뒤 풀밭이나 마구간에서 볼 수 있는 암소와 당나귀를 그렸고, 자기들이 일상적으로 쓰던 마구간의 낡은 여물통을 아기 예수의 구유로 그렸다. 요셉과 목동들은 플랑드르 지방의 농민들을 꼭 닮았다. 에덴 동산을 그려도 아담과 이브는 자기 이웃 사람의 평범한 얼굴이다.

신화와 성서를 재현한 서양회화들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화가가 살고 있던 당대의 풍경과 인물을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 조선시대의 산수화에서 풍경은 늘 중국의 어느 지역이고, 인물은 늘 중국 어느 산골의 선비나 동자(童子)이다. 가장 기층의 미술인 민화도 자기 주변은 하나도 그리지 않고 하구한날 호랑이와 까치만 그렸다. 후대의 미술사가들은 ‘우리 조상의 해학’ 운운하며 거기에 화답하기 바빴다. 겸재(謙齋)의 진경산수와 김홍도(金弘道), 신윤복(申潤福)의 풍속화가 있기는 하지만, 작품의 가지 수가 너무 적고, 크기는 너무 작으며, 색채는 단조로워 애국심 없는 외국인들의 눈길을 끌기는 역부족이다.

회화는 회화일 뿐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인류의 정신사 속에서 회화는 적극적으로 사유의 역사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회화 그 자체가 사유였다. 네덜란드 화가 캠핀(Robert Campin)과 반 에이크(Jan van Eyck)는 에라스무스를 100년, 몽테뉴를 150년 앞질러 근대적 개인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서구의 철학자들은 확인해 주고 있다.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찬양하는 좌파 국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아무래도 20세기가 될 때까지 개인이란 존재가 아예 없었던 것 같다.

개인이란 무엇인가?

그럼 도대체 개인이 무엇이길레 그것이 그토록 근대와 직결되어 있단 말인가? 전통 사회는 개인이 없는 사회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특수한 개인은 있었지만 개별적 개인은 없었다. 그것은 공동체의 사회였는데, 공동체의 사회란 계급의 사회다. 그 사회 안에서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개별적인 개인이 아니라 어느 집단에 소속된 특수한 개인이 된다. 즉 양반으로 태어난 사람은 양반이, 노비로 태어난 사람은 노비가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노비는 노비라는 집단의 명칭만으로 충분했고, 그 사람 특유의 특징이나 개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공동체의 사회란 그러므로 태생적 불평등의 원칙, 위계적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다. 태어날 때 부여받은 정체성과 삶의 방식은 평생 바꿀 수 없었다. 개인의 자율성과는 거리가 먼 타율성의 사회이다.

그러나 서로를 평등한 존재, 독립된 존재, 자율적 존재로 간주하고 그렇게 서로를 대할 때 인간은 특수한 개인이 아니라 개별적 개인이 된다. 서로를 평등한 존재로 생각하고, 자신이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라 느끼고, 또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소속 관계 속에 함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어떤 계급이나 집단에 속한 개인이 아니라 완전한 단독자로서의 개인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자기 자신일 뿐이라고 느낀다. 이처럼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근대적 개인이다. 민주주의의 기원인 이 개념은 근대의 여명기에 태동하였다.

북한에 개인이 있는가?

공동체의 사회는 전 근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모든 사회에도 개인은 없다.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는 공동체의 원칙만이 있을 뿐이다. 한 사람만 삐끗해도 집단 체조의 대열이 헝클어지고, 한 사람만 카드를 잘 못 들어도 카드 섹션의 그림이 망가지는데 누가 개인을 존중해 주겠는가? 전체의 대열, 전체의 그림을 위해 한 개인은, 비록 열 살 안팎의 어린이라 하더라도, 거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동작을 위해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공동체의 질서는 사회구성원들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보인다. 자연스럽게 보인다는 것은 정당하고 규범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의미이다. 백두혈통으로 태어난 사람은 당연히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이런 사회에서 권위는 신성하고, 빛나고, 위압적이다. 인민위원들의 우레 같은 박수를 받으며 당 대회장에 등장하는 30대 초반의 김정은을 생각해 보라. 이런 사회에서 권력은 장엄한 의식이나 군대의 열병식 같은 화려한 예식을 통해 과시된다. 수 만 명의 인민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평양의 집단체조 ‘빛나는 조국’을 생각해 보라. 여기 동원된, 사회적 지위가 가장 낮은 사람들은 오로지 육체만을 지닌 존재이다. 그들의 기능은 전적으로 육체적 임무를 완수하는 데 있다. 출생에 의해 평생 죽도록 노동만 하도록 되어 있으며, 그들이 견디는 고통은 정당화되어 있다. 수십 수백 년 전의 전통사회가 아니라 바로 우리와 동시대, 우리의 바로 윗 쪽에 이런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이 비극이다.

개인의 소멸

자기가 소속된 집단의 관습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강요당할 때, 개인은 스스로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못한다. 전근대적 전통 사회 혹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반 국민들이 겪었던 일이다. 그러나 민주적 사회로 이행하면서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고무되었다. 그렇다면 현대의 민주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우리가 체험하는 민주주의의 경험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다고 믿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착각이다. 실제로 그들의 판단과 행동은 여론, 다수 또는 대세 같은 보이지 않는 권위에 이끌려 결정될 뿐이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건만 사람들은 ‘공동체’라는 익명의 권위에 복종하여 자신의 개인성을 스스로 버리고 있다.

끊임없이 개인을 쟁취하기 위해 달려 왔는데, 그리하여 민주적 개인의 사회가 열린 줄 알았는데, 그 종착 지점에서 결국 우리는 다시 개인이 소멸되는 위험과 맞닥뜨렸다. 세월호 사태의 말도 안 되는 비합리성, 촛불 집회의 어처구니없는 야만성, 뚱뚱한 독재자 김정은에 대한 기막힌 미화 현상들이 모두 우리 사회 특유의 개인의 소멸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박정자 객원 칼럼니스트(상명대 명예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6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