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포커스]"기초적인 자료도 읽지 않은채 나를 공격"...위안부 강제연행 부정한 美 하버드대학 램지어 교수, 日 현지 강연

지난 10일 日 도쿄에서 국제역사논전연구소 주최로 제3회 '위안부' 국제 합동 심포지움 개최 지난 2021년 '위안부' 관련 논문으로 홍역 치른 존 마크 램지어 교수도 등단 "일본군 '위안부' 본질은 연계봉공 매춘 계약"주장 "동료 학자들, 기초적인 연구 자료도 읽지 않은 채 나를 공격...3만 건 항의 메일 놀라워" 지적

2024-07-16     박순종
존 마크 램지어 교수. [사진=박순종 객원기자]

“나를 공격한 동료 학자들은 일본어로 된 문헌조차 읽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난 10일 일본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에서 개최된 제3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국제 심포지움의 강연자로 나선 존 마크 램지어(램자이어) 하버드대학 교수는 3년 전 자신의 논문과 관련한 일련의 사태를 이렇게 회고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국제 합동 심포지움은 지난 2022년 도쿄에서 처음 개최된 이래 2023년 서울에 이어 올해 3회차에 이르렀다. 일본 국회의사당 인근에 위치한 세이료회관(星陵會館)은 심포지움에서 이뤄지는 논의 내용을 공부하고자 하는 250명의 청중으로 가득찼다.

지난 두 차례 심포지움의 경우 한·일 두 나라의 연구자 내지 일본군 ‘위안부’ 운동 관련 인사이 주로 참여했는데, 이번에는 미국의 학자들도 참여하면서 그 규모가 커졌다.

이날 심포지움에는 특히 스기타 미오(杉田水脈) 중의원 의원, 아리무라 하루코(有村治子) 및 에토 세이치(衛藤晟一) 참의원 의원 등 일본의 집권 여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의 주요 정치인들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경제학의 한 분야인 법경제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램지어 교수는 2021년 초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 ‘매춘 계약’에 있다는 점을 골자로 한 논문 〈태평양전쟁에서의 성(性) 계약〉을 한 학술지에 실었다고 곤욕을 치렀다. 그가 ‘아무 근거도 없이’ 일본군 ‘위안부’가 일본군 등에 의해 강제로 끌러가 ‘성(性)노예’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했다는 그간의 통설을 부정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지난 10일 제3회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국제 합동 심포지움이 지난 10일 열렸다. [사진=박순종 객원기자]

▼“제 논문 관련 보도가 나간 후 3만 건이 넘는 항의 메일이 쏟아졌습니다.”

램지어 교수의 논문 내용을 보도한 산케이신문을 인용해 당시 램지어 교수를 한국에 처음 소개한 매체는 한국경제신문이었다. 이후 국내 여러 매체의 후속 보도가 이어졌고, 램지어 교수는 공격의 대상이 됐다. 그는 대량의 항의 메일 배후에 모종의 조직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특히 그의 논문과 관련해 그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한 것은 평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한국인 유학생들이 자신에게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했다는 점이었다고 한다.

▼“영어로 된 논문과 자료를 많이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노교수는 영어로 된 정보의 양을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신을 공격한 동료 학자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기초적인 연구서적들도 읽지 않고서 자신을 공격한 점에 주목했다고 한다. 즉, 이공학 계열의 논문들은 대체로 영어로 작성되는 반면 동양사학 등 인문학 분야의 경우 그렇지 않아 어떤 이슈가 발생했을 때 그 이슈와 관련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운 탓에 영미권 학자 또는 대중이 보기에 어떤 주장이 옳고 어떤 주장이 그른지 분별할 수 없다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계약’에 있습니다.”

그는 전날(9일) 일본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군 ‘위안부’가 일본군 등에 의해 강제로 연행됐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제국(帝國) 내 공창(公娼) 제도의 연장으로써 이들은 경제적 동기에서 일본군 ‘위안부’가 됐다고 설명했다.

램지어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전선(戰線)에 위치한 일본군 전용 ‘위안소’에서 일하는 ‘위안부’의 경우 조선과 일본 본토 등 후방 지역과 비교할 때 적군의 공격을 비롯해 임금 체불 등의 면에서 상대적으로 위험이 컸고 이 때문에 전차금(前借金)을 골자로 하는 연계봉공(年季奉公) 제도가 정착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램지어 교수는 후방 지역의 위안부(매춘부)들이 6년 단위 계약을 맺은 데 반해 일본군 ‘위안부’들의 경우 계약 기간이 2년 단위로 매우 짧았다는 사실을 거론했다.

“일본군 ‘위안부’들은 계약이 종료되거나 전차금을 모두 갚은 경우에는 일을 그만둘 자유가 있었습니다.”

박순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