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90년대 말 홍대 앞 인디 뮤직 신이 태동할 무렵 이런 농담 같은 격언이 유행했었다. “밴드부터 만들어. 기타는 나중에 배우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하실지 모르겠다. 된다. 어렵지 않다. 소리를 내는 데만 일주일 이상 걸리는 클라리넷 같은 악기와 달리 기타는 쉬운 코드 두세 개를 외우는데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드럼도 ‘쿵쿵 딱 쿵쿵 딱’ 기본 리듬을 두드리는데 역시 두 시간이면 넉넉하다(기타보다 더 쉽다). 베이스 기타도 마찬가지. 기타라는 이름 때문에 멜로디 파트로 오해하기 쉬운데 베이스 기타는 리듬 악기다. 드럼 박자에 맞춰 코드의 기본음만 짚어주면 되는데 이건 한 시간만 해도 가능하다. 물론 쉬운 곡 한 두 곡 정도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밴드는 밴드다. 오전에 밴드 결성했다고 발표하고 오후에 무대에 설 수 있다는 말씀이다. 실제로 라디오 음악 프로에 나와 밴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 말에 책임을 지느라 나중에 기타를 배워 밴드를 만든 사례도 있다. 세상일이란 게 이렇게 인과관계 뒤바뀌어 진행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80년대 운동권도 비슷하다. 보통 일정한 정치 학습을 하고 시위에 참가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반대다. 선배들은 포섭할 대상을 찾은 다음 술 몇 번 사주고 바로 시위 현장에 내몬다. 최루탄 분말 뒤집어쓰고 SY-44의 대나무 파편에 팔 찔리고 전경 방패에 발등 몇 번 찍히고 나면 없었던 분노도 생긴다. 그럼 저녁 때 자취방에 모아 놓고 눈물콧물 훌쩍이며 그때부터 세미나를 한다. “자, 민중을 탄압하는 저 군부독재의 무자비한 폭력을 봤지? 그럼 이제부터 왜 우리가 싸워야 하는지 자세히 알아보자꾸나.” 세미나 내용이 머릿속에 쏙쏙 박힌다. 몸으로 이미 학습을 먼저 했기 때문이다. 시위 먼저, 학습은 나중에. 그렇게 운동권은 만들어진다.

지난 달 29일 광화문 광장에 모여 정부의 일방적인 최저 임금 인상에 항의하는 소상공인들을 보며 소생은 기분이 좋았다. 절박해서 나온 사람 심정은 생각 안하고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냐고 힐난 하실 분 있겠다. 이분들은 업종 특성상 하루라도 일터를 비우거나 쉴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정말 어지간히 분하지 않고는 거리에 안 나온다. 안다. 알고 쓴다. 타인의 삶에 건방지게 훈수를 두면 안 된다. 잘 모르는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럼에도 기분이 좋다고 말한 이유는 이렇다. 재작년 병신반정(丙申反正) 기록 영상을 보면 시위 참가자들의 인터뷰가 많이 들어있다. 시위는커녕 그때까지 생업 말고는 세상일에 관심도 없었던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각성되는 과정이 대부분이다. 일단 시위부터 하고 그때부터 공부를 했다(그 공부가 방향이 빗나갔다는 얘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

이번에 광화문에 모인 소상공인들도 마찬가지다. 당장은 경제적인 어려움의 토로지만 슬슬 마음속에 의문들이 생기기 시작할 것이다. 정부는 과연 마음대로 임금을 올리고 노동 시간을 줄이라 강요해도 되는 것인가에서 시작해서 자유 시장 경제 체제에서 시민의 권리는 어디까지인가 등등 조금씩 그 폭을 넓혀갈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왜 대한민국에서는 정치적 자유만 중시하고 경제적 자유는 무시하거나 안 알려주는지, 이런 항의의 목소리를 어떻게 하면 더 조직적이고 효율적으로 낼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한다면 금상첨화다. 갈등을 부추기려는 게 아니다. 시장의 목소리가 정권의, ‘멋대로, 함부로, 고집대로’ 정책 드라이브에 제동을 걸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어느 분이 이번 소상공인 시위를 놓고 ‘계급적 자각’이라는 표현을 썼다. ‘계급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각’이라는 단어는 정확하게 쓰인 것 같다. 이번에 충분히 분노하셨는가? 그렇다면 다음은 공부다. 시장 경제에서부터 자유민주주의까지 공부하셔야 한다. 그래야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을 달성하기 위해 무작정 해마다 시급을 올리는 일이 얼마나 무모하며 이른바 소득주도성장이란 게 허무맹랑한 국가 폭력인지 알게 된다. 그래야 다음 선거에서 시장을 무시하고 시장을 적으로 보며 재벌을 혼내주겠다는 사람들에게 정치할 기회를 안 주는 제대로 된 선택을 하게 된다. 그래야 ‘자각’이 ‘각성’이 되고 ‘운동’이 된다. 하루 수입은 날렸지만 ‘자각’을 하기 시작한 3만 명을 얻은 것은 대한민국에게 오랜만에 들려온 좋은 소식이다.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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