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은 친일 매국의 핵심 몸통 ‘일진회’의 주역이었다
이땅에 외세를 끌어들인 원인제공 행위가 ‘혁명’인가?

김용삼 객원칼럼니스트
김용삼 객원칼럼니스트

문재인 정부 출범 이래 하도 괴이한 일이 동시다발로 터지는 바람에 이제 민초들도 어지간한 사건에는 면역력이 생길 법도 하다. 그런데 느닷없이 ‘동학혁명 명예회복법’ 운운하는 소식에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정부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가 9월 5일부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후손의 명예 회복을 위한 유족 등록 사업을 9년 만에 재개한다는 것이다.

원래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이하 위원회로 표기)’가 동학혁명 참여자 3644명과 유족 1만567명 등록을 받고 2009년 활동을 마쳤다. 이 위원회가 또다시 화제거리고 등장한 이유는 지난해 12월, 호남 지역구 의원들을 중심으로 “유족 등록을 못한 사람들이 많다”면서 ‘동학농민 명예회복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탓이다. 

문제의 위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이 사업의 취지와 목적을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과 그 후손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명예회복 운운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유족으로 판정을 받을 경우 국민 세금으로 보상금을 주는 것은 아닌가 하여 위원회에 문의했다. 그 결과 보상금 지급은 계획이 없으며, 단지 ‘반란군의 후예’로 낙인찍혀 고초를 겪은 후손들을 ‘혁명군의 후예’로 명예 회복을 시켜주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 

그렇다면 동학농민군이 반란군에서 혁명군으로 국가적 공인을 받는 셈이니, 알아봐야 할 것이 많다. 동학은 과연 혁명인가?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혁명이었는가를 알아보자.

역사 해석상의 외눈박이 환자들

전봉준으로 상징되는 농민군이 첫 봉기를 하게 된 계기는 봉건제도에 대한 저항이었고, 두 번째 봉기는 조선을 무력 점령한 일본군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 점에서 위원회의 사업 취지와 목적은 정당성을 갖는 것처럼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동학을 외눈박이 일국사(一國史) 관점이 아니라 국제관계사 관점으로 시야를 넓히면 위원회의 역사 해석에 심각한 하자가 발견된다. 

우선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그 뿌리가 깊다. 조선의 봉건적 지배구조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1862년의 진주민란이 그 증거다. 월북 작가 박태원은 『갑오농민전쟁』이라는 대하역사소설을 남겼다. 이 작품 속에서 1862년 익산 민란의 주모자 임치수는 동료 6명과 함께 체포되어 목이 잘린다. 목이 잘리기 직전 임치수는 입회한 전라감사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이놈들 똑똑히 듣거라! 이제 우리를 죽이거든 우리들의 눈알을 모조리 뽑아다가 전주성 남문 위에 높다랗게 걸어놔 다우. 앞으로 몇 년 후가 될 지 몇십 년 후가 될지 그건 모르겠다마는, 우리 농군들이 모두들 들구 일어나서 너희놈들을 모주리 때려잡으러 전주성 남문으로 몰려들어가는 광경을 우리는 기어이 이 눈으로 보구야 말 테다!”(박태원, 『갑오농민전쟁: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1』, 깊은 샘, 1989, 308~310쪽)

임치수의 유언은 그로부터 32년 후,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는 것으로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고종 초기 몰락한 양반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켰던 무장 민란이 진압되자 이번에는 일반 농민의 민란이 전국적으로 번졌다. 1876년 개항 이후 1894년 동학 농민봉기가 발생할 때까지 크고 작은 민란이 100여 차례나 발생했다. 이러한 민란들이 동아시아의 역사를 바꾸는 기폭제가 된 동학 농민군 봉기로 대폭발을 일으키게 된다.    

그렇다면 동학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발생한 크고 작은 민란 참여자들 및 그 후손들은 왜 명예회복 대상이 아닌가? 봉건질서에 저항한 것이 혁명이라면 동학 농민봉기의 뿌리인 진주민란, 더 거슬러 올라가 홍경래의 난은 왜 차별하는가? 하루빨리 진주혁명, 홍경래 혁명으로 명칭을 바꾸고 ‘위원회’를 설립하여 명예회복 신청을 받기 바란다.

이땅에 외세를 끌어들인 원인제공 행위가 ‘혁명군’?

본격적인 전봉준의 봉기에 앞서 1893년 4~5월, 충북 보은에서 3만여 명의 동학교인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이때 고종은 청나라 군대를 빌려다 이들을 진압하라고 명한다. 이 명령은 조정대신들의 극력 반대, 청나라 측의 거부로 실현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해엔 사정이 달라진다. 
전라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마치 흡혈귀처럼 백성들의 고혈을 빨았다. 참다못한 전봉준 이하 농민들이 1894년 2월 15일 봉기했다. 이 봉기가 일파만파로 번져 동학농민군은 백산에서 지방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급기야 서울에서 파견한 조선의 정예 관군도 장성과 황토현 전투에서 이들에게 대패하여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농민 반란조차 진압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고종은 또 다시 청나라에 SOS를 친다. 청군 파병 소식을 접한 일본은 즉각 대병력을 조선에 보내 전쟁을 일으킨다. 청일전쟁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러일전쟁과 조선의 망국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분기점이기 때문이다. 

사무라이로 구성된 메이지 정부 지도층의 한반도관(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자국의 안전에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이 문제였다. 일본 지도부가 보기에 조선은 ‘자력으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한 나라’였다. 스스로 독립을 지킬 수 없으니 청나라나 러시아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는 일본의 심장 혹은 복부를 겨냥한 예리한 칼이나 비수가 되어 일본의 안전에 현저한 위협이 된다. 일본의 안전을 위해 이 상황을 방치할 수는 없다. 따라서 주권선·이익선 개념을 앞세워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의견이 대세를 이룬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종주국-속국으로 얽혀 있는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먼저 끊어내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그 후 한반도를 일본의 군사적 근거지로 만들어 중국이나 러시아가 조선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일본이 틈만 나면 외치는 “조선은 자주독립국” 논리의 핵심이다.    

조선의 자주독립은 외교적 수사만으로는 달성되지 않는 목표이니, 결국 전쟁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청나라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보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군비를 증강시켜 왔다.

일본을 청일전쟁으로 몰고 간 또 하나의 중대 변수는 1891년 착공된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 건설이었다. 이 철도가 완공되는 날 러시아가 동아시아, 그중에서도 가장 만만한 조선의 지배를 노리고 노도처럼 밀려들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조선으로 향하는 러시아에 브레이크를 걸기 위해서는 러시아와의 한판 승부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10년 후 러일전쟁으로 현실화 된다. 정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도식이 그려진다.

전봉준 동학군 봉기→청나라 원병 파병→일본군 조선 파병→청일전쟁→러일전쟁→을사늑약→조선 망국

 조선이 일본 식민지로 향하는 첫 시발이 동학군의 봉기라는 사실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새롭게 정리되어야 한다. 민족주의자나 좌익, 전체주의 추종세력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외세를 이 땅으로 초대한 몸통은 누구인가? 이것은 그대들이 너무나 부인하고 싶지만,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 상 동학 농민운동이다. 

그대들이 동학을 ‘혁명’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렇다면 외세를 이 땅에 불러들여 궁극적으로 일제 식민지로 향하도록 만든 동학 농민군의 봉기 행위 자체를 ‘혁명’으로 추인하는 결과가 된다. 이 원죄를 대체 어쩔 셈이며, 일본 사람들이 볼 때 이러한 논리적 흐름을 뭐라고 손가락질 하겠는가? 

고종이 현명한 군주였다고?

살벌한 동아시아 국제정세 하에서 일본은 청나라와 전쟁 구실을 찾고 있는 와중에 동학농민군이 봉기했다. 문재인 정부의 ‘위원회’는 이 사건을 일컬어 “봉건제도를 개혁한 혁명”이라고 칭송한다. 이런 일면적 평가는 장님 코끼리 더듬기 방식의 무책임한 역사 평가다. 

좀 더 시야를 국제관계사로 확대해보자. 청나라가 고종의 SOS를 접수한 후 농민군 진압을 위해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청일 간에 이미 톈진(天津)조약이 체결되었다. 또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 8월 30일 일본은 조선과 체결한 제물포조약을 통해 공사관 및 영사관 경비 목적으로 약간의 병력을 주둔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이러한 국제조약에 의거하여 청군이 파병되면 일본군도 덩달아 조선에 상륙하리란 것쯤은 젖먹이 어린아이 빼고는 다 아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고종의 청군 원병 요청에 대해 조정대신들은 “일본군은 물론 러시아군마저 불러들여 서울이 외국군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라면서 강력 반발했다. 

그러나 고종은 “앞으로의 일은 알 수 없고, 여러 대신들 의견이 증원을 요청해야 한다고 하니 서둘러 청국 공관에 조회를 보내라”고 어명을 내렸다. 5월 31일 전주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농민군을 “미친 벌떼와 궁한 개”로 비유한 민영준은 고종의 명에 따라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교섭하여 6월 1일 청군 출병 동의를 얻었다. 고종이 청에 원군 지원요청을 한 장면을 황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금은 매우 사태를 걱정하여 원세개를 불러 중국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세개는 처음에 매우 난처해하다가, 임금이 거듭하여 도움을 요청하자 마침내 톈진에 전문을 쳤다. 임금은 민영준을 불러 중국에 도움을 요청한 내용을 설명하였다. 

영준은 깜짝 놀라면서 “최근 국제법 조약에는 한 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면 조약에 가입한 여러 나라가 군대를 동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청나라는 진실로 우리나라를 돕고자 하여 별다른 악의가 없다고 보장할 수 있지만, 일본은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빈틈을 엿보고 있는데, 만약 국제법을 빌미로 외국 군대가 차례로 움직이게 되면 결국 호랑이를 막으려다가 이리를 불러들이는 꼴로 뒤끝이 좋지 않을 것이니 어찌하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은 망연자실하여 중국에 도움을 요청한 일을 중지시키도록 하였다. 영준은 원세개를 만나 임금의 이러한 뜻을 전하자 세개가 “제가 이미 요청하였습니다. 당신 나라의 임금과 신하는 어찌 일처리 하는 것이 이토록 답답합니까”라고 하였다.’

청군을 조선 땅에 불러들여 동학 농민군을 진압할 경우 어떤 외교적 대란이 발생할 것인지 따위의 복잡한 문제는 고종에게는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런 정도의 지도자를 개명한 군주였고, 자주적인 근대화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태진, 황태연 같은 학자가 그 대표 격인데, 이태진 교수는 『고종시대의 재조명』, 황태연 교수는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이라는 저서를 통해 고종의 기회주의적 통치행위와 아관파천을 미화하고 나섰다. 이들은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투쟁, 그 틈에서 우왕좌왕하는 나약한 군주, 즉 고종 암군설(暗君設)·암약설(暗弱說)은 민비 시해에 가담한 일본 언론인 기쿠치 겐조(菊池謙讓) 같은 침략자들이 고의로 날조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참 안되고 미안한 이야기지만 고종은 왕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 넘도록 집무를 한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실행자다. 아관파천뿐이었다면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종은 국가적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라의 안전은 팽개치고 자신의 안위를 외세에 의탁하기 위해 영관파천(영국공사관으로의 피신), 미관파천(미국공사관으로의 피신)을 감행하려 했던 사실들이 역사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아관파천에서 환궁한 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등극한 것도 고종의 자주적 판단이 아니다. 그것은 러시아 황제로부터 “친러 정책을 열심히 행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허락을 받아서 행한 것이다. 이런 고종을 향해 “그 분은 자주적 근대화 능력을 가진 군주”라고 존경하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자위하는 행위라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전사자 1 대 36,000의 비참한 싸움

조선의 환란을 이용하여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켜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목적을 위해 일본은 청군을 초전에 압도할 수 있는 대병력을 파견했다. 일본은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출발시키기도 전에 선수를 쳐서 8,000명의 1개 혼성여단 대병력을 조선에 투사한다. 

이제 남은 과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일본 군부와 군국주의 팽창주의자들은 동학 농민봉기 초기부터 조선의 난리를 이용하여 한반도에 군사적 진출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 비밀리에 행동을 개시했다. 

대륙침략의 선봉 역할을 한 우치다 료헤이(內田郞平)를 비롯한 현양사(玄洋社) 세력들은 조선에서 청나라와 개전 구실을 만들기 위해 천우협(天佑俠)이란 조직을 결성한다. 그리고 다수의 일본 참모본부 첩자, 낭인, 깡패, 간첩들이 조선에 침투하여 전봉준 및 동학 지도부와 접촉했다. 

사료 부족 및 선행연구 미비로 일본 낭인 세력과 동학 지도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논의했는지, 천우협이나 일본 군부가 자금이나 무기를 지원하여 동학 농민운동에 확산에 영향력을 행사했는지의 여부는 떠도는 이야기만 존재할 뿐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양측의 접촉 사실 자체는 숨길 수 없는 팩트다.  

일본은 1894년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포로로 잡았으며, 7월 25일 서해 풍도 앞바다에서 청군 증원 병력을 수송하는 선단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이어 성환전투, 평양전투, 압록강 입구에서 벌어진 황해해전에서 일본군이 연전연승했다.   

전주화약으로 한동안 잠잠하던 동학 농민군이 들썩이기 시작한 것은 일본군이 조선 왕궁을 점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였다. 8월 무렵부터 전라도 및 충청도 일대에서 전봉준‧김개남‧손화중‧손병희 등의 지도하에 동학 농민군이 반일운동에 나섰다. 

본격적으로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것은 1894년 10월이고, 일본군과의 전투는 11월부터 전개된다. 지난 봄 전라도 고부에서의 봉기가 조선의 부패한 탐관오리를 징벌하기 위한 ‘반봉건’이 목적이었다면, 이번에는 외세와 맞서 싸우기 위한 ‘반제(反帝)·반일(反日)·반외세’가 주된 목적이었다. 

동학 농민군은 11월 20일부터 12월까지 공주와 우금치 일대에서 일본군과 조선 관군 연합군에게 거의 몰살을 당한다. 마지막 전투였던 우금치에서의 격돌은 전투라기보다는 조·일 연합군에 의한 대학살이란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농민군의 대패였다. 

근대식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병사 1명이 농민군 200명을 대적할 정도로 전력 차는 현격했다. 잘 훈련된 일본군이 먼 거리에서 동학 농민군을 저격하는 바람에 농민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그것은 훈련된 근대식 군대와 훈련받지 못한 중세식 군대의 싸움이었다.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의 기록에 의하면 1894년 12월에 벌어진 동학 농민군 최후의 전투에서 총 3만 6,000명의 동학군이 전사했다. 반면 일본군 전사자는 도쿠시마 현 출신의 상등병 스기노 도라키치(杉野虎吉) 단 1명이었다. 전사자 1 대 36,000의 비참한 싸움을 ‘혁명’이라고 칭송할 경우 이것은 정서상 멘탈 붕괴에 해당하는 사태 아닌가?

동학은 친일 매국의 핵심 몸통 ‘일진회’의 주역이었다

1894년 12월 27일 밤, 전봉준을 비롯한 손화중·최경선·송두한·김덕명 등은 전라도 순창에서 오랜 부하인 김경천의 배신으로 밀고 당해 지방 민병에게 생포되었다. 같은 날 농민군 지도자 김개남은 태인에서 체포되었다. 김개남은 즉결 처형되었고, 그의 목은 1895년 1월 22일 서울 거리에 효수되었다. 

전봉준은 서울로 호송되어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주한 일본공사의 심문을 받았다. 전봉준은 함께 체포되었던 동료 5명과 함께 1895년 4월 23일 처형되었다. 이후 한동안 방황하던 동학조직은 1897년 최시형이 동학의 도통을 손병희에게 전수했고, 다음해 최시형이 체포 처형되면서 손병희가 동학을 이끌게 된다.

손병희는 1901년 일본에서 체류하며 개명된 세상에 눈을 뜬다. 이용구가 이끄는 정치조직 진보회(進步會)가 러일전쟁을 벌이는 일본에 협력하는 운동을 벌일 때 손병희의 동학은 이에 적극 가담했다. 러일전쟁이 진행될 때 동학은 군자금 1만 원을 제공하고 일본군을 위한 철도 부설에 교인들을 노동자로 동원해 협조했다.

러일전쟁 후 진보회는 일진회로 개편되는데, 일진회는 “친일과 매국의 전위적 역할을 결정적으로 한 단체”라고 지탄을 받는 핵심단체다. 이 일진회의 실질적인 창립자가 손병희라는 사실을 문재인 정부는 알고 있는가? 

송병준이나 그에게 매수당한 이용구가 아니라, 손병희로 대표되는 동학이 일진회 성립의 주도세력이었다. 중앙의 구 독립협회 계열과 지방의 동학계열이 주를 이룬 일진회의 회원은 총 14만 명 정도로,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사회단체였다.  

게다가 일진회는 우치다 료헤이 같은 일본 낭인 세력과 한국주차 일본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김종준의 저서 『일진회의 문명화론과 친일활동』에서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무식하고 용감한 정책 수행에 앞서 잠시 이 책을 꼭 참고하여 이성을 되찾길 권하고 싶다(김종준, 『일진회의 문명화론과 친일활동』, 신구문화사, 2010, 21~22쪽). 

일진회를 애오라지 친일 매국단체라고 몰아붙이는 것도 현명한 역사 인식은 못된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이처럼 도끼로 장작 패듯 쾌도난마식으로 정리될 수 없는, 매우 끈적끈적하고 질척거리는 사실관계의 총합이란 사실을 이해할 때가 되었다. 

동학이 한 시절 반봉건세력·반일 세력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친일 매국의 핵심 몸통 노릇을 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는 적폐 중의 핵심 적폐세력인 친일 매국노들을 ‘혁명군’으로 날조하여 명예회복을 해주겠다는 것인가?

김용삼 객원 칼럼니스트(박정희기념재단 기획실장/전 월간조선 편집장)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