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진정한 건국이 됐다면 이후 펼쳐진 독립운동의 존재와 의미는 무엇인가
1941년 임시정부에서 건국강령을 준비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한 것도 온전한 국가를 세우기 위한 몸부림

​강규형 객원 칼럼니스트
​강규형 객원 칼럼니스트

올해 광복절은 역사상 가장 기이한 광복절로 기억될 것이다. 그동안 김대중 정부에서 건국50주년, 이명박 정부에서 건국 60주년을 기념하고 매해 건국 몇 년을 기념하던 행사였는데, 올해는 건국 70주년을 언급하면 마치 역적이 된 듯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그리고 느닷없이 내년에 “건국 100주년”을 기념한단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그리고 그 외 독립단체가 중국이나 러시아, 미주, 국내 등지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한 공은 지대하다. 다만 국민, 영토, 주권이라는 국가의 성립요건이 없었던 점, 나아가 국제사회로부터 승인되지 못한 점을 배제하고 국가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존재한다.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조건을 자세히 규정한 준거는 몬테비데오 협약(1933년 서명, 1936년 12월 26일 발효)이다. 이 협약의 제1조는 국제법의 인격체로서 국가가 가져야 할 조건을 네 개로 정의했다. (a) 상주하는 인구, (b) 명확한 영토, (c) 정부, (d) 다른 국가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 : 주권. 이것은 위에 언급한 국가의 3대 요소, 즉 주권·국민·영토를 더 세분화해서 규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요소들을 결여한 임시정부는 ‘임시’정부였지 국가가 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임시정부 수립이 새로운 국가의 건설이 아니었고, 건국은 앞으로 쟁취해야 할 목표임을 가장 잘 인식한 사람들은 바로 임정 요인 자신들이었다. 가령 1919년에 진정한 건국이 됐다면 이후 펼쳐진 독립운동(혹은 광복운동, 민족해방운동 등)의 존재와 의미는 무엇인가. 더욱이 미래의 건국을 대비하여 1941년 임시정부에서 건국강령을 준비한 것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임시정부가 1941년 11월 28일 새 민주국가의 건설, 즉 진정한 독립과 건국을 준비하기 위한 “대한민국 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을 발표한 것도 온전한 국가를 세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대한민국 건국강령”은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정치이념으로 독립과 새 나라의 건국을 위한 청사진(靑寫眞)을 밝힌 중요문건이다. 참고로 동아일보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17일부터 19일까지 3회에 걸쳐 ‘건국강령’의 내용과 해설기사를 실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4년 전에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공포(制定公布)하였는데 그 강령의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라고 하며 1면에 1941년의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연재했다. 같은 의미에서 해방 후에 여운형과 안재홍의 주도로 설립된 건국준비위원회도 1945년 8월 28일자에 독립국가 건설, 즉 건국의 계획을 담은 ‘선언’을 공포했다. 이 선언은 “본 준비위원회는 우리 민족을 진정한 민주주의적 정권으로 재조직하기 위한 새 국가 건설의 준비기관인 동시에 모든 진보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세력을 집결하기 위하여 각계각층에 완전히 개방된 통일기관이요, 결코 혼잡한 협동기관은 아니다”는 것을 천명했다

필자는 1897년 탄생한 대한제국이나 1919년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오늘날의 대한민국 탄생에 중요한 밑거름이자 전 단계 과정이었다고 본다. 바로 그 때문에 1948년 대한민국의 탄생은 더욱 값지다는 것이다. 비록 여러모로 취약점은 있지만, 대한제국에서 의미 있는 부분, 요컨대 독립주권 확립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반영된 민주공화제, 그리고 독립운동의 소중한 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이를 정신사적으로 계승한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를 더욱 높이는 근거이기도 하다. 더불어 대한민국 탄생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그에 밑거름을 제공한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의 의미를 오히려 강조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고려 건국, 조선 건국 등의 용어를 쓴다. 대한민국도 고조선이나 대한제국이 아니기에 새로운 나라가 세워졌다고 얘기할 수 있다. 1919년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대한민국이 ‘잉태’된 것이기에 큰 의미를 갖는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왕정복고가 아닌 민주공화정을 추구하고, 독립된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자는 이상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심어놓은 것이고, 대한민국 헌법이 명시하듯이 그 정신과 법통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이 수립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여러 지면을 통해 1919년을 ‘정신적 건국’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 때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수립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제일 잘 인식한 것은 바로 임정 인사들 자신들이었다.

2017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회장 김자동)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회장 이종찬)가 함께 편찬한 '사진으로 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919~1945'(한울)는 27년 가까이 분투한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을 담은 300여장의 사진을 수록한 소중한 자료집이다. 이 책에는 1945년 11월 4일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환국을 앞두고 함께 남긴 글의 사진도 수록됐다. 여기서 최동오와 황학수는‘화평건국(和平建國)’‘건국필성(建國必成)’을 써서 진정한 건국을 염원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임정 요인들도 아직 건국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임시정부의 이상이 실현된 것이 대한민국의 탄생이라 해석하는 것이 온당하다. 유엔 감시 하에 한반도 역사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자유선거이자 보통선거였던 1948년 5.10선거에서 국민주권이 구현됐고, 같은 해 12월 12일 유엔총회가 대한민국을 한반도내의 유일합법정부로 승인함으로서 국가주권이 국제적으로 승인됐음이 재확인 됐다. 달리 표현하면 현재에도 유효한 국제법과 국제정치 상 베스트팔렌 체제에서 국가주권을 가진 진정한 독립국가가 됐던 것이다. 그러니 임시정부 수립에 반영된 민주공화제와 독립운동의 소중한 정신을 정신사적으로 계승하고 현실적으로 구현한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임정을 위시한 독립운동의 의미를 오히려 고양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제헌의회와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을 독립한 해, 즉 새로운 나라가 출범한 해로 인식했다. 따라서 1949년 8월 15일 ‘독립 1주년 기념식’이 거행됐다. 1949년 9월 의회에서 독립기념일의 명칭이 광복절로 바뀌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 대한민국 정부와 제헌의회는 1948년 8월 15일을 독립 또는 광복으로 본 것이다. 사실이 이럴진대 ‘1948년 건국’ 또는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을 언급한다고 해서 반헌법적이니 친일이니 하는 주장들이 얼마나 공허하고 야비한 논의인지를 자각해야 한다.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이 독립된 날이고 대한민국이 수립된 날이다. 그리고 그 과정의 완성은 자유통일된 대한민국이 될 것이다.

강규형 객원 칼럼니스트(명지대 교수,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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