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분법적 善惡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야
'배제적 성장' 유발하는 소득주도성장
"경제논리는 단선적이지 않다"

조동근 객원 칼럼니스트
조동근 객원 칼럼니스트

개인의 경쟁력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그의 삶에 대한 ‘태도’(attitude)이다.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으로 습득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 가’가 더 중요하다. 한 국가도 마찬가지다. 정치엘리트의 정책사고가 결국은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 

경제학의 오랜 숙제는 ’성공방정식‘을 푸는 것이다. 무엇이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다. 부존자원이 많은 나라가 부자인 가. 천만의 말씀이다. ’부존자원의 역설‘이 이를 반증(反證)하고 있다. 석유부국 베네주엘라를 보면 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춥지 않고 영어 잘하는 필리핀의 소득은 우리보다 낮다. 

’경제성장의 원천(源泉)‘에 대해 신고전학파 성장이론은 지당한 처방을 내리고 있다. 경제가 성장하려면, ”기술수준, 자본축적, 인적자본개발’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동어반복(同語反覆)’이다. 부자가 되려면 돈을 많이 벌라는 식이다. 성장을 위해서는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유인, 동기, 제도’가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재산권이 인정되고 ‘계약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며, ‘입법’(rule by law)이 아닌 ‘법치’(rule of law)가 이뤄져야 한다. 압축하면, 성장하기 위해서는 시장이 작동하도록 ‘시장정합적(市場整合的)’ 제도장치가 갖춰지고 ‘경제인식’이 이를 뒷받침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조건은 경제성장 뿐만 아니라 경제의 순항(順航)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2분법적 선악(善惡)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야  

문재인 정부 출범 1년 2개월을 맞아, 청와대는 국민을 대상으로 ‘정책설명회’를 가졌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7월 24일 춘추관 브리핑에서,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을 상징하는 간판으로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을 내걸고 기존의 소득주도성장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소득주도성장이 최저임금 인상 프레임에 갇혀 협소하게 해석되는 것을 경계해, 복지와 사회안전망 확충까지 포괄한 ‘포용적 성장’을 전면에 내세운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문 대통령이 언급한 포용적 성장은 ‘신자유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신자유주의는 배제적 성장(exclusive growth)으로 성장의 수혜층이 소수에 그치고 다수가 배제되는 구조”라며 “이런 배제적 성장으로는 경제가 지속할 수 없고 성장에 걸림돌이 된다"고 했다. 반대로 “포용적 성장은 두루 많은 사람에게 성장의 결과가 배분되고, 두루 혜택을 누리는 성장"이라고 설명했다.

청와대 정책사고는 순진하다 못해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신자유주의가 ‘왜 배제적 성장을 가져오는 지’에 대한 논거제시가 없다. 한마디로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좌파의 이분법적 진영논리의 판박이다. 이쪽 진용은 선(善)이고 반대는 악(惡)이라는 것이다. 청와대의 “포용적 성장은 두루 많은 사람에게 성장의 결과가 배분되고, 두루 혜택을 누리는 성장"이라는 주장은 전형적인 ‘동어반복’이다. 포용적 성장은 말 그래도 모든 것을 포용하는, 즉 성장 과실이 고루 분배되는 성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뜨거운 커피를 타 놓고 냉커피가 아니라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포용적 성장’의 사전적 해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포용적 성장을 꾀할 수 있을지를 설명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를 폐기하면 포용적 성장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가. 정책이 미사여구일 수 없다. 

포용적 성장에 대한 김의겸 대변인의 설명을 들어보자. 문대통령의 말을 인용해, “포용적 성장은 큰 개념이고 포괄적인 개념”이며 “포용적 성장을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식으로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포용적 성장은 상위개념으로 소득주도성장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포용적 성장이 소득주도성장의 상위개념이라면, 소득주도성장을 더욱 강화해야 맞다. 그렇다면 정책 방향은 분명하다. 최저임금을 더욱 올리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면 된다. 그러면 바라는 포용적 성장이 이뤄지는 데 망설일 게 무엇인가.

논리적으로 볼 때, 포용적 성장을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이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주장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지구상에 포용적 성장을 바라지 않는 나라가 없을진대, 그렇다면 왜 모든 나라들이 소득주도성장을 실험하지 않겠는가.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이를 합리화 하려하면 더욱 큰 오류에 빠지게 된다. ‘작은 잘못’을 막기 위해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우(愚)를 범하는 것이다. 김의겸 대변인은 ‘포용적 성장’을 특별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7.24 춘추관 브리핑에서 그는 "임금 등을 통한 1차적 분배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고 시장자유에 맡기지만, 세금·재정·연기금 등 2차적 분배에는 정부가 개입해 소득 재분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포용적 성장"이라고 말했다.

시장경제를 정상적으로 채택하는 모든 나라는 ‘소득분배’와 ‘소득재분배’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 ‘소득분배’는 시장에서의 분배를 의미한다. 예컨대 시장에서 결정된 생산요소가격에  요소부존량을 곱해 요소소득이 얻어지는 것이다. 소득분배 과정에서 생산요소가격은 시장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국가는 개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득재분배’는 다르다. 소득이 사후적으로 개인과 계층 간에 크게 차이가 나면 국가가 개입한다. 누진세, 재정, 연기금 등이 소득재분배를 위한 수단이다. 지구상에 소득재분배 정책을 실시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이것이 ‘시장경제 본래의 모습’이다. 김대변인에 의하면, 세금·재정·연기금 등 2차적 분배는 포용적 성장의 전유물인 것처럼 현실을 왜곡시키고 있다. 

'배제적 성장'을 유발하는 소득주도성장

시장은 계약을 통해 정보가 교환되고 이해가 조정되는 ‘비인격적’ 플랫폼이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누가 다른 누구를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특정계층에게 특혜를 부여하지 않는 한, 시장경제는 성장과실을 고루 균점시킨다. 정부의 간섭과 독점적 노조가 도리어 특정 계층에게 특혜를 가져다준다. 그 결과 특정계층이 성장의 과실 분배에서 배제된다. 

독점 노조가 원하는 대로 시급(時給)을 1만원으로 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가. 임금은 노동의 대가(代價), 즉 기여한 부가가치를 사후적으로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임금은 생산성과 연계될 수밖에 없다. 최저임금은 규제다. 시간당 1만 원의 부가가치를 생산해 내지 못하는 비숙련·저학력 근로자는 노동시장 진입 자체가 봉쇄될 것이다. 그렇다면 비숙련 근로자는 취업 경력을 쌓을 수 없게 되고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된다. 비숙련, 저학력, 고령인구의 취업 기회가 줄어들고 기존 취업자가 실직하게 된다면 이들이 주로 속하게 될 ‘소득분위 하위 10%’의 소득은 더 낮아지고 소득 분배는 나빠진다. 한편 통상 정규직의 1호봉은 최저임금에 맞춰진다. 기본급을 기준으로 여러 가지 수당이 부가된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1호봉이 오르면,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근로자 간 임금 격차는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은 소득 양극화를 부추긴다. 

연이은 두자리수의 최저임금 인상 결정은 최고의 악수이다. 자영업자의 반발이 커지자 정치인은 최저임금이 아닌 ‘갑의 횡포’ 때문에 자영업자가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것으로 몰고 가고 있다. 정부는 “카드수수료 인하, 프랜차이즈 가맹본부 가맹비 인하, 상가 임대료 인하”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이 같은 조치는 김대변인이 포용적 성장을 설명하면서 말한 "임금 등을 통한 1차적 분배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고 시장자유에 맡기고“와 배치되는 것이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최저임금을 올려놓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연히 시장에서 결정되어야 할 각종 가격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다. 이는 ‘1차적 배분’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투자가 성장을 견인한다. 자본축적이 되면 노동생산성이 증가해  임금수준이 향상되고 생산도 증가해 물가가 하락하고 실질임금이 높아진다. 그러면 소비여력이 커져 경제가 성장한다. 그 결과 빈곤이 극복되고 하위층이 중·상층으로 이동하게 된다. 시장을 기반으로 한 성장은 ‘모든 계층에게 번영’을 가져다준다. 시장경제원칙에 충실한 자유주의 정책이 ‘포용적 성장’을 가져다준다. 물론 때에 따라 경쟁 과정에서 낙오되어 빈곤의 늪으로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대비해 복지프로그램이 만들어진 것이다. 국가의 역할은 경쟁에 간섭하는 것이 아닌 ‘경쟁의 결과’에 대해 탈락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장경제이다. 

경제논리는 단선적이지 않다

2017년 최저임금 인상은 거침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최저임금 인상’은 ‘사회적 합의’라고 생각했다. 이때 ‘사회적 합의’가 맞는 표현인가. 그렇다면 앞으로 3년 내에 “일인당 국민소득 6만달러”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하면 어떨 가. 이 얼마나 환상적인 가.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적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이해관계자 간의 ‘밀당’일 뿐이다. 사회적 합의는 특정계층의 논리를 공고하게 하는 방패에 자나지 않는다. 여기서 특정계층은 ‘민노총’이다.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긴 것은, “임금을 주는 쪽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재벌과 대기업이 임금 주는 쪽이고 자신은 받는 쪽이라고 생각했다. 최저임금 인상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 중엔, 편의점 가맹점주 아들과 커피 가맹점주 딸이 포함돼있다. 그들은 자신의 부모 등에 돌멩이를 던진 것이다. 아파트 경비원의 급여인상에 흔쾌히 동의한 가정주부도 자신이 입주자대표회의를 통해 경비원을 고용하고 있는 고용주인 것을 몰랐다. 경비원의 대량해고는 역설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이 주장하는 ‘원래의 포용적 성장’은 취약 계층에 교육과 훈련을 집중함으로써 그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갖도록 유도하자는 것이다.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국가가 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특정계층에게 ‘제도적으로’ 특혜를 주겠다는 것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을 끌어올리는 방향, 원칙, 기조에는 흔들림이 없다”는 청와대의 설명은 포용적 성장과 양립할 수 없다. 논리적으로 소득주도성장이 포용적 성장의 방법이 될 수는 없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저자로 알려진 에이스모글루 교수의 메시지는, 성장을 위한 ‘자유 기회 법치’ 등의 인프라가 갖추어진 ‘포용적 국가’가 역사적으로 성장해 왔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맥락이다. 신자유주의가 ‘배제적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에 ‘포용적 성장’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주장은, 어딘가 존재한다고 믿는 ‘신기루’를 찾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좌파는 ‘경제지력’의 한계를 벗어야 한다.

조동근 객원 칼럼니스트(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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