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의식 투철한 집안…초등학교 이후 학교에서 전교조식 교육 받으며 변질
젊은 시절 이승만-박정희에 대해 맹목적 반감 팽배
군복무 시절 천안함 폭침-연평도 포격 겪으면서 다시 우파로 돌아왔다
광우병에 대한 학문적 연구 통해 '광우병 선동' 휘둘린 내가 부끄러웠다
대한민국 교육현장 문제 많다...자라나는 새싹 교육할 현실적 방안 마련해야

김준환 씨.

나의 부모님은 한국전쟁 이전 북한에서 태어나신 실향민이시다. 아버지는 지금의 평양 강동군에서 태어나셨고 북한의 기독교 탄압이 심해지자 증조할아버지의 결정으로 몰래 월남하여 강원도 묵호동에서 사시다가 전쟁 후에는 춘천에서 자리를 잡고 어머니와 결혼하시기 전까지 사셨다. 어머니는 함경남도 흥남에서 태어나셨고 흥남철수작전때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월남하셔서 거제도에서 사시다가 전쟁 후 춘천에서 자리를 잡고 아버지와 결혼하시기 전까지 사셨다.

이렇듯 나의 부모님은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북한과 처절히 싸우고 반공투쟁 해온 역사를 몸소 겪으신 산 증인이시고 더군다나 내외조부모님은 북한의 공산주의를 잠시나마 겪으셨고 큰이모부님은 한국전쟁때 소위로 임관하셔서 인민군과 싸웠기에 나는 어렸을 적부터 철저한 반공교육과 반북한정권 교육을 직간접적으로 받아왔다. 특히 큰이모부님의 가족이 인민군에게 쌀을 내주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로 인민군이 장남인 큰이모부님이 보는 앞에서 모든 가족을 거꾸로 매달아 죽였다는 이야기는 어렸던 나에게 충격적인 것이었다. (큰이모부님은 이후 국군의 소위로 임관하셔서 인민군과 싸웠고 아직까지도 김일성이란 이름을 들으시면 이를 가신다.)

또한 친형이 미국 Valley Forge라는 military academy에서 중고등학교 생활을 했는데 이곳의 장대한 졸업식을 목격하고 친형이 카투사에서 군생활을 하며 집으로 초대한 여러 주한미군 장교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어린 나에게 미국과 미군에 대한 동경심이 생겨났었다. (아직도 형이 집으로 데려왔던, 어렸던 나와 같이 놀아주던 블랙호크 조종사 두 명이 생각난다.) 이렇듯 중학생이 되기전까지 나는 앞서 언급한 가정교육과 여러 경험으로 인해 북한정권에 대하여 애매모호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고 막연하게 ‘미국은 좋은 나라’,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은 훌륭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어릴 적 자리잡은 막연한 관념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2000년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의 만남후로 흔들리게 되었다. 당시 나는 담임선생님이 틀어준 TV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이 만나 웃으며 서로 악수하는 장면을 친구들과 함께 지켜봤었는데 이 장면을 함께 지켜보던 담임선생님의 “너희들은 역사적인 순간을 보는 거다. 이제부터 평화가 올거야”라는 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악마로 알고 있던 김정일이 우리나라 대통령과 서로 웃으며 악수한다는 것이 분별력 없던 어린 나한테는 그 당시 담임선생님이 했던 말까지 기억날 정도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것이었고 내가 그동안 알던 것들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아주 조그마한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머리 한 구석에 자리 잡도록 만든 사건이었던 것이다.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까지는 우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내 생각을 좌쪽으로 급격히 기울도록 만든 결정적 시기였다. 중학교 당시 지금 와서는 전교조 출신이었을 것이라고 의심되는 선생들 밑에서 사회, 역사, 도덕 교육을 받았었는데 이때부터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의구심과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또한 ‘미군 장갑차 사건’으로 인한 반미시위에 맞춰 선생님들의 은근한 반미감정 조장으로 나 또한 반미감정이 스멀스멀 생겨났던 것 같다.

특히 내가 중학교 2학년때 담임 선생님의 반미성향이 굉장히 강했는데 이분이 사회시간에 9ㆍ11테러를 언급하며 ‘나는 미국을 개인적으로 엄청 싫어해. 전쟁만 일으키는 깡패 집단이라 생각하고 테러를 당한 미국을 전혀 동정하지 않아.’라는 말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가정의 영향으로 친미성향이 짙던 당시 나에게 이 말은 앞서 언급한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의 말과 함께 내 기억속에 각인 될 만큼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30살이 넘은 지금 나이에도 당시 그 선생님의 성함이 기억날 정도이다.) 학교 친구들도 틈만 나면 미국을 욕했고 9ㆍ11테러의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을 찬양하며 그 중 몇몇은 ‘그를 존경한다’ 고까지 말했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나 또한 이들에게 동조되어 함께 미국을 욕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부모님께 많이 혼나기도 했었다.

중학교 시절 반미감정이 최고조에 도달했다면 고등학교 시절은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부정하고 부끄러워하는 생각이 확립되어져 가던 시기였다. 고등학교 1,2학년 때는 학업에 매진하느라 별다른 기억이 없으나 막 3학년이 되고나서 중학교 3학년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에서 헤어나오기도 전에 친형이 머리를 크게 다치게 되면서 마음이 삐뚤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심하게 방황을 했었고 잇따라 일어나는 가정의 불운에 대한 절망과 분노가 대한민국이라는 나의 조국을 향해 표출되었던 것 같다. 특히 국사시간에 배웠던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부정적 역사인식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고등학생이던 나의 감정을 분출하기 좋은 곳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대화할 때면 앞장서서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자들이라고 욕했고 특히 인터넷의 카페활동을 통해 건국이후 전두환 대통령 시절까지의 역사를 청산하고 친일기득권을 몰살해야 한다는 글들을 찾거나 직접 올리며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부끄러운 행동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이었지만 당시에 나는 그것이 정의이고 올바른 일이라 생각했었고 어쩌면 나의 울분과 절망을 표현할 곳을 찾아야만 했던 것일수도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서서히 확립되어 오던 반미좌파적인 나의 성향은 내가 대학생 초년이던 2008년 광우병 사태 때 폭발했었다. 당시 나는 생물학전공인데도 불구하고 좌파들의 광우병 선동을 의심없이 그대로 믿었고 좌파적 사고를 가진 친구들과 함께 신랄하게 이명박 정권을 국민을 죽이려는 정권이라고 비난을 했었다. 그리고 학교 중앙광장에서 있던 이명박 정권을 타도하자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 그리고 반미성향도 짙어져 미국에 대해 매우 심한 적대감을 가지게 됐었다.

이런 나의 반미좌파적 성향으로 인해 나는 어머니와 심하게 충돌했었고 이 때문에 어머니와의 관계도 소원해지기까지 했었다. 어머니는‘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냐? 너 어릴 때 미국가서 소고기 자주 먹었는데 광우병 걸린 적 있니?’라고 질타하셨었고 나는‘어머니의 그런 구닥다리 생각과 미국에 대해 막연히 좋은 감정을 가지니 우리나라가 이 꼴인 겁니다’라고 주장하며 맞섰던 것이다. 결국 광우병 사태는 내가 군대를 갈 때쯤 잠잠해졌고 나는 여느 좌파들과 마찬가지로 아무 반성없이 내가 했던 행동과 말들을 비겁하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겼었다.

이런 나의 좌파적 성향은 군대에서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겪고 학교에 복학하여 생화학 내용 중에 포함되어 있던 광우병의 원인이 되는 프라이온 단백질을 자세히 공부하게 되면서 서서히 변화되어 갔다. 군생활 중 북한의 큰 도발들은 나로 하여금 다시 북한정권에 대해 적개심을 갖도록 만들었고 프라이온 단백질에 대한 공부는 골수좌파들이 주도했었던 광우병 선동에서 스스로 나를 깨어나도록 했다. 특히 광우병과 프라이온 단백질을 공부하며 이것들에 관한 과학적 사실과 통계를 마주했을 때 과거 내 행동들이 쥐 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졌었고 어머니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창피를 느꼈었다. 그리고 광우병 집회 때 한국전쟁 사진전이 초토화되고 유엔군을 조롱하는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며 이들에게 속은 나 자신에게 굉장히 화가 났었다.

어릴 적 가정교육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비교적 쉽게 좌파의 생각과 신념에서 탈출할 수 있었으나 대학 초년생때 사귀어 온 좌파성향의 친구들과 후배들, 여러 동생들에게 짓눌려 겁쟁이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몇 년 동안 쥐 죽은 듯이 살아왔다. 그리고 과거의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과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제대로 알고 마주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나의 겁쟁이 같은 생각과 행동을 확실히 바꿔주고 우파성향으로 확실히 기울도록 해 주신 분이 이춘근 박사님 이시다. 2016년 여름 유튜브 방송을 통해 우연히 이춘근 박사님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방송을 보게 되었는데 이 방송이 메마른 나의 가치관과 생각에 단비가 되어주었고 이때부터 나는 이춘근 박사님의 방송을 찾아보며 우리나라 주변정세와 국제정치학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춘근 박사님의 오프라인 강연을 적극적으로 직접 찾아가서 들으며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대한민국의 상황과 그동안 걸어온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이후 나는 박정희 아케데미등과 같은 우파교육강좌에 들어가 스스로 공부하게 되면서 아직은 부족하지만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우파적 가치관과 신념을 어느정도 확립 시켰다. 현재는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두 분을 존경하고 있고 특히 소름 끼칠 정도로 국제정세를 이용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기적적인 한미동맹을 이루어낸 이승만 대통령을 더 존경하고 있다. 또한 어릴 적의 무조건적 친미주의자에서 이제는 우리나라 국익을 위한 친미주의자로 바뀌어 미국과 함께 파트너로서 계속 가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도 가지고 있다.

솔직히 미국에 대한 내 생각은 2011년 군전역 후 미국에서 잠시 지낼 때 확고해졌다고 본다. 당시 나는 뉴욕 Battery Park의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와 워싱턴DC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을 보며 가슴 먹먹함을 느꼈고 그들의 국가 가치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확실히 미국과 함께 국제무대를 걸어 가야한다’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번 글을 쓰며 중고등학교 시절 아직 확립되지 않은 가치관을 가진 나를 포함한 학생들에게 교묘한 방법으로 반미좌파적 사상을 주입시키던 선생들과 그들의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지 새삼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현 안보상황과 국내정치상황을 고려하면 내 나이에 속한 보수우파들이 정신을 차릴 때라고 느끼고 있고 기성세대 또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집회만 할 것이 아닌 앞으로 자라날 새싹들을 교육시킬 현실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과거 나를 다시 돌아보니 참으로 부끄러웠고 이 부끄러움에 반성을 한다는 차원에서 친구들과 가까운 동생들을 변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끊임없이 설득시키려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김준환(31·대학원생/분자미생물학 전공) kw0112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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