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로당 경남 의령지부장 지낸 아버지, 中2부터 공산주의사상 학습
전교조 필두로 영화산업·문학·역사업자, 反한국 헤게모니 성공
1986년 '공산주의의 조국' 소련의 현실 시찰한 뒤 너무나 억울
미제 식민지란 서울의 거리가 너무나 아름답고 싱그러워져 갔다
자유민주주의자들의 목소리에 내 목소리 보탤 것을 맹세한다

표병관 씨.

오늘날 수구꼴통이라 불리는 자유민주주의자들이 문재인 정부에 의한 자발적인 적화를 우려하면 자칭 진보적 시민들이 반응하는 말이 있다. “이것이 적화라면 살만하네” 이 말에 자유주의자들은 경악하겠지만 어린시절 학창시절 철저하게 공산주의 교육을 받은 나에겐 퍽이나 친근하게 들리는 소리다. 미국의 식민지라 생각한 대한민국 서울에 대학 공부하러 올라온 내가 자신에게 던진 말이랑 같다. “미국 식민지가 이 정도면 살만 하네” 이 말을 아버지에게 했다가 태어나 두 번째로 뺨을 많이 맞았다.

아버지는 1921년 생, 남로당 경남의령 지부장으로 해방 후 한국에서 일어난 첫 번째 '광주사태'인 10.1폭동을 주동했다고 사형선고를 받은 분이다. 물론 장시간 도피와 도망자로, 또 위기의 순간마다 당신을 구해준 아내이자 내 어머님의 목숨을 건 재치로 살아 남으셨다.

그 댓가로 어머님은 한 겨울에 몽둥이 찜질과 권인숙보다 더 혹독한 고문을 받으셔야 했다. 그럼에도 세월이 흐른 뒤 어머니는 자신을 고문한 경찰에 대한 원망보다 석방되던 날 남편 없이 아이를 키운다며 쌀 한가마를 보내준 결찰서장의 마음을 더 진하게 간직하고 계신다.

1961년생인 나는 중학교2학년인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정치학습을 매몰차게 받았다. 공산주의사상을 기반으로 훗날 조국통일의 일꾼으로 쓰기 위한 훈련이었다. 대구 남산동에 살던 나에게 아버지의 전력을 아는 집안이나 동네의 또래 아이들은 나를 향해 빨갱이 아들이라고 놀리곤 했다. 그때마다 난 오히려 더 서슬퍼런 얼굴로 "우리 아버진 영웅이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을 대한민국에 세뇌된 무(無)개념의 '얼라'로 취급하였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나누어 주던 반공방첩 리본을 내 동댕이 치는 호기어린 모습을 주변아이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교육청에서 실시하는 백일장 대회의 글쓰기 제목이 “이승복 어린이”면 난 당당하게 나의 주장을 펼쳤다. “공산주의란 경제적 개념인데 한낱 어린 국민학생인 승복이가 공산주의 경제를 어떻게 알고 무작정 싫다고 외치다 죽었겠느냐? 대한민국 박정희의 무서운 세뇌공작으로 인해 승복이가 죽었다”며 열변을 토했다. 선생님에게 맞고 친구들에게 욕도 먹었지만 이런 일로 정보부에 끌려가지는 않았다. 당시 간첩 사건이 터지면 정보부 사람들이 구둣발로 우리집으로 들어와 온 장농과 책상서랍을 뒤졌지만 당돌하게 대항하는 나에게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동네 친구들에게 김일성은 다수를 위한 독재지만 박정희는 재벌, 군벌, 문벌 등 소수 특권층을 위한 독재라고 주장하여도 큰 문제는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박정희는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추진했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 집권시기 민주당 전 대표 김한길의 아버지인 김철을 사회당 대표로서 1974년 영국의 세계 사회당기구 지도자회의, 1977년 동경에서 개최된 사회주의인터내셔날지도자회의에 참석 시킨걸 보면 박정희의 독재는 상당히 열린 독재로 보여졌다.

1975년부터 아버지와 재일교포 아저씨(조총련)의 교육은 참으로 치밀하고 깊이가 있었다. 당시 조총련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의 핵심사업은 첫째, 용어 전술로 남쪽을 공략하라 둘째, 역사를 무기화하라였다. 이 두 가지 역점 사업은 완벽하게 성공하였다. 우선, 이들은 정치집단에 보수와 진보란 용어를 차용했다. 진보의 반대는 보수가 아니고 퇴보기에 이러한 용어를 남쪽이 수용하는 순간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인민화 되는 건 부지불식간이란 것이다.

진보정치란 말은 세상에 없는 말이다. 사안에 따라 전통을 따라야 할 게 있고, 뛰어 넘어야 할 것이 있다. 과거 한때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진보라고 부른 적이 있지만 20세기 말에 이것을 진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북한이나 소련이 대한민국, 미국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노무현이 연세대학에서 “어떤 놈의 보수를 가지고 와도”란 표현에도 입을 닫고 있는 대한민국 정치인을 보면 “참으로 적화가 늦어지고 있구나”란 생각과 함께 대한민국 사회가 정치부재란 판단을 하게 되었다. 노무현이 언급했듯이 “자기처럼 머리 좋은 사람이 대학 못가는 사회가 건강하냐?”는 말에 분명히 대답해야 한다. “노무현 당신의 생각보다 대한민국은 훨씬 더 건강하고 위대하다”고. 상고 나온 사람을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으로 시켜준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노무현이 북한에 태어났다면 결코 김정일, 김정은 자리에 갈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정치학습이 턱없이 부족한 노무현이 대통령 임기를 마친 시점에 진보라는 것이 용어 전술의 허구라는 것을 알아차렸으리라 생각한다.

역사의 무기화는 단 한마디로 친일파와 반일주의를 기점으로 친미파 미제국주의로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역사란 모두가 현대사일 뿐이다”란 말은 현대 역사가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역사란 “일어난 역사”가 아닌“쓰여진 역사”기 때문이다. 특히 국사라는 거울은 백설공주에 나오는 마녀가 보는 거울일 뿐이다. 한국의 국사 교육은 민족이란 단 하나의 개념에 의거해 역사를 파악하는 것을 당연시해왔다. 친일행위를 개인의 악이 아니라 한 시대의 불행으로 인식해야 함에도 늦게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100년전의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비판과 심판을 일삼는 남쪽 국민들을 보면 황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의 역사를 무기화하는 전략이 남한 사회에 먹혀 가는 걸 보면 혀를 차게 한다. 햇볕정책으로 청바지와 자유가 북한에 들어가면 김정일 정권이 무너진다는 건 완전한 착각이다. 2차 대전 당시 할리우드 영화가 일본에서 인기였고, 나치조종사가 전투기 동체에 미키마우스를 그려 전장으로 간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렇다고 일본과 독일 정신이 미국에 물들지 않았다. 이것은 지금도 적용된다 북한보다 훨씬 자유로운 남한의 경우 1998년 일본의 문화수입이 자유롭게 된 뒤부터 반일감정은 더욱 증폭되었다. 바로 최상층에 있는 북한 세력이 문화운동을 전방위로 전개한 정치공작이 유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작은 쉽게 통일전선전술이라 말할수도 있지만 기존의 통일전선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통일전선은 소수파에 놓여있는 집단이 상대편의 세력을 약화 또는 고립시키기 위해 이해관계가 같은 계층이나 집단이 정치적으로 협동하는 공산당의 전통적인 전술이다. 그러나 남한에서의 전술은 사회공산주의란 이해나 동조가 없더라도 역사란 과거의 힘으로 정의를 정당화하고 사기적인 역사로 역사에 위배된 자를 배제시킴으로써 통일전선을 완성하는 것이다. 가히 업그레이드된 통일전선이다.

남한의 경우 전교조를 필두로 영화산업, 문학, 역사업자들의 입체적인 운동이 자신들도 모르게 무기가 되어 한국정신이 가질 자부심을 파괴하고 반한국 역사란 무기가 한국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잡는데 성공한 것이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아름답지 않은 것은 공산주의일 필요가 없다"고 믿으며 난 10대 중후반에 세계가 사해동포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기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마음에 문신처럼 새기고 있었다.

그런 나의 마음에 빨간불이 참으로 빨리 켜졌다. 1980년 5월 광주 사태였다. 아버지와 그의 동료들은 모여 미국이 광주를 도와주기 위해 항공모함을 끌고 온다는 얘기를 전파하고 나에게 은밀한 지령을 내렸다. 그것은 당시 20살이란 내 나이에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경찰이 사용하는 곤봉으로 대전에 사는 운동권 대학생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린치를 가하라는 것이었고 그로인해 학생이 사망해도 무관하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광주사태를 대전 등 전선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과업이라 했지만 난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당분간 집에 오지 말고 여행이나 친구 집에 있으란 말로 아들을 보호하였다. 아버지가 내 앞에서 백번도 더 되풀이 하신 "목적을 위한 수단은 그 어떤 것도 정당하다"란 말씀에는 늘 맞장구치며 머리로 수긍했지만 막상 주어진 임무에는 난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목적을 위한 모든 수단이 정당하다는 말이 괴물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광주 사태를 지금은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민주화 운동이라 명명하면 전두환의 신군부를 비난할 수 없는 일이 된다는 걸 모르는 건지 개의치 않는 것인지 사뭇 궁금하다. 민주화 운동이라면 사전에 모의하고 작당하며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건 신군부의 주장을 도와주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5.18단체는 겁 없이 민주화 운동이라 말하고 이젠 사전모의를 했다고도 언급하는 지경이 되었다. 가히 혁명의 만조기를 넘어 지배하는 양상이다.

5.18은 북한의 역사이기도 하기에 광주의 유족들은 대한민국적인 감성도 발휘되지 않는다. 5.18의 희생자는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현대사의 피해자다. 우리 정서로 이해할 수 없는 광주정신은 아직도 5.18 희생자인 군 사망자23명, 경찰 사망자4명의 위령제를 지내지도 않고 있다. 그들을 5.18희생자에 함께 포함시키지도 않고 있다. 이런 처세는 대한민국에서 결코 보편적이고 상식적이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정서가 아닌 북한정서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북한소설에 가족이 죽임을 당한 광주의 어머니에게 선량한 군인이 어머니라 부르며 사죄를 하자 어머니는 그 군인에게 돌을 던지며 "한국의 엄마는 너 같은 아들을 낳은 적이 없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창작은 철저하게 북한적이고 주체사상적 마음이지 반대진영에 대해 돌을 던지기보단 화해하려는 한국적인 마음이 아니다.

광주사태 이후 난 “아름답지 않고, 인간중심이 아닌 것은 공산주의일 필요가 없다”는 공산주의자들의 말이 너무나 공허하게 들렸다. 난 아버지와 당신 동료들의 교육으로부터 멀어져갔다. 인간본성을 무시하고 개인주의가 가지고 있는 이기주의 그 ‘초월성’을 보지 못한 마르크스로 부터 나는 자연스레 벗어나고 있었다.

대학졸업 후 조총련의 세포가 되겠다던 나의 희망은 이미 썩어버린 낙엽이 되었다. 미제 식민지란 서울의 거리가 너무나 아름답고 싱그러워져 갔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아버지에게 여러 핑계를 대며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1986년 내가 근무하던 직장에서 유럽산업시찰이 있었다. 당시 항공편이 일본국적기 JAL이라서 모스크바를 경유한다기에 나는 시찰단 모집에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아버지의 사상적 모국인 소련! 그 곳이 어떤 곳인지 모스크바 공항이라도 샅샅이 살펴보겠다는 마음에 무척이나 설레였다.

독일, 프랑스에서 산업시찰을 마치고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 했다. 트랜스퍼 시간이 길지 않아 바쁜 걸음으로 공항내부를 누비고 다녔다. 화장실에 들어간 순간 나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인터내셔널 에어포트 화장실에 화장지대신 신문지 같은 종이가 못에 꽂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혁명이란 부제의 음반을 사러 가게에 발을 들어놓았을 때 여자 점원의 불친절과 잔돈을 던지다시피 하는 행동에 내 가슴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런 나라를 사상적 조국으로 받들며 살아오신 내 아버지를 생각하니 너무나 억울했기 때문이다.

겨우 이런 것으로 소련을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큰 소리로 그를 욕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이며 일상이다. “저 높은 곳”이 아니다. 한국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모스크바 공항의 비루한 현실에 대해 말했을 때 난 태어나 가장 많은 뺨을 맞았다. 얼마나 맞았는지 내 뺨은 복어 볼떼기가 되버렸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 아버지가 내면에 지니고 계셨던 사상적인 의문과 늘 자신이 상상하던 아름다운 소련은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아들의 입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게 두려워 매몰차게 나의 뺨을 내리치시지 않았을까란 짐작에 가슴이 먹먹해 졌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지금은 아버지의 생각과 신념이 이긴 게 아닐까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버지와 그의 동료들은 88올림픽이후 노래를 부르듯이 말하였다. “공화국은 남한의 경제 성장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어떤 이기심을 부려도 통장 잔고만 늘려 나가는데 만족하는 집단은 결국 정치학습으로 무장된 사람들에게 질 수 밖에 없다. 박정희의 과오는 정치학습을 포기한거야. 결국 대한민국은 잘 익은 스테이크로 우리 차지가 된다”

1994년 유행처럼 번지는 분신 정국아래 서강대 박홍 총장의 주사파 발언에 난 내심 “이놈들 큰일 났구나”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메카시적 현상처럼 가볍게 처리하고 오히려 박홍 총장이 조롱받는 한국을 보며 망치에 맞은 것처럼 휑한 기분이었다.

그랬다. 80년대 중반이후 몸에 신나를 뿌리고, 옥상에 메달린 채 독재타도를 외치는 주사파 아이들을 지켜보며, 확고한 세상의 가치방향과 정치철학 없이 시집 장가 잘 가기위해 도서관을 전전긍긍하는 아이들이 40대 50대가 되면 과연 정치권에서 이들을 이겨낼 수 있을까란 불안을 오래전 가진적이 있다. 그 불안을 오늘날 현실로 보고 있다.

되돌릴 수 있을까?. 이런 나의 불확실한 마음이 기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 바램이 현실이 되기 위해선 자유민주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비겁해선 안된다. 여러 사람들이 담아갈 수 있게 가치 있고 비전 있는 참신한 목소리를 만들어 가야한다. 미력하나마 내 목소리를 보탤 것을 맹세한다.

표병관 (57·개인사업) pyobg@hanmail.net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