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보수가 없다...산업화 세력이었고 그것을 보수라 부른 것
지난 6ㆍ13 지방선거에서 '한국형 보수'는 죽었다
세대 간 동맹을 맺는 것만이 대한민국에서 ‘한국형 보수’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보수 회생을 이야기하면서 배리 골드워터 이름까지 나왔으면 갈 데까지 간 거다. 아시다시피 그는 미국 공화당 역사상 최악의 표차로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인물이다. 선거에서는 졌지만 배리 골드워터는 정치에서는 승리했다. 1955년 창간된 ‘내셔널 리뷰’를 통해 보수 이론이 ‘정립’되고 1960년 ‘자유를 위한 젊은 미국인’이 결성되면서 이론이 ‘운동’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 운동이 배리 골드워터와 결합되면서 정치‘세력화’ 된다. 이른바 ‘배리 골드워터의 아이들’은 1980년 레이건 보수주의 혁명의 중심 세력이 된다. 그래서 정치에서 승리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근데 이건 미국 이야기다. 그 나라와 우리는 정신세계가 완전히 다르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신이 세운 나라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종교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장로교냐, 침례교냐를 묻는 것이지 유교냐, 불교냐를 묻는 것이 아니다. 해서 미국은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기독교 국가다. 당연히 그들은 신 앞에 겸손하고 인간 이성의 불완전함과 인식론의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러한 바탕이 있었기에 미국 보수주의는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한국은 어떤가. 물론 우리에게도 천 만 기독교인이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수준으로 떨어진지 오래다. 교회의 세속화 역시 심각하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처럼 기독교인들도 정신세계는 불교, 사회생활은 유교 그리고 교회는 일요일에만 기능을 하는 삼권 분립으로 되어있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경계가 모호한 이런 처지에서 보수가 발돋움 할 정신적 토양 같은 건 대한민국에 없다.

민주주의만 이식된 게 아니다. 보수도 이식된 개념이다. 서양의 보수는 출발 자체가 귀족주의이고 이것은 전쟁 나면 저부터 말 타고 나가는 ‘자기 재산 보호’에서 기원한다. 세월이 흘러 기원이 희미해진 가운데 이들의 ‘자기 것 지키기’는 그 형식만 남아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된다. 여기에는 계층 간 갈등을 완화시키는데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이 매우 유용하다는 역사적 교훈도 한몫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전통이 있는가. 물론 자기 것 지키기 전통은 있다. 일제 개막 초기, 의병이 일어나고 독립 운동이 활발했던 곳은 대부분 곡창지대였다. 이 지역은 나중에 친일파의 온상이 된다. 일본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주자 지주들이 대거 친일 성향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냥 ‘지키기’만 있었다. 솔선수범을 보일 기회는 한 번 더 있었다. 6ㆍ25전쟁이다. 당시 미군 장성의 아들이 142명이 참전해서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다. 한국군 장성의 아들이 몇이나 그렇게 죽거나 다쳤을까. 민망해서 차마 소개를 못하겠다.

그러니까 둘 다 없다는 얘기다. 적어도 보수의 원류原流에서 보자면 한국에는 보수가 없다. 있는 것은 다만 산업화 세력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보수라고 불렀다. 기억과 체험을 공유하는 세대가 주류에서 밀려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간이 그들의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통찰하지 못했거나 인정하기 싫었기에 한국 보수는 분노했다. 잊힌 것이 서럽고 공로를 몰라줘서 야속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국의 유사 보수는 죽어갔다. 보수가 없으니 당연히 보수 정당도 없었다. 이제껏 보수 정당이라 칭해왔던 집단은 다만 성공한 자영업자 연합이었을 뿐이다. 이 정당 역시 사멸하는 것이 운명이었다. 사망시점은 대략 대통령 탄핵 그 즈음이 아니었나 싶다. 사람이 죽고 의사가 진단서를 발급해줘야 공식적으로 사망이 인정된다. 죽음은 1년 여 전이었고 지난 6ㆍ13 지방선거에서 보수가 궤멸한 것은 공식적인 사망진단서 발급이었다. 확실하게 그 죽음을 공인해준 것이다. 한국형 보수는 죽었다.

이 죽음을 어쨌거나 보수정당이라고 자처하는 자유한국당만 모른다. 혹은 모른 척 하고 싶거나. 그래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혹은 믿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다보니 내내 반복하던 짓을 또 한다. 외부에서 위원장을 모셔오는 혁신비대위원회가 그것이다. 참 이해가 안 간다. 왜 자기네 문제를 남을 불러다 해결하려 드는 걸까. 정말로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 것일까. 혹시 외부 인사가 엄청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해서 뭔가를 혁신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일시적 봉합에 불과할 뿐이다. 당내 인적 갈등이 여전한데 그 당에 미래가 있을 리 없다. 마땅히 내부에서 나와야 한다. 죽을 때까지 이념 논쟁을 벌이고(죽을 때까지는 은유가 아니라 직유다) 가치를 세우고 비전을 만들어 내야 한다. 상실된 정체성을 회복하고 어젠다를 선점해야 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다. 보수로 분류되거나 자청하는 사람 중에 혁신비대위원회가 하루라도 빨리 가동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여러분은 이미 죽은 것이다. 2년 후 총선? 절대 가망 없다. 자기들이 죽은 줄도 모르고 돌아다니는 좀비 떼로밖에 안 보일 것이다. 그 당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외면당할 것이다. 악플보다 무서운 게 무플이라고 했다. 애매하게 사망하면 죽어서도 치욕이다. 뭐든 해야 한다. 이미 죽었는데 못할 게 뭐 있나. 산업화 보수는 죽었거나 죽기 직전의 숨을 헐떡이고 있다. 시간과 동맹을 맺을 수는 없다. 가능한 것은 세대 간 동맹을 맺는 것뿐이다. 이것을 빨리 깨닫고 실천에 옮기는 것만이 ‘혹시’ 대한민국에서 ‘한국형 보수’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될까. 가능할까. 모르겠다. 아마도 20년 후 쯤의 역사가 답을 해 줄 것이다.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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