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국가를 만든다, 6.25는 참화로 포장된 축복이었다

정규재 대표 겸 주필.
정규재 대표 겸 주필.

국가의 기원은 전쟁이다. 전쟁을 거치면서 국가라는 권력체가 만들어진다. 전쟁은 피아를 구분하면서 자기 동질성을 형성케 한다. 근대 국민국가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첫 근대국가라고 할 수 있는 네덜란드부터가 그랬다. 네덜란드 독립전쟁(1568년 –1648년)은 저지대 17개주가 합스부르크 에스파냐에 대항하여 벌인 것이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법적으로 독립 승인이 이루어졌다. 그 힘이 네덜란드를 세계적 강국으로 밀어 올렸다.

미국은 영국과의 식민지 독립전쟁을 통해 역사상 그리고 세계 두 번째의 근대 국민국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지구상에 첫 자유로운 개인들의 합중국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프랑스 혁명보다 13년 빨랐고, 프랑스 혁명의 전범이 되었다. 유럽 대부분 국가는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근대국가로 변모해갔다. 독일은 보불전쟁을 통해 근대국가로서의 모습을 드러냈다. 현대 중국도 전쟁을 통해 만들어 졌고 일본도 치열한 내전을 통해 근대 국민국가를 형성했다. 고대국가든 근대국가든 전쟁이 국가를 규정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대한민국은 6.25전쟁을 통해 만들어졌다. 대한민국은 그 전쟁을 통해 세계사적 자유 국가가 되었고 낡은 것과의 결별을 통해 새로운 현대 한국인을 형성했다. 6.25전쟁은 유라시아 대륙의 공산화 물결을 처음으로 저지, 차단시킨 전쟁이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대한민국이 태어났다.

대한민국은 6.25를 통해 태어났다

대한민국은 1948년에 태어났다. 식민지에서 해방되고 3년이 지났다. 그러나 건국은 구조나 외형에서일 뿐 대한민국 영혼의 실체는 6.25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6.25전쟁은 김일성의 통일전쟁이라는 내전적 측면과 구소련의 공산주의 수출이라는 세계사적 맥락을 모두 동시에 갖는 전쟁이었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한반도에서 격돌했다. 내전이면서 동시에 국제전이었다. 바로 이것에 6.25의 역사적 성격이 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민주주의는 곧, 공산주의를 의미했다. 구소련의 1917년 혁명 이후 동유럽 전부와 아시아 신생국 거의 전부는 공산주의적 열풍에 들떠 있었다. 자유는 사라지고 세계가 사회주의적 열기에 들떠 있었다. 그게 20세기였다. 민주주의는 아무나 하는 것이,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모스크바는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정신적 고향같은 것이었다. 미국 국무부에서 조차 엘저 히스같은 구소련의 간첩들이 들끓었다.

중요한 것은 이념의 좌우를 따라 남과 북의 구분을 확실하게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북한에서는 공산주의 그리고 곧이어 해방 이전기 사회구조였던 봉건제가 부활했다.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공산독재 국가가 만들어졌다. 초기에는 가부장적 공산주의라는 외형을 보였지만 곧 조선시대를 방불케 하는 중세 봉건적 국가라는 점이 드러나고 말았다.

대한민국은 올바른 노선을 행해 나아갔다. 전쟁이 만들어낸 결과를 충분히 향유한 것은 남쪽이었다. 전쟁은 대한민국이 재출발 할 수 있는 토대를 확실하게 구축했다. 그 위에 대한민국이 날아올랐다.

대한민국의 성공에 대한 기존의 주장들

대한민국이 이토록 짧은 시간에 소득 3만 달러의 선진 문명국으로 성공한 것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연구들이 있었다. 유능한 정부의 잘 정리된 경제개발계획도 그런 대한민국 성공 원인론의 하나다. 일본의 덜 잔혹한 식민제도의 이식을 말하는 논변들도 많다. 특히 박정희 경제개발 성공론은 △불균형 성장이론 △미국 등의 효과적인 지원 △세계적 호황이라는 우연적 요소 △기업가들의 열기 △제조업 육성 전략 △수출주도성장 이론 △ 대기업 중심의 발전전략을 지목하곤 한다. 박정희의 개발 전략이 다른 개도국 개발전략과 다른 점을 지적하는 주장도 있다. 대부분 개벌경제가 국가주도의 전략을 유지했던 반면 박정희는 민간주도 기업주도의 전략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유권 체제의 창설과 더불어 한국을 역동적인 성장경제로 만든 주된 요인이라는 것이다. 모두 맞는 설명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언가 다른 요인이 있어야 한다. 개별적 성공요인 전체를 가능하게 만든 그 무언가의 전체적인 기초가 있어야 한다. 그 전면적인 기초 작업이 바로 6.25다.

대한민국이 리셋 되었다

6.25.전쟁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 변화를 한국에 가져 왔다. 가장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이 전쟁과 전쟁에 따른 시간적 공간적 이산으로 한국은 “절대로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 확실해 졌다. 사회는 전면전의 휴유증으로 사실상 완전히 뿌리 뽑히고 해체되었다. 모두가 고향을 떠났고 낮선 자들과 새로운 사회를 이루어야 했다. 기존의 계급적 질서와 인간관계는 낡은 농촌적 경제생활과 더불어 모두 무너졌다.

전쟁은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사회적 조건을 초기화했다. 한국 사회 전체가 낡은 이익관계에서 벗어나 리셋된 것이다. 모두가 기득권에서 벗어나 말 그대로 신생 대한민국의 출발선에 섰다. 이것이 폭발하는 사회적 경쟁과 활력을 만들어 냈다. 누구라도 이제 실력만 있으면 출세하는 그런 사회였고 누구라도 완전히 동일한 조건에서 새 출발했다. 지주의 아들도 없었고 양반의 자식도 없었다. 모두가 동일했다. 이제 자기하기 나름인 그런 기득권 제로의 사회였다. 모두가 열심히 뛰었다. 모두가 굶었기 때문에 모두가 치열했다.

공산주의를 패배시켰다

공산주의는 질병이었다. 1917년 이후 후진국들은 거의 모두라 할 만큼 공산주의에 빠져들었다. 구 소련의 주변국들은 대부분 위성국 체제로 개편되었다. 공산주의는 선진공업국이 아닌 후진 농업적 사회에서 더 잘 먹혀들었다. 농업이야말로 공동생산의 유혹이 구조적으로 넘실댔다. 동독에서부터 아프리카 아시아 후진국들에게까지 공산주의는 하나의 등불이요 미래처럼 인식되었다. 레닌 혁명 이후 수십개 공산주의 국가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쳐 확산되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동북아의 갓 독립한 한반도가 다음 차례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저지되었다. 아시아 동북아 끝에서 오직 대한민국에서는 공산국가 수립이 거부되었다. 북한 지역에는 유사 공산주의 국가가 건설되었다. 공산주의 국가는 항상 내전적 상황, 혹은 인종청소나 혹은 계급투쟁이 항구화할 수밖에 없다. 캄보디아와 중국의 문화혁명이 그런 정황을 잘 보여준다. 아니라면 공산주의는 후진국에나 어울리는 가부장적 세계의 다른 이름이다. 북한이 그런 경우다. 공산주의 국가는 끊임없이 내부의 적을 만들어 낸다. 사회불안은 구조화하고 갈등국가는 태어난다. 생산성은 악화되고 낮은 생산성은 갈등을 증폭시킨다. 내전이 터지고 사회는 점차 퇴행적 사회로 치닫는다.

대한민국은 다행히도 그런 저개발 저생산성 정치 갈등의 딜레마에서 벗어났다. 구 소련은 김일성을 통해 대한민국을 적화하기를 희망했지만 침략은 좌절되었다. 국제적으로나 내전적 상황에서나 침략과 적화는 저지되었다. 대한민국이 6.25 당시 적화되지 않은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기적은 몇 번에 걸쳐 대한민국을 구해냈다.

자유를 찾아 월남한 사람들이 넘쳐났다

식민지 해방은 일제 치하에서 해외로 나갔던 수많은 한국인을 귀환시켰다. 이 귀한 인구의 대부분은 자유로운 남쪽 사회로 돌아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헌의회 개원식에서 월남 동포가 450만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월남 동포의 이 숫자는 당시 북한 인구가 926만명 수준이었음을 생각하면 다소의 과장이 포함되어 있다. 아마 해외에서 돌아온 인구 전부를 합친 숫자일 것이다. 이북오도청은 6.15 이전 월남자를 350만명, 전쟁 중 월남자를 164만 명으로 보고 있다. 이 역시 다소는 과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울대 권태환 교수는 전쟁 전 월남자가 74만 명, 전쟁중 월남자가 65만명, 도합 139만명으로 추정한다. 좌익계 강정구는 월남자 84만명, 월북자 30~40만명으로 추정한다. 김일성 체제가 들어선 이후 140만 명이 월남하고, 10만 명 정도의 인구가 월북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비교적 합리적이다. 그렇게 거대 인구가 올라가고 내려왔다. 김일성의 등장과 전쟁의 와중에 북한에서 거대한 인구가 내려왔다. 상당수는 지식계급, 유산자, 기독교도 들이었다. 특히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이후 남한에서 보수교단을 설립함으로써 한국의 기독교를 리드해갔다.

해방후 북한에서는 기독교도들과 사회주의자 사이에서 치열한 갈등이 일어났다. 이들 기독교인들은 대거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탈출했다. 해방 당시 전체 개신교 신자의 60%에 해당하는 20여만 명 이상의 신자가 북한에 살았고 이들은 김일성과 대척점에서 종교의 자유를 놓고 싸웠다. 이들은 어떤 면에서건 개화된 인구들이었고 서구의 세계관에 익숙했으며 근로를 노예노동 아닌 신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기에 적극 수용하는 그런 신인류였다. 이들이 대한민국 거리에 넘쳐났다. 거대한 이민 인구가 낡은 대륙에서 미국 뉴욕의 거리로 쏟아져 들어오는 그런 이민의 국가 미국에서나 나타나는 그런 광경이었다.

이같은 인구의 거대한 이동은 그 자체로 북한의 인구격감을 만들어 냈다. 북한에서는 인구의 절멸 현상이 아타났다. 전체 인구의 거의 15% 내지 20%에 가까운 인구가 남한으로 탈출한 것이다. 그것도 지식인 자산가 기독교인이라는 근대화된 인간 유형의 대탈출이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날 북한 사회의 퇴행적 현상은 바로 인재의 기근, 인구의 격감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사람만큼 사회의 성장발전에 필수적인 것은 없다. 아니 사람이 바로 발전 그 자체다. 대한민국엔 지력의 폭발이 북한에는 지력의 고갈이 나타났다. 이것이 동족이던 두 나라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차이였다.

도시가 만들어 졌다

도시는 한국에서 저주의 대상으로 치부되곤 한다. 시인묵객은 입만 열면 도시의 무자비한 속성, 반인간성, 오염과 악취, 번잡함과 혼란을 저주하고 그 반대의 것, 농촌적 풍경과 한가한 시골의 정경을 노래하는데 결코 주저하는 법이 없다. 요는 도시는 시끄럽고 오염되어 있으며 인간적인 맛이라고는 없는 곳이어서 바람직한 인간이라면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살아야 하는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도시는 그런 곳이 아니다. 도시에는 우선 자유가 있다. 권위로 쌓아올린 낡은 것들의 문턱이 낮다. 도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각인의 목표를 추구하면서 각자 자기의 삶을 열심히 꾸려간다. 도시에는 무엇보다 직업이 있기 때문에 산업의 발달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도시에서 일어난다. 아니 시골도 산업이 발달하면 바로 도시로 바뀌고 만다. 도시는 그 자체로 소비시장이며 생산지이며 소비자와 근로자를 이어주고 근로자와 기업가를 연결해 준다. 도시 없이는 산업이 형성되지 않으며 도시가 있어야만 비로소 산업이 돌아가면서 문명적 전환이 만들어진다. 시골에는 지식이 없다. 지식은 교환을 통해 퍼져나가는데 이것이 가능한 곳은 바로 도시요 도회지다. 도시에서는 분업이 만들어 지고 분업은 그 분업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직업을 만들어 낸다. 다시 말해 산업 발달과 사회발전은 도시의 형성과 더불어 나타나는 현상이지 결코 그 반대일 수가 없다. 6.25 전쟁은 거대한 부유인구를 만들어 내면서 도시를 형성하게 만들었다. 부산의 국제시장을 비롯해 주요 도시들은 6.25를 계기로 팽창해 나갔다. 도시화율은 1945년만해도 14.5%였으나 1970년에는 49.8%로 급격하게 늘어났고 전쟁이 그 기폭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2000년대가 되면 한국의 도시화율은 90%를 넘어서게 된다.

이호철이라는 소설가는 1966년 당시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재미있는 제목의 소설을 썼다. 번잡하고 비인간적인 그런 매정한 서울의 당시 인구는 360만명에 불과했다. 이호철은 보통의 시인묵객이 갖고 있던 생각의 한계를 잘 보여준 셈이었다.

냉전 시대의 적자가 되었다

6.25는 그 자체로 냉전시대를 만들어 냈다. 6.25를 통해 지구촌은 냉전시대로 접어들었고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세계는 양분되었다. 대한민국은 바로 그 역사적 계기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진영의 적자로 태어났다. 미국 일본의 산업 발전의 궤적을 따라 한국은 착실하게 산업화의 길을 따라 나섰다. 미국은 시장을 열어주었고 가난하고 굶주린 한국인들과 어린이들을 구해냈으며 그들이 자력으로 산업을 일구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원조를 주었다. 다행히 중국은 문화혁명이라는 내전적 정치 갈등의 와중이었다. 그것이 10년이라는 실로 중요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승만에 이어 박정희라는 좋은 지도자를 갖게 된 것도 기적과 행운이었다. 미국은 냉전시대의 자식으로 태어난 대한민국을 잘 키워냈다. 그들은 냉전의 적자였던 대한민국을 잘 키워야 했다. 전쟁을 불사하며 살려낸 대한민국이 실패국가로 된다는 것은 자유진영으로서는 큰 손실이었다. 독일 광부 간호사의 수출은 그런 본보기였고 월남전도 그런 과정에서 대한민국을 키우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

정치적 안정

얼핏 보면 대한민국은 정치적 불안을 잉태하고 있는 나라처럼 보였다. 그러나 6.25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이 소탕되거나 북한으로 넘어감으로써 남한은 비교적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된 사회였다. 박정희는 18년 집권 기간 내내 그 어떤 선거에서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박정희 개발독재의 필연적 결과였던 유신 헌법안에 대해서도 국민들은 전체 유효투표의 80%가 넘는 절대적 지지를 보냈다. 지금은 하나의 사회적 부작용 혹은 반작용으로까지 인식되는 빨갱이라는 언오는 일종의 정치적 부적과도 같이 마법을 발휘했다. 김일성과 6.25전쟁에 데인 국민들은 좌익 선동에는 아주 강한 백신처방을 받은 셈이었다. 그것이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다. 나중에 이 소위 위장된 ‘안정’은 그것에 상응하는 반동 혹은 반작용을 초래했다. 우리가 그것을 무엇으로 부르든 산업화가 숨가쁘게 달려가던 과정에서 한국은 유례없는 정치적 안정을 자랑했다. 일각에서 말하는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은 일부 지식층에 국한된 운동이었다. 그것이 대중적 차원에서 부상한 것은 80년대 들어서라고 봐야할 것이다. 반 박정희 민주화 운동은 일정한 계층 제한적인 지식인 운동에 그쳤다. 바로 그것이 한국의 산업화를 만들어 냈다. 만일 박정희에게 지금과 같은 극렬한 정치적 반대가 형성되었더라면 박정희의 경제개발은 너무도 허망하게 좌절되고 말았을 것이다.

기적의 결과

6.25는 한미동맹 체제를 만들어 냈다. 군부지도 그룹을 형성했고 근대의식이 높았던 기독교 인구를 남한에 밀어내렸고 도시를 만들어 내면서 산업화 인력풀을 제공했다. 냉정의 적자로 자리를 잡았고 친미 국가로서 물질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거대한 이익을 향유했다. 이런 점들이 이후 박정희 개발전략이 작동하는 기초를 구축했던 것이다. 지금 한국의 성공은 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나타난 기적의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 6.25를 맞아 우리가 기억해야할 엄연한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6.25를 동족상잔으로서만 기억하고 있다. 6.25를 마치 존재해서는 안 될 저주의 굿판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틀렸다. 6.25의 승리 위에서 대한민국은 비로소 일어섰던 것이다. 이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것에서 패배하였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었겠냐고? 그것에 대한 답을 알려면 지금의 북한을 보면 된다. 아니라면 지금의 캄보디아가 되어 있었을 것에 틀림없다. 아니라면 베트남은 어떨까.

대한민국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자유와 인권, 개방성, 세계로 열린 국가로서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상처를 입거나 헤어지거나 돌아가신 분들에게 전쟁은 너무도 아픈 것이었지만 살아남은 자들에게 전쟁은 크나큰 축복이었던 것이다.

정규재 대표 겸 주필 jkj@pennmike.com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