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100여년 전 격동하는 동아시아 근대사에서 청국, 일본, 조선의 위대한 '재상'으로서 살았던 이홍장, 이토 히로부미, 김홍집.
필자는 비교문화사, 비교인물론의 시각에서 이 '3재상'을 비교하는 일은 당시 3국의 '근대화'를 가늠하는 상징적인 작업이라 생각한다. 솔직히 고백하여 치우치치 않은 각도에서 필자는 이 3인물에 대해 동시에 다 동일 수준의 애착과 숭경심을 갖고 있다고 자부한다.
왕년의 인물은 한 가닥 연기로 사라지고, 마시던 오차물도 다 마르고 이제 남은 것은 그들이 남긴 글씨 족자 뿐인가 한다. 필자가 현재 소장하고 있는 3재상의 휘호한 진필 글씨에서 그들의 체온과 담담한 숨결을 느끼는 듯 하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 하니, 그들이 나긴 글씨는 그 인격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홍장은 침착하고 온건한 필체이고 김홍립은 성격같이 두각이 없는 표준적 개서체다. 유독 이토의 서는 자유분방하면서도 유려한 서예가의 달필에 이르고 있다. 이들의 글씨처럼 그들도 격동기의 근대사의 한복판에서 정치적 사명을 갖고 노력하며 살았다는 흔적이라도 직감할 수 있어 기껍기만 하다.

3자 중에서도 이홍장(1823-1901)은 제일 장수를 누렸으며 자손만당(子孫滿堂)과 넉넉한 재부와 거액의 금전을 획득하여 78세의 천수를 누렸으니 개인적으로는 행복한 삶이었으리라. 김홍집(1942-1896)은 54세 단명으로 그것도 동족에게 참살당하는 비명을 맞게 되니 비운의 재상이었다. 이토(1841-1909)는 68세로 일본을 근대화시킨 아버지로서 명예외 최고 지위를 누리다가 안중근에게 암살당했으니, 죽음마저도 비장했다.

이홍장은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중국의 사대부 출신이다. 이씨와 마찬가지로 조정의 한족 관료들은 죄다 과거를 통해 발탁, 승진되어 온 것이므로 문인적인 글과 도덕으로 현실을 보고 전통적 세계관은 화이질서로 충만돼 있었다.

이홍장과 이토를 최초로 비교한 인물은 거물 지식인 양계초이다. 1901년 12월에 쓴 그의 '이홍장전기'에서 초년의 풍상을 겪은 데는 이홍장이 이토보다 한 수 위이고, 정치적 식견과 처한 환경 면에서는 이토가 더 좋았다.

'근대국가' '국민국가'라는 근대 최대의 과제에서 평가 비교하여 이홍장은 "국민의 원리를 몰랐고 세계 대세에 통하지 못했으며 정치체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홍장은 "양무만 알았고 국민은 몰랐으며 병사(兵事)엔 능통했지만 민사(民事)에는 몰랐으며 외교는 알았으나 내치는 잘 몰랐다. 그리고 조정만 알았지 국민을 몰랐다." 양계초의 분석은 투철했는바, 이홍장의 장단점을 일목요연하게 끄집어냈다.

이토에 비해 이홍장은 근대국가, 국민의식이 결여됐으며 이것이 바로 전체 청말 시기 관료들의 약점이었으며 전 중국 사회가 안고 있던 약점이었다. 당시의 조선에도 일본에 비해 국민국사사상이 결여됐으며, 중한이 일본의 근대화에 뒤진 하나의 큰 이유도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경력에서 나타난 양상을 비교하면 이토의 지식, 의식구조 및 세계적 시야는 이홍장보다 한참 앞섰다. 한학, 영어에 능하고 영국 유학을 통해 서양 사회문화를 직접 체험했으며, 국제적 시야와 지식은 그로 하여금 정치제도 개혁에 착수하게 했다.

이홍장의 '장년 이후 학문을 멀리한 것'에 비해 이토는 일본 정치가들 중에서도 발군의 독서가였으며 출근하는 마차 안에서도 외국책을 탐독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홍장보다 18세 연하인 이토는 처음 서양을 방문한 것은 이씨보다 33년이나 일렀고, 영국 유학 후 40여년 간 4차례나 구미서양세계를 돌았으며 4차례나 중국 땅을 밟았다. 또한 일본 헌법 제정을 위해 구미에서 고찰 체험이 5년 남짓이나 된다.

이런 서양 체험은 이토의 '문명개화'가 이홍장보다 앞서고 풍부했으며 세계적 통찰력과 세계 이해에서 이홍장을 아득히 앞서 달렸다.

또 하나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사항은 이홍장은 청 왕조의 '신하'로서 청 왕조의 일원으로 왕조 고수를 고집한 한계는 일본의 입헌군주제 속의 재상의 정치적 활동 진폭을 넘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국민국가로서의 일본이 국민국가가 아닌 왕조의 청국보다 정치가들이 개혁을 할 수 있는 생태환경이 월등하고 우월했던 것이다.

조선의 정치 생태 환경도 청국과 다름 없었다. 이런 왕조 아래서 4차례나 총리를 맡은 위대한 정치가 김홍집에겐 조선 왕조를 보존하는 전제 하에서의 개혁은 그 자체로 한계가 있었다. 김홍집은 조선의 전통적 사대부이며 청국을 잘 따랐기에 마건충에게서 '조선의 일인자' 인물이란 평까지 들었다. 그가 그 뒤 청나라의 책봉에서 탈피하여 일본이 조선의 미래와 직결된 상대였다는 점을 인식하자 친일 쪽으로 편파하게 된다. 그러나 성격상 그는 여전히 온건한 근대화 개혁가였으며, 국왕 고종의 왕조 아래서 근대화 개혁은 실효가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 늘 사대주의로 대국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면서 내부의 싸움에 소모전으로 자신을 망친 교훈은 조선 말기가 잘 시사해주고 있다. 재상 김홍집의 죽음도 결국 내부 군중들에 의해 구타당한 것이라 한결 더 슬퍼진다. 그뒤 조선은 개혁에 실패하고 일본에 의해 망국한다. 자주성이 결여된 조선의 비극은 한층 더 슬프고 그 교훈 또한 뼈저리다.

이홍장,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김홍집. 동시대를 살다간 이 3대 재상의 양상은 결국 당시 3국의 양상을 그대로 상징적으로 표징한다. 100년이 지난 오늘 이 3대 재상의 인생은 우리에게 역사적 가능성과 함께 그 뼈아픈 교훈도 남겨주고 있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현 일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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