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2년 6월 9일 –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 탄생

 러시아의 거의 전 영토는 240년 동안이나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그 영향으로 표트르 1세  이전의 러시아는 아시아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었고 이미 근대에 접어든 유럽 여러 나라에 비해 여전히 중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표트르 1세는 러시아를 선진 유럽과 같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우리에게 표트르 대제라고 잘 알려진 표트르 1세는, 어린 시절 왕위 계승 문제 때문에 불안한 삶을 살았다. 실권을 쥐고 있던 이복누이 소피아는 표트르를 제거할 시기를 엿보고 있었고 어린 표트르는 모스크바 근교의 왕실 영지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당시 섭정을 하던 누이 소피아는 표트르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즐겁게 놀 수 있도록 크레믈 병기고의 무기를 내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함께 전쟁 놀이를 하던 외국인 친구들을 통해 표트르는 세상이 넓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러시아의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무렵 표트르는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낡은 배 한 척을 수리하여 실제로 강에 띄우고 운항까지 했다. 이 장난 같은 사건이 훗날 그가 러시아 함대를 만드는 데 주력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배를 만드는 어린 표트르의 모습을 담은 동상

 

 당시 러시아는 북쪽 발틱해를 장악한 스웨덴과 남쪽 흑해를 주름잡던 오스만튀르크, 두 강대국을 상대해야 했다. 오스만튀르크는 러시아 혼자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강한 상대였다. 이에 표트르는 1697년 250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유럽으로 떠났다. 선진 문물을 직접 배우는 한편 오스만튀르크에 함께 대항할 세력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유럽으로 간 표트르는 군사 조직, 성벽 축조, 석조 건축, 화폐 발행, 인쇄술, 해부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보였다. 그중 그가 가장 흥미로워했던 것은 배 만드는 일이었다. 영국에서는 의회에서 회의 과정 지켜보고 해군을 사열하기도 했지만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실용적인 서구 문물이었다. 15개월 후인 1698년 러시아로 돌아온 표트르 1세는 서유럽식 근대화를 통해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다양하고 폭넓은 개혁에 착수했다.  

표트르 1세의 말발굽 아래 밟힌 뱀은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을 상징한다.

 

 당시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열린 유일한 항구 아르한겔스크는 북위 64도에 위치해 얼어 있는 날이 많았다. 또 스칸디나비아반도를 북쪽으로 돌아가는 험한 항로를 지나야 했다. 그래서 표트르 1세는 유럽과 가까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새 도시를 만들려고 했다. 1700년 경부터 시작된 신도시 건설은 표트르 1세가 세상을 떠난 후까지도 계속되었다. 짧은 시간에 도시 하나를 통째로, 그것도 유럽의 모든 아름다운 도시와 건물을 벤치마킹하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를 만들려니 엄청난 돈과 자재와 인력이 필요했다. 거기다 500년 전통의 수도 모스크바를 버리고 천도까지 했으니 반대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표트르 1세는 수많은 난관을 헤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고 그 도시를 기어이 러시아 제국의 수도로 만들었다. 그리고 러시아를 유럽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무릎이 반질반질해진 페트로파블롭스키 요새의 표트로 1세 동상

 

 표트르 1세는 많은 개혁을 이뤘지만 그 이면에는 서민의 희생이라는 엄청난 그늘이 있었다. 세금을 내고 군인으로 차출되며 도시 건설의 노동 등 각종 부역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농민과 가난한 도시민이었다. 황제는 이들을 쉽게 부리고 세금을 쉽게 걷기 위해 농민을 토지에 묶는 제도, 즉 농노제를 실시했다. 
 또 1724년 한 해만 빼고 통치 기간 내내 전쟁을 치르면서 수많은 도시민과 농민이 징집됐다. 15세부터 20세까지였던 징집 연령은 1711년에는 50세까지로 늘어났다. 전쟁터에 가면 죽거나 불구가 되는 사람이 많았고 멀쩡하게 살아 돌아와도 생업에는 엄청난 지장을 받았다. 함대 건설, 도시 건설, 운하 건설 현장도 서민들에게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20년 넘는 스웨덴과의 전쟁으로 4만 명이 죽었는데 도시 건설로는 7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저항하는 봉기도 많았지만 잔혹한 진압에 모두 실패했다. 그나마 1709년 북방전쟁에서 러시아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봉기가 사라졌다. 표트르 1세의 권위에 눌려 더 이상의 저항이 어려웠던 것이다.    
 러시아를 유럽 제국으로 우뚝 서게 한 황제. 그러나 그 과정에 숱한 죽음과 희생을 강요했던 황제. 이 두 얼굴을 가진 표트르 1세에 대해 러시아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물론 오늘의 러시아가 중요하지 300년 전 황제에 대한 평가 자체가 의미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먼저 구축된 페트로파블롭스키 요새에 있는 표트로 1세 동상은 그에 대한 평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유난히 긴 다리에 조금은 기묘한 모습으로 높은 의자에 설치되어 있는 이 동상의 무릎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의 손길로 동상의 무릎은 반들반들하게 윤이 난다. 희대의 폭군이라고 여긴다면 그의 동상을 만져서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생겼을까? 어쨌든 19세기 어느 러시아 지식인의 말을 통해 표트르 1세가 유럽 국가로서의 러시아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가늠은 할 수 있다.  

 “공정히 말하자면 우리는 러시아를 표트르의 나라라고 불러야 하며 러시아 사람은 표트르 사람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황인희 작가(다상량인문학당 대표·역사칼럼니스트)/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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