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전개된 치열한 투쟁 지금까지 이어져
1987년 체제는 5.18의 결과물, 나아가 박정희 시스템 극복의 결과물
신군부의 역사적 역할? 5공화국은 포스트-박정희 시스템으로 가는 과도기
광주만의 5.18 아니라 대한민국의 5.18로 업그레이드 되려면 5.18의 타락과 비극도 짚어야
대한민국의 호남화...광주와 호남은 역사적 책임 피할 수 없어
尹정부는 5.18이 좌파의 이념적 무기가 된 현실 고루 직시해야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5.18은 올해로 43주년을 맞았다. 1987년 6공화국 성립 이후 역대 정권이 모두 5.18을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했지만, 여전히 5.18은 뜨거운 이슈이다. 좌우 양 진영에서 5.18을 바라보는 시각은 말 그대로 극과 극을 달린다. 국민적 합의라는 점에서 보자면 5.18은 여전히 미완성 상태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1980년 5월 광주에서 전개됐던 치열한 투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5.18의 가장 절실한 과제가 광주와 호남만의 5.18이 아닌 전국민의 5.18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5.18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 이슈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한 헌법전문 수록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5.18의 의미를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1987년 체제는 5.18의 결과물이다. 1980년대 전체를 관통했던 학생운동 등 반체제 민주화 운동의 구호에서 5.18은 단 한번도 빠진 적이 없다. 그 민주화 운동의 정치적 귀결이 1987년의 민주화 대투쟁이자 6.29선언이고 6공화국의 성립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1980년 5.18은 진압된 적이 없다. 오히려 1980년대 내내 광주 밖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거쳤다고 봐야 한다. 신군부는 군사적으로는 5.18을 진압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철저하게 패배했다.

5.18 당시 광주시민들이 외친 구호는 '계엄해제',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김일성은 오판 말라' 등이었다. 광주시민들은 또 태극기를 들고 시위에 나섰으며 애국가를 불렀다. 거동 수상자를 붙잡아 대치 중이던 계엄군에 넘기기도 했다. 10여일 동안 일종의 해방구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살인 강도 절도 강간 등 강력 범죄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5.18은 대한민국 헌정질서 수호를 위한 투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구호와 투쟁 양상 등에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기본 질서에 부합하는 투쟁이었고 바로 이런 성격으로 인해 이후 5.18이 대한민국 헌정질서 안으로 녹아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5.18의 이런 본질을 객관적으로 입증해주는 것이 5.18의 직접적인 결과물인 1987년 체제의 성격이다.

1987년 체제는 박정희 시스템 극복의 결과물이다. 박정희 시스템은 급속한 산업화를 위해 중앙정부가 민간부문까지 포함해 국가 전체의 자원 배분권을 행사했고, 그 효율화를 위해 선택과 집중 전략을 구사했다. 이는 산업화의 양지와 음지를 극명하게 나누었고 그에 따른 불만도 심화됐다. 군부 엘리트가 주도한 강권 통치는 이런 불만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장치였다. 권위주의와 경직되고 폐쇄적인 분위기가 박정희 시스템의 이미지였다.

부마항쟁과 10.26, 서울의 봄, 5.18은 박정희 시스템을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 1987년 체제의 성립 이후 사회는 유연화 개방화 투명화됐다. 사회 각 분야에서 짓눌렸던 요구가 분출됐고 전문가 집단의 역할이 커졌다. 경찰 등의 폭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으며 대민부서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도 개선됐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직접 자신들의 대표자를 뽑는 대통령 직선제를 통해 주권재민 원칙이 확인됐다.

1987년 체제의 안정성은 6공화국이 대한민국 역대 공화국 가운데 가장 긴 수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1987년 체제는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대한민국의 정체성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1987년 체제의 유연화 개방화 투명화는 한국 사회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다. 경제의 고부가가치화 등 체질 개선도 그 결과물이라고 봐야 한다.

우파 일부에서는 무장투쟁 양상 등을 이유로 5.18이 민주화운동이 아닌 폭동이라고 주장한다. 북한군 투입설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무장투쟁은 4.19 당시에도 존재했다. 무엇보다 민주화운동과 유혈 투쟁은 상호 배척하는 관계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것은 빈말이 아니다. 북한군 투입설은 믿을만한 근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지한 논의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이 맞다.

5.18을 부인하면 그 결과물인 1987년 체제도 부인하게 된다. 이는 결국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간다. 결과적으로 민주주의 부재, 인권 부재의 북한이나 중국과의 차별성을 스스로 부정하게 된다.

이 문제는 민주화와 건국, 산업화를 별개의 가치로 분리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보다 상위 범주인 근대화의 하위 범주로서 건국-산업화-민주화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게 긴밀하게 상호 보완하는 가치들로 이해해야 한다. 즉,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가 상호 긴밀하게 보완하고 합력하여 근대화라는 가치를 달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접근할 때 대한민국 역사가 갖는 총체적인 긍정성을 담아낼 수 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5.18 당시 악역을 맡았던 신군부의 역사적 역할이다. 이 문제는 5공화국이 실제 수행한 정책과 결과 등을 근거로 평가하는 것이 맞다. 5공화국은 5.18로 인해 학살 주역 등의 이미지를 덮어쓰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단일 정부 사상 가장 폭넓게 유연화 개방화 투명화 정책을 추진했다. 야간통행금지를 없앴고 중고등학생 두발 및 교복 자율화를 시행했다. 컬러TV 방송과 함께 프로 스포츠 시대를 개막했다.

군부정권 시대의 대표적인 악법인 연좌제도 철폐했다. 경제 개방을 강화했으며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을 통해 현재 대한민국의 먹거리를 만들었다. 5대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을 통해 이후 만개하게 되는 정보화의 씨앗을 뿌렸다. 이것들은 87체제의 유연화 개방화 투명화의 성과로 직결되는 업적들이다. 그들 나름대로 포스트 박정희 시스템의 성과를 만든 것이다. 1987년의 직선제 개헌과 평화적인 정권 교체는 5공화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성과의 축적 위에서 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5공화국은 포스트 박정희 시스템으로 가는 과도기 즉 변화관리 체제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5.18로 충돌했던 시민군과 신군부는 궁극적으로 동일한 역사적 지향점을 갖는다고 평가해도 무리가 아니다. 역사적 지향점은 같되 속도와 방법론의 차이였다고 본다. 그래서 5.18은 광주시민과 진압군 모두가 상대를 용납하는 화해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광주와 호남만의 5.18이 아니라 전국민의 5.18, 대한민국의 5.18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결단이다. 5.18은 어느 한 진영만의 승리로 귀결될 수는 없다.

5.18의 한계도 짚어야 한다. 5.18은 대한민국 헌정질서 수호를 위한 투쟁이었지만 1987년 체제의 성립 이후 심각한 퇴행의 과정을 거쳐왔다. 좌파의 상징자산으로 전락한 것이다. 5.18은 이제 반(反)대한민국 좌파의 가치를 대변하는 사건이 됐다. 5.18 행사가 좌파 진영의 축제가 되는 것,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등 비극과의 접맥을 통해 5.18을 대한민국의 비극의 진앙지로 만드는 행동이 그 증거이다.

5.18의 상징자산을 보유한 호남이 좌파의 정치적 숙주, 정치적 가두리 양식장으로 전락한 것이 5.18의 타락과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위헌 정당으로 해산된 통합진보당의 후예인 진보당의 강성희를 전주을 재선거를 통해 국회로 보내준 것, 김일성을 존경한다고 했던 것으로 알려진 전대협 의장 출신 송갑석을 광주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키워준 것 등이 그런 현상의 일환이다.

북한과 중국공산당에 충성한 공산주의 음악가 정율성을 기념하는 거리를 광주 시내에 만든 것도 마찬가지다. 광주와 호남은 전국에서 가장 좌편향 및 종북친중 성향이 강하다. 광주가 이런 정치적 편향을 보이고 있는데, 광주의 상징이랄 수 있는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넣자는 데 대해서 많은 시민들이 분노와 거부감을 표출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봐야 한다. 5.18의 북한군 투입설 등도 광주의 이런 좌편향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5.18은 또 호남이 반기업 반시장 기조를 유지하면서 경제적 과실을 챙겨오는 무기로 악용되고 있다. 반시장 반기업 정서는 기업의 투자를 가로막고 이는 다시 경제적 낙후와 일자리 소멸로 이어진다. 이런 상태에서 호남의 선택은 정해져 있다. 호남은 주사파와 함께 1987년 체제의 정치적 오너이다. 이런 정치적 위상을 활용해 정치성 프로젝트의 예산을 따오는 것이다. 이것은 5.18의 핏값이다. 하지만 시장 논리와 무관하게 기획한 프로젝트가 성공하기는 어렵다. 아시아문화전당, 광주형 일자리, 광주 비엔날레, 한전공대 등이 대표적이다. AI 단지나 반도체 등도 비슷한 경로를 밟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광주는 다시 정부의 추가 지원을 요구하고 그것조차 한계에 부딪히면 시장 논리를 결여한 또 다른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이런 악순환이 1987년 체제 내내 진행돼왔다. 광주가 5.18로 이익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스스로 경제 체질을 약화시키고 이는 구조적인 저개발과 경제적 낙후를 초래하고 있다. 5.18로 정치적 승자의 위치에 오른 광주가 승자의 저주에 시달리는 셈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광주의 반기업 반시장 정서와 논리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적 승리자인 호남의 위상으로 인해 생긴 현상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호남화라고 불러야 한다. 광주와 호남은 여기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5.18에 대한 전국민의 평가는 현재 광주와 호남이 보이는 정치적 태도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1987년 체제의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이 체제가 좌파 특히 주사파의 정치적 승리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이런 1987년 체제의 한계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광주가 5.18을 활용하는 방식이 큰 영향을 끼쳤다.

5.18은 1987년 체제의 산파이자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하지만 5.18처벌법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인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정면에서 거부하는 내용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대힌민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5.18의 상징성은 무너지고 있다. 5.18이 좌파의 상징자산이라는 위상을 벗어던지지 않으면 5.18도 좌파와 함께 그 역사적으로 추락할 것이다. 이는 역사적 필연이다.

5.18의 역사적 의미와 정당성은 인정해야 하지만, 현재 5.18이 좌파의 이념적 무기가 된 현실도 자각해야 한다. 5.18이 주사파의 반(反)대한민국 투쟁의 무기가 된 상황에서 헌법전문 수록은 용납할 수 없다. 윤석열 정부는 5.18의 주사파와의 절연이 이뤄져야 헌법전문 수록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명백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前 국민의힘 광주 서구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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