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병합은 일본 정부의 구상대로 너무나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

영국이 무굴제국을 무너뜨리고 인도를 식민지로 삼는데 100년 넘게 걸렸다. 프랑스는 조선보다 인구가 약간 적었던 안남(베트남)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수십 년 세월이 필요했다. 1910년 8월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이 발표되자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인구 2,000만에 가까운 인구와 스스로 ‘제국’을 선포했던 500여 년 역사를 이어온 왕조가 총 한 방 쏴보지 못하고 조약에 의해 주권을 양도하여 남의 나라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일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의 측근이었던 고마쓰 미도리(小松錄) 통감부 외사국장은 “한국 병합은 군인 한 명 움직이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뤄냈다”라고 자화자찬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황제가 입법·사법·행정은 물론 군 통수권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권한을 보유한 러시아의 차르 형 절대군주제 국가였다. 만약 황제가 목숨 걸고 끝까지 병합을 반대했다면 황제를 폐위시키거나 무력을 동원하여 강제 점령하지 않는 한 병합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고마쓰의 말처럼 참으로 비참할 정도로 허무하게 대한제국의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제 그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본다.

고종의 요구각서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다음 해 2월 통감부가 개설되었다. 통감부가 황제의 권한을 축소하는 각종 개혁을 추진하자 고종은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하여 통감부에 다음과 같은 요구각서를 제출했다.

첫째, 황실비는 정액을 정해 궁중에 일임할 것.

둘째, 황실에 속한 광산·홍삼 사업, 궁·능원 소속 토지는 궁중(황실)이 관리하도록 할 것.

셋째. 황실 재정 및 재산에 대해서는 정부의 재정 고문이 간섭하지 말 것.

이 요구각서는 알기 쉽게 서명하면 고종 자신이 사용하는 돈과 개인 재산에 대해서는 절대 손대지 말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은 대한제국 정부 예산보다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황실비를 국고에 귀속시키지 않고는 어떤 일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대한제국 병합의 실무 주역 중 한 사람인 고마쓰 미도리 통감부 외사국장.
대한제국 병합의 실무 주역 중 한 사람인 고마쓰 미도리 통감부 외사국장.

이토 통감은 고종의 요구를 무시하고 황실 개혁을 밀어붙였다. 통감부는 곳곳에 숨겨놓은 고종 황제의 비자금을 추적하여 국고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황제가 제멋대로 정부 재정을 가져다 쓰지 못하도록 재정 개혁을 추진했다. 궁지에 몰린 고종은 1907년 헤이그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내정간섭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것으로 저항했다.

사실 일본 정부는 황실 곳곳에 침투시킨 첩보 조직을 통해 고종이 러시아 측과 헤이그 밀사 파견과 관련한 모든 정보를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통해 고종이 원하는 것은 제멋대로 쓸 수 있는 비자금(황실비)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고종은 자신이 제멋대로 넉넉히 쓸 수 있는 돈 문제만 해결해 주면 대한제국의 주권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을 것임을 파악한 것이다.

열강의 간섭 막기 위해 황제 일가 매수 작전

일본 정부는 청일전쟁에서 압승을 거두고도 삼국간섭에 의해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반환해야 하는 국가적 치욕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서구 열강의 외교적 개입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뼈아프게 체험했다.

대한제국 병합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우려한 것은 서구 열강의 개입 가능성이었다. 고종이나 대한제국 지도부가 병합에 저항하면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혼란이 벌어지면 서구 열강이 개입하여 엉뚱한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무리 없이 병합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동원한 강제 점령이나 찬탈이 아니라, 국제적 합의(조약) 형식으로 추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조약 체결권을 가진 황제와 그 일족을 극진히 예우함으로써 회유책을 동원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황제 일족을 돈으로 구워삶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현명한 방법이었다는 뜻이다. 또 일본이 망국 군주를 어떻게 대우하는가는 지도층 및 지식인 계급을 일본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1910년 7월 8일, 일본 각의는 대한제국 황실을 폐지하고 이들을 조선 왕공족으로 편입시킨 후 매년 세비로 150만 엔을 지급키로 결정했다. 당시 일본 총리 연봉이 1만 2천 엔, 일본 1개 황족의 연간 세비가 4만~10만 엔(1927년 11개 황족 전체의 연간 세비 80만 엔)에 불과했다. 이와 비교하면 조선 왕공족에 대한 예우는 실로 파격적인 거액이었다.

대한제국 병합을 실행한 데라우치 마사타케 3대 통감.
대한제국 병합을 실행한 데라우치 마사타케 3대 통감.

1910년 7월 28일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위의 내용이 정리된 병합계획서를 들고 경성(서울)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8월 4일,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와 이완용 총리의 비서 이인직이 합병 교섭을 시작했다.

고마쓰는 이인직에게 프랑스가 마다가스카르를 병합할 때 국왕을 외딴섬으로 추방한 사례, 미국이 하와이를 병합한 후 국왕을 시민으로 격하시킨 사례 등 살벌한 구미의 식민지 정책을 설명했다. 그는 일본 정부가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 수용하고 일본 황족에 준하는 파격적인 예우를 약속했다. 또, 내각 대신들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세습 재산을 제공한다는 일본 각의 결정을 통보했다.

이를 담보하기 위해 병합조약 제3조에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 및 그 후비 및 후예를 각기 지위에 상응하는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조한다’라고 명문화했다.

순종 즉위 4주년 기념 파티

양측의 합의에 따라 병합조약은 1910년 8월 22일 체결하며, 공표는 8월 25일에 하기로 결정됐다. 그런데 대한제국 측에서 느닷없이 공표 날짜를 8월 29일로 연기해줄 것을 요청해 왔다. 대한제국의 망국 과정을 추적하여 기록으로 남긴 중국 지식인 량치차오(梁啓超)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합병조약은 8월 16일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이완용의 논의 결정을 거쳤고, 17일 데라우치가그 결과를 일본 정부에 전보로 통지했다. 25일 공포하기로 이미 결정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갑자기 그달 28일 한국 황제(순종) 즉위 4주년 기념회를 열어 축하한 뒤 발표하기를 청하자, 일본인들이 허락했다. 이날 대연회에 신하들이 몰려들어 평상시처럼 즐겼으며, 일본 통감 역시 외국 사신의 예에 따라 그 사이에서 축하하고 기뻐했다. 세계 각국에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은 한국 군신들의 달관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제국 망국의 적나라한 모습을 기록한 중국 지식인 량치차오.
대한제국 망국의 적나라한 모습을 기록한 중국 지식인 량치차오.

1910년 8월 29일, 순종 황제는 병합과 관련하여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칙을 발표했다.

“너희들 높고 낮은 관리들과 백성들은 나라의 형세와 현재 조건을 깊이 살펴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자기 직업에 안착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도록 하라. 오늘의 조치는 너희들 민중을 잊어서가 아니라 민중을 구원하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관리와 백성들은 나의 뜻을 몸으로 느낄 것이다”

왕공족에게 막대한 세비 지원

한일 병합은 일본 정부의 구상대로 너무나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 주권을 상실한 대한제국은 명칭이 조선으로 바뀌었고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의 후폭풍으로 폐위된 고종 황제는 덕수궁 이태왕으로, 순종 황제는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되었다. 일본 정부는 약속한 대로 황제 직계가족 4명(순종과 순종비 윤 씨, 고종 태황제와 황태자 이은)을 왕족(王族)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황제의 방계가족(순종의 동생 의친왕 이강과 부인 김 씨, 고종의 형인 흥친왕 이희)를 공족(公族)으로 삼아 조선 왕공족(王公族)을 구성하고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 수용했다. 조선 왕공족의 사유재산 관리 및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산하에 이왕직이란 공식 부서도 신설했다.

조선 왕공족과 일본 황족. 앞줄 왼쪽부터 다케히토친왕(有栖川宮威仁親王), 순종,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 영친왕 이은. 뒷줄 왼쪽부터 흥친왕 이재면, 이재완(사도세자 현손), 의양군 이재각(사도세자 현손), 이준용(흥선대원군의 적장손).
조선 왕공족과 일본 황족. 앞줄 왼쪽부터 다케히토친왕(有栖川宮威仁親王), 순종,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 영친왕 이은. 뒷줄 왼쪽부터 흥친왕 이재면, 이재완(사도세자 현손), 의양군 이재각(사도세자 현손), 이준용(흥선대원군의 적장손).

일본은 조선 왕공족의 예우를 위해 매년 세비를 지급했다. 그 액수는 1911~1920년까지는 연간 150만 엔, 1921년부터는 연간 180만 엔이었다. 세비 150만 엔은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연간 300억 원이 넘는 규모였다. 1911년부터 1913년까지 조선총독부의 연간 예산이 5,047만 엔이었다. 총독부는 예산의 2.9%를 왕공족으로 지정된 고종·순종 및 그 일가의 안락한 은퇴 생활을 위해 아낌없이 지출한 것이다.

조선 왕공족의 재산은 일본 정부가 제공하는 세비뿐만이 아니었다. 원래 소유하고 있던 대한제국 황실 소유의 각종 재산과 일본 정부 은사금, 왕공족이라는 특수 지위 덕분에 그들의 부(富)는 나날이 늘어갔다.

1930년 이왕가 재산 규모는 유가증권이 60만 7,778엔, 부동산 772만 6,091엔이었다. 이왕직이 관리한 전답은 1억 5,000만 평으로, 한반도 전체 논 면적의 5%에 해당했다. 여기서 나오는 수입은 모두 왕공족에게 돌아갔다. 덕분에 일본 황족들도 조선 왕공족의 재산을 부러워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소유한 대부호로 등극하게 된다.

일본 정부는 병합을 기념하기 위해 임시 은사공채 3,000만 엔을 조선에 기부했다. 이 금액을 미화로 환산하면 1,500만 달러, 한화 6,000억 원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일본이 조선에 기부한 은사금은 미국이 필리핀에 대한 권리를 양도받기 위해 스페인에 지불한 2,000만 달러의 4분의 3에 해당한다. 미국이 제공한 돈은 스페인 정부에 돌아갔지만, 일본 정부의 은사금은 조선 백성에게 돌아갔다.

그렇다면 은사금 3,000만 엔은 어떤 용도로, 누구에게 제공되었을까?

고관대작에게 작위와 은사금 뿌려

일본 정부는 1910년 10월 7일, 대한제국 황실의 친족 및 각료에 대한 예우를 위해 조선 귀족제도를 창설했다. 대한제국의 고관대작 76명에게 작위(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를 내리고 일본 화족과 동일한 예우를 보장했다. 이들 중 윤용구·홍순영·한규설·유길준·민영달·조경호 등 6명은 귀족 작위를 반납함으로써 병합 후 실제 조선 귀족에 임명된 자는 68명이었다.

병합 후 가장 많은 은사금을 챙긴 이재면(흥선대원군의 장자).
병합 후 가장 많은 은사금을 챙긴 이재면(흥선대원군의 장자).

병합에 협조함으로써 조선 귀족 작위를 받은 황실 친족 및 구(舊)한국 관리 3,683명은 일본 천황으로부터 거액의 은사금을 받아 안락한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귀족 작위를 받은 자들 중에서도 최고액의 은사금을 수령한 자는 흥선대원군의 장남(고종의 친형) 이재면이다. 그는 궁내부 대신으로서 병합조약 체결에 참여한 대가로 83만 엔(약 166억 원)을 받았다. 그의 아들 이준용도 16만 3,000엔(약 32억 6,000만 원)의 은사금을 받아 챙겼다.

주자성리학의 나라답게 나라가 망했으니 유림들도 그에 합당한 저항을 하는 것이 순리 아니겠는가. 유림들이 병합에 반발할 조짐을 보이자 총독부는 덕망 있고 나이 든 양반 유생 3,150명에게 은사금을 뿌렸다. 덕분에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을 외치며 목숨 따위를 하찮게 여기듯 저항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유생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히 병합을 수용하고 일본 통치에 순응했다.

또 타의 모범이 된 효자와 절부(3,290명), 빈궁한 홀아비·과부·고아·독신자(7만 902명)에게도 은사금이 뿌려졌다. 남은 금액은 실업자와 빈곤자 구제, 조선인 교육, 그리고 흉년 대비 자금으로 분배되었다.

고종과 순종은 일본 정부의 “황실에 대한 후한 예우” 제의에 만족하여, 즉 일족에 대한 신분 보장 및 금전을 대가로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완전히, 영구히’ 양여했다. 대신들도 귀족 작위 및 거액의 은사금에 매수되어 병합에 저항하지 않았으며, 유림 및 백성도 일본 천황이 내린 은사금을 받고 입을 닫았다. 이것이 일본이 “군인 한 명 움직이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병합을 달성한 진짜 이유다.

그렇다면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완전히, 영구히’ 양여한 고종·순종은 망국 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애 만드느라 바빴던 망국 군주 고종

통감부 설치 후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대한제국의 황실 살림을 총괄하는 기구인 궁내부가 극도로 비대화되어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궁중 경비 절약을 위해 궁내부에서 4,400명을 대량 해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9년 궁내부에는 칙임관 33명, 주임관 76명, 판임관 229명, 궁녀와 내시가 4,000명이나 바글거렸다.

병합 후 조선총독부는 고종과 순종이 거처하는 덕수궁·창덕궁의 궁녀와 내시 정원을 2,500명으로 감축한다는 방침 세우고 1920년까지 1,450명을 대량 해고했다. 이태왕으로 신분이 격하된 고종은 덕수궁에서 한가로이 지내던 중 1911년 7월 20일 후처인 엄 상궁이 사망하자 ‘밤의 자유’를 만끽하기 시작했다.

1912년 덕수궁의 소주방 나인(음식 조리 담당 궁녀) 양 씨가 고종의 딸 덕혜옹주를 생산했다. 고종이 환갑 지난 61세에 자손을 본 영향 탓인지 덕혜옹주는 소녀 시절부터 조현병(정신분열병, schizophrenia) 증세를 보이기 시작, 평생 그런 상태로 사느라 주변 인물들이 고생깨나 해야 했다.

고종이 61세 때 주방 궁녀에게 얻은 덕혜옹주. 소녀 시절부터 조현병이 발병하여 평생 고생했다.
고종이 61세 때 주방 궁녀에게 얻은 덕혜옹주. 소녀 시절부터 조현병이 발병하여 평생 고생했다.

고종의 궁녀 동침 퍼레이드는 이후 점입가경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번에는 ‘무수리’로 불리는 세수간 나인을 임신시켜 1914년 7월 3일 아들 이육을 얻었다. 이육을 생산한 무수리는 고종의 아이를 낳아준 덕분에 광화당 이 씨(본명 이완흥)로 승격되었다. 고종이 63세 때 얻은 아이여서 그런지 이육은 두 살 때 죽었다.

이후 고종의 총애를 독차지한 주인공은 무수리인 삼축당 김 씨(본명 김옥기)였다. 고종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삼축당이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자, 이번에는 동료 궁녀 보현당 정 씨를 임신시켜 1915년 8월 20일 아들 이우를 얻었다. 이우도 태어난 지 석 달 후 죽었다.

창덕궁 이왕으로 물러난 순종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병합 때까지만 해도 시종이 좌우에서 부축하지 않으면 계단도 오르내리지 못할 정도로 심신이 쇠약했던 순종은 병합 후 기적과도 같이 건강을 회복했고, 성격도 쾌활해졌다. 데라우치 총독은 순종의 건강 상태가 놀랍게 반전된 이유를 “어려운 국사의 근심으로부터 해방된 때문”으로 기록했다.

순종의 취미는 당구와 식도락

순종의 취미는 당구와 음악감상, 식도락이었다. 1912년 3월 순종은 일본 당구 재료 판매상 닛쇼테이(日勝亭)에 당구대 2대를 주문하여 창덕궁의 인정전 동행각에 설치했다. 매일신보의 보도에 의하면(1912년 3월 7일) 순종은 매주 월·목요일을 당구하는 날로 정했는데, 수시로 당구장에서 당구를 즐겼다고 한다. 순종과 순정효황후는 나이가 20살 차이가 났는데, 두 사람은 창덕궁 인정전에 설치된 당구장에서 가끔 당구를 치기도 했다.

병합 후 당구, 프랑스 요리를 즐기며 안락한 생활을 한 순종.
병합 후 당구, 프랑스 요리를 즐기며 안락한 생활을 한 순종.

병합 3주년을 기념하여 매일신보가 보도한 기사(1913년 8월 29일)에 의하면 “(순종은) 옥돌장(당구장)에 나가서 공을 치시는데 극히 재미를 붙여 여관(女官)들을 함께하신다. 여름에는 서늘한 때에 석조전에서 청량한 바람을 몸에 받으시며 내인들을 데리고 이야기도 시키고 유성기 소리도 즐거워하신다더라”라고 근황을 알렸다.

식사는 도쿄 데이고쿠(帝國)호텔의 초대 요리장을 지낸 요시가와 가네키치 부자가 조리하는 프랑스 요리를 대단히 즐겨 거의 매일 양식으로 식사를 했다. 순종이 프랑스 요리를 워낙 좋아하자 그에 따르는 양질의 식재료 공급이 문제가 되었다. 이왕직은 일본 궁내성에 특별 부탁하여 불하받은 최고급 소를 배로 실어와 사육하여 우유와 신선한 육류, 버터를 생산, 순종의 식탁에 올렸다.

조선일보(1922년 12월 21일자)가 소개한 순종의 일과

오전 9시~9시 20분 기상

주치의 진찰 및 세수

한약 탕제 복용

12시 아침 수라 후 오후 2시까지 업무

오후 2시~4시 인정전 옥돌장으로 가시어 유쾌하게 공을 치심

오후 4시 다과와 목욕을 마친 후 책과 잡지 독서

오후 7시 저녁 수라

수라 후 산보 겸 옥돌장으로 가시와 친히 공을 치시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배종하였던 신하에게 명하시와 어람을 하심

신문 독서

밤 11시 취침

다이쇼 천황 초상화 걸어두고 생활한 순종

일본 정부는 순종을 일본 육군 대장으로 예우했는데, 그는 외출할 때나 의례에 참석할 때는 언제나 육군 대장 정복을 착용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순종은 자신이 육군 대장이 된 것에 큰 긍지를 느꼈던 것 같다.

순종은 자신에게 안락하고 복된 삶을 제공해 준 다이쇼(大正)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에서 자신의 거처인 창덕궁에 다이쇼 천황의 진영(초상화)을 걸어두고 생활했다. 일본의 궁중 3대절(기원절·천장절·사방배) 때는 반드시 대례복을 입고 총독 관저를 방문하여 천황에게 축사를 지어 바쳤다.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여 주요 건물이 전소되었다. 순종은 창졸간에 재난을 당해 피난하면서도 다이쇼 천황과 황후의 진영이 불에 탈까봐 전전긍긍했다. 여러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천황과 황후의 진영이 불타자 순종은 다음날 이왕직 직원과 경부무 직원이 입회한 가운데 진영의 재를 상자에 쓸어 담아 비원 내 가장 청정한 땅에 봉납했다.

이왕직 직원들이 순종에게 거처를 임시로 다른 궁으로 옮길 것을 여러 차례 권유했다. 하지만 순종은 “천황 폐하로부터 받은 창덕궁이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라면서 건물이 복구 때까지 비좁은 낙선재에서 불편을 감수해가며 생활했다. 이것이 망국 군주들의 아름다운 일제 체험기였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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