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역에 속했던 지역에서 수많은 신생국가들이 탄생한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 중 전쟁 이전에는 프랑스만이 공화정체를 가지고 있었으나 전쟁 후에는 공화국의 수가 왕국의 수보다 많아지는 큰 변화가 발생한다.

같은 시기 중동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 내의 아랍인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왕국들이 새롭게 탄생하였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군사 쿠데타 등에 의하여 서서히 공화국으로 변화해 간다. 당시 새롭게 탄생하였던 중동 지역 주요 왕국들 중 현재에도 그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는 사우디 아라비아 (The Kingdom of Saudi Arabia)와 요르단 (The Hashemite Kingdom of Jordan)이다.

중동 지역에 위치한 많은 국가들 중 이란, 터키와 기타 아랍 국가들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 우선 이란과 터키의 국민들은 아랍인이 아닌 페르시아인과 투르크인이며 아랍어가 아닌 페르시아어와 터키어를 말한다는 점에서 기타 아랍 국가들과 인종적, 언어적으로 큰 차이가 존재한다.

나아가 이란은 페르시아 왕국, 터키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승계한 국가들인데 반하여 기타 아랍 국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간의 사이크스-피코 협정 (Sykes-Picot Agreement)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국가들이라는 차이가 있다.

이란의 경우 카자르 왕조 하의 페르시아 왕국이 1918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25년 카자흐 병단의 사령관 레자한이 무력으로 카자르 왕조를 무너뜨리고 팔레비 왕조를 창설하였다. 팔레비 왕조는 급속한 서구화 정책을 추진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으나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지고 현재의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성립하였다.

터키의 경우에는 제1차 세계대전 패배의 여파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붕괴하자 그리스군을 소아시아에서 몰아낸 전쟁 영웅 케말 파샤를 중심으로 1923년 기존의 술탄제를 폐지하고 터키 공화국을 건국하였다.

나머지 주요 아랍 왕국들의 역사는 이집트의 무하마드 알리 가문 (The House of Muhammad Ali), 중앙 아라비아 반도의 사우드 가문 (The House of Saud), 메카와 메디나를 포함한 헤자즈 지역의 하심 가문 (The House of Hashemite)이라는 세 왕조의 흥망성쇠의 연대기이다.

 

1700년대 초 아라비아 반도의 정신적 지도자 무하마드 빈 알둘 와하브는 초기 이슬람교의 전통에 따라 엄격한 신앙생활을 통하여 이슬람교의 위대함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감동을 받은 중앙 아라비아 네지드 지역의 족장 무하마드 빈 사우드는 1744년 와하브를 후원하기로 하고 그의 가르침에 기반하여 부족들을 단결시켜 아라비아 반도를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성립한 사우드 왕국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토인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를 포함한 헤자즈 지방까지 점령하였다가 이집트 총독 무하마드 알리의 군대에게 패배하여 쫓겨나고 1818년에는 무하마드 빈 사우드의 증손자인 압둘라 빈 사우드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끌려가 반역죄로 참수되기에 이른다.

압둘라 빈 사우드의 아들 파이잘 빈 투르키 사우드는 현재 사우디 아라비아의 수도인 리야드를 중심으로 사우드 왕국을 재건하였으나 그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멸망한다. 그의 셋째 아들 압둘 라만 사우드는 라이벌 가문인 알 라시드 왕가의 지배 하에 있다가 1891년 가족과 함께 탈출하여 쿠웨이트를 지배하던 알 사바 가문 (현 쿠웨이트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지낸다.

한편 1798년부터 1801년까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당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이집트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가 영국 함대와 오스만 투르크 군대에게 패배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철수한다. 알바니아 여단의 사령관 무하마드 알리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하면서 이집트 민중들의 영웅이 된다.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던 맘루크 (백인노예라는 의미의 투르크계 군벌)의 횡포와 무기력한 이집트 총독에 분노한 이집트 민중들은 무하마드 알리를 새로운 총독으로 추대한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무하마드 알리를 이집트 총독에 임명하는데 그는 맘루크 지도자들을 몰살시키고 그의 총독직을 세습화하였다.

무하마드 알리는 영국, 프랑스의 문물을 도입하면서 각종 개혁과 산업화 정책을 추진하고 나폴레옹의 군대를 모방하여 이집트 국민군을 편성한다. 그의 군대는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 메디나를 사우드 왕가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리스 독립운동의 진압에 참전하였으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그리고 수단을 점령하였다.

결국 무하마드 알리는 영국의 중재 하에 현재의 이집트와 수단을 그 지배 영역으로 하는 왕조를 개창하고 그 밖의 점령 지역을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반환하였다. 다만 무하마드 알리와 그 계승자들은 1914년까지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종주권을 부인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술탄이 아닌 총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무하마드 알리의 계승자들은 이집트의 농업진흥 및 산업발전에 주력하였으나 국가 부채의 급증과 이에 따른 채무 불이행으로 인하여 영국의 실질적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14년에는 당시 이집트의 통치자 후세인 카밀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면서 술탄을 칭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하였다.

1914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독일의 편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로 하자 영국은 인도나 이집트의 이슬람교도들이 성전 (jihad)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여 당시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 등 헤자즈 지역을 지배하던 예언자 무하마드의 직계 후손, 후세인 이븐 하심과 접촉하여 후세인-맥마흔 협정 (Hussain- McMahon Agreement, 1915년)을 체결한다. 협정의 내용은 후세인 이븐 하심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토 내에서 아랍인들의 반란을 주도하여 연합국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면 영국은 전쟁 이후 그를 통일 아랍왕국의 국왕으로 인정해 주기로 하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후세인과 그의 아들들이 주도한 아랍인들의 반란이 군사적으로는 큰 효과가 없었지만 전쟁에서 영국이 주도하는 연합국이 승리하였기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 내 아랍인들의 거주 지역을 지배하는 하심 왕국이 성립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 민족의 독립보다는 석유자원의 확보가 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토 분할을 내용으로 하는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 1916년)을 비밀리에 체결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영국 외무성은 전세계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기 위하여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한다는 벨포어 선언 (Balfour Declaration, 1917년)을 발표하였다.

전후 처리를 위한 베르사이유 조약에서는 아랍인들이나 유대인들보다는 강대국 프랑스의 입장이 우선시되어 레바논,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 모술 지방의 석유 이권의 25%는 프랑스가, 팔레스타인, 요르단, 이라크는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후세인 이븐 하심은 장남 알리와 자신의 근거지인 헤자즈에 머물면서 국왕으로 즉위하였고 통일 아랍왕국의 지배자가 되기 위한 여러가지 사전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편 차남 압둘라는 군대를 이끌고 현재의 요르단에서 시리아로 진격하고 있었고 삼남 파이잘은 군대를 이끌고 다마스쿠스에 입성하여 시리아의 국왕으로 옹립되었다가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라 현지에 진주해 온 프랑스군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분노한 하심 가문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준비하였으나 당시 영국 식민지상 윈스턴 처칠의 설득으로 1920년 차남 압둘라는 요르단의 국왕 압둘라 1세, 삼남 파이잘은 이라크의 국왕 파이잘 1세로 즉위하였다. 후세인 이븐 하심은 헤자즈 지역에 머무르면서 - 두 아들을 설득하여 시리아 지역을 제외한 통일 아랍 왕국을 이루려는 구상 하에 - 1924년에는 폐위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이 겸직하고 있던 칼리프의 지위를 자신이 승계한다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1891년 쿠웨이트로 망명했던 압둘 라만 사우드의 아들,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가 이끄는 이크완 (Ikhwan)이라는 민병대가 하심 가문의 군대가 중동 전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틈을 놓치지 않고 헤자즈를 침공하였다. 이븐 사우드는 1902년 라시드 왕가로부터 리야드를 탈환하여 사우드 왕가를 재건하였고 오랜 전쟁 끝에 1925년 하심 가문이 지배하던 헤자즈까지 점령하여 현재의 사우디 아라비아 영토가 확정되었다.

후세인 이븐 하심은 그의 장남 알리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이븐 사우드의 군대에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여 차남 압둘라가 지배하던 요르단에 망명하였다. 그 결과 영국의 보호를 받는 하심가의 요르단 및 이라크 왕국이 사우드가의 사우디 아라비아와 대치하는 형세가 성립하였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사우디 아라비아가 영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던 요르단 및 이라크와 대립하면서도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1938년이 되어서야 그 영토 내에서 석유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에 영국군의 침공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한편, 영국은 1922년 이집트를 완전한 독립주권국가로 인정하는 대신 수에즈 운하에 대한 관리권을 계속 보유하고 현재의 수단을 무하마드 알리 왕조의 지배 영역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집트 국왕과 민중들 모두 "이집트인은 나일강의 물을 마시는 사람"이라는 전통적 관념에 따라 수단의 분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현실적으로 영국에 대항할 힘이 없어서 그 결정을 수용했다.

역시 영국의 보호 하에서 자치령의 지위에 있던 이라크는 파이잘 1세의 치세기간이었던 1932년에, 요르단은 압둘라 1세의 치세기간이었던 1946년에 각각 독립국이 되었다. 당시의 언론인들은 파이잘 1세가 압둘라 1세보다 훨씬 우수한 통치자였기에 이라크가 요르단보다 먼저 독립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고 논평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무하마드 알리 가문, 사우드 가문, 하심 가문이 지배하는 이집트, 사우디 아라비아, 요르단, 이라크의 네 왕국 체제는 외견상 견고해 보였으나 오래 지속되지 못 하고 현재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요르단의 두 국가만이 왕국으로 남아있다.

이집트의 국왕 파루크 1세는 1952년 나기브와 나세르가 주도하는 군사혁명에 의하여 이라크의 국왕 파이잘 2세는 1958년 카셈 준장이 주도한 군사혁명에 의하여 폐위되었다. 파루크 1세는 무능하고 부패한 인물로 왕정을 회복할 가능성이 없었기에 목숨을 유지한 채 이탈리아로 망명할 수 있었으나 파이잘 2세는 이라크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던 젊은 국왕이었기에 혁명세력은 그가 이스라엘과 내통하고 있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서 군대를 선동해야 했고 혁명 당일 국왕 일가족 전부를 살해하였다.

이집트 혁명과 이라크 혁명 모두 아랍 민족주의를 이념적 기반으로 젊은 장교들이 주도하였는데 이집트의 나세르가 이라크의 카셈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는지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당시 이집트의 파루크 1세와 이라크의 파이잘 2세는 아랍 민족주의보다는 영국과의 전통적 동맹 관계를 중요시하던 통치자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 보면 현재 중동 국가들간의 친소 관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초 형제의 나라였던 요르단과 이라크는 1958년 이라크 혁명 이후에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1952년부터 1999년까지 요르단의 통치자였던 후세인 1세가 국내에서는 아랍 민족주의에 영합하여 자신의 왕조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이스라엘과의 대외 충돌을 회피하기 위하여 미국과의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던 실용주의적 외교전략에 기인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후세인 1세는 1991년 걸프전 (The Gulf War) 당시에는 국내 여론에 영합하여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옹호하였다가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사담 후세인의 하야를 주장하였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쿠웨이트의 우호관계도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실 사우드 가문이 19세기 말에 쿠웨이트의 왕실 알 하심 가문의 보호를 받았던 것에서 시작하여 1991년 걸프 전쟁 당시 이라크군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쿠웨이트 왕실이 사우디 아라비아로 피신하여 망명정부를 설립하면서 더욱 심화되어 현재도 양국은 상대방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국가로 평가하고 있다.

이란과 시리아는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공동으로 지원하는 등 우호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시리아의 주민들의 다수는 수니파이지만) 시리아의 통치자 아사드 가문이 시아파에 속하기에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의 정서적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에 기인한다.

터키와 이스라엘은 종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우선 두 나라 모두 중동 지역 내에서 주변 아랍 국가들과 불편한 관계에 있어서 가깝게 지낼 다른 국가가 없고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16세기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이 국외로 추방되었을 때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그들의 이주를 허용해 주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악연(惡緣)에도 불구하고 사우디 아라비아의 사우드 가문과 요르단의 하심 가문 사이에는 묵시적 협력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입장에서는 요르단이 없다면 이스라엘과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되는 지정학적 부담이 있어서 하심 왕가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데 적극적이고 요르단의 입장에서는 자국 내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를 제어하기 위하여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를 지배하고 있는 사우드 왕가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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