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3년 5월 29일 – 비잔틴제국 멸망

 1453년 5월 29일, 이날은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이 오스만제국에 의해 함락된 날이다. 동로마제국이라고도 불리는 비잔틴제국을 손에 넣기 위해 1453년 4월 콘스탄티노플 성문 앞에 도착한 오스만제국 황제 메흐메트 2세는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에게 사신을 보냈다. 이슬람 전통에 의해 유혈 충돌 없는 항복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항복을 거부했고 이때부터 50일 가까이 밤낮없는 혈전이 벌어졌다.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이 바다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유일한 지점인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약점으로 여기고 그곳을 집중 공략했다. 그런데 복잡하고도 두터운 성벽과 해자로 이루어진 성벽은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바다로부터의 공격도 만만치 않았다. 오스만제국 함대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골든혼으로 들어가 콘스탄티노플을 근접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그 진입이 어려웠다. 이에 메흐메트 2세는 밤사이에 전함 67척을 육지에서 옮기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실천했다. 기름을 바른 둥근 통나무 위로 배를 밀어 언덕을 넘어 골든혼 안쪽으로 옮긴 것이다. 
 5월 29일 새벽 한 시, 오스만제국 육군과 해군은 총공세를 시작했다. 이에 날이 밝기도 전에 황제가 살고 있던 톱카프 궁전 쪽의 성벽이 뚫렸다. 비잔틴제국이 7,000명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오스만제국의 정예군 10만 명을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황제의 상징인 자줏빛 망토를 벗어던지고 시민들과 함께 결사 항전했다. 황제도 수많은 시민과 함께 전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살아남은 시민들이 그의 시신을 어디에 감췄는지는 아직까지 알 수 없다.

1453년 오스만제국 군대의 개선 행진을 재현한 톱카프 궁전 퍼레이드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오스만 전통에 따라 사흘 동안 군대의 약탈이 허용되었다. 사흘 후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더 이상의 약탈을 금지하며 비잔틴 시민의 생명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공표했다. 술탄은 이 도시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고 오스만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소피아 성당)는 술탄이 종교와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한 것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함락 당시 아야 소피아에는 수호성인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믿는 수많은 크리스천이 피신해 있었다. 메흐메트 2세는 성당의 파괴를 일절 금했지만 이후 성당은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됐다.  
 덕분에 아야 소피아는 비잔틴 양식의 성당 건물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외부에 이슬람을 상징하는 높은 첨탑 미나레가 네 군데 세워져 그곳이 모스크임을 나타내고 있다. 또 내부에는 제대 대신 메카를 향하는 경배 장소가 만들어졌고 모자이크나 프레스코화로 제작된 성화는 회칠로 덮였으며 그 위에 이슬람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졌다. 1847년 스위스의 건축가 풋사티(Fossaati)가 성당 보수 공사를 하다가 회칠 속에 감춰져 있던 모자이크를 처음 발견하였다. 그 후 1930년대 이곳이 박물관으로 지정되면서 회칠 일부를 벗겨냈고 그 안에 잠자고 있던 성화는 500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덕분에 지금 아야 소피아 안에는 성모자(聖母子), 예수와 그 제자 등 15세기 크리스트교 성화와 이슬람 상징 문양이 공존하고 있다. 그야말로 동서 문명과 문화의 교차‧공존의 장소가 된 것이다.

회칠 속에 잠자고 있다 500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낸 아야 소피아의 성화

 

 
 
 아야 소피아는 537년 12월 축성된 이후 1453년 5월 29일까지 크리스트교 성당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오스만제국에 의해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되었고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 후에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1935년 2월 종교 시설이 아닌 박물관으로 개방되었다. 그러나 2020년 7월 에르도안 현 튀르키예 대통령의 행정 명령으로 다시 이슬람 모스크가 되었다. 아야 소피아는 파란만장한 튀르키예 역사의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유적인 것이다.
 
 2023년 5월 28일 튀르키예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 결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승리하여 재선에 성공했다. 이로써 20년 넘게 집권 중인 에르도안 대통령은 최장 2033년까지, 사실상 ‘종신 집권’이 가능하게 되었다. 
 만일 경쟁자였던 클르츠다로을루 대표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에르도안 집권기에 흔들린 세속주의 정책의 재확립을 우선시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이미 파란만장한 세월을 겪은 아야 소피아가 다시 박물관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에르도안의 계속 집권으로 아야 소피아는 이슬람 모스크로 유지될 것이다. 570년 전, 아야 소피아가 성당에서 모스크로 바뀐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최근 치러진 튀르키예 대통령 선거 사이에 문득 연관성이 느껴지는 것은 이런 가정 때문일 것이다.

오스만제국이 공격을 위해 보스포루스해협 해안에 쌓은 루멜리 히사르 요새

 

황인희 작가(다상량인문학당 대표·역사칼럼니스트)/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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