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문화인류학에서 '타문화는 거울'이란 말이 있다.
타문화란 비교문화를 통해 타자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거울'에 비춰진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게 해 준다.
필자는 처음으로 '동아시아 유교의 농도(濃度)'란 개념을 발안했다. 술은 알콜의 농도에 따라 그 내용물을 알 수 있듯이 한중일 유교의 농도를 비교분석해 보면 그 내용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지금껏 상식적 내지 통설적으로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이란 것을 믿어 왔지만, 그에 대해 무조건 '통설'로 믿기보다는 3국의 유교 차이를 알기 위해 그 통설을 해체, 분해하는 방법으로 '농도를 비교'해 본 것이 필자의 시도였다.
유교는 동아시아에서 중국 대륙이 발상지이며 근대 들어 거듭 비판 및 부정을 당하기도 했다. 1917년 이후의 신문화운동, 1966-1976년의 문화대혁명 등의 운동에서 유교를 여지없이 분쇄시킨 것이 중국 아니었던가.
한국은 대륙의 유교 특히 명나라의 주자학적 유교원리가 그대로 들어와 그것이 조선인의 체질화로 흡수됐으며, 조선인의 문화 유전자로 지배적인 작용을 해왔다. 그러면서 유교는 비판을 거의 받은 적 없이 오늘날까지 유전자로 유전, 계승되고 있다.
이에 비해 섬나라 일본은 유교를 수용하기는 했지만, 교양과 지식으로 흡수했지 조선처럼 체질화시키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유교 종주국에서도 비판과 탄압으로 분실된 유교 경전이 한국에 남아 있었다. 1978년 중국이 등소평의 개혁, 개방 바람으로 공자의 고향 곡부에서 공자제를 지내려 했는데, 곡부의 공자 종묘에도 제사법에 관한 문헌, 사료가 다 불살라버려 남아 있지를 않았다.
결국 한국의 성균관대학에 유교 경전이 잘 보존돼 있다는 소문을 들은 산동성 곡부의 사람들이 성균관대학을 방문하였다. 이곳에 소중히 보관된 제사법 자료 등을 빌려서야 공자제를 제대로 성공시켰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알 수 있는 사실은 유교의 종주국 중국에도 유교는 많이 파손당했지만, 유일하게 한국이 유교의 오리지널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3국의 유교의 농도'를 비교하면 이런 양상이다. 중국은 온더록(ondeolog)이고, 일본은 물을 탄 미즈와리(水割) 유교, 유독 한국 유교만이 그대로 전해온 고농도의 오리지널이다.

유교의 농도에서 발견되는 것은 근대화 농도의 차이이다. 유교의식이 농후하면 농후할수록 근대화(근대성)를 저해하는 장애물이 되는데, 불행하게도 오늘의 한국인에게 유교의 농도가 가장 농후하여 거의 100%에 가깝다.
이에 중국인 역시 유교 비판을 거듭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의 농도가 100%는 아니지만 80%는 된다.
대조적으로 일본인은 '미즈와리'인 만큼 유교의 농도가 40%도 될까말까 한다.

그렇다면 유교의 본질은 무엇일까. 지금껏 유교의 우수성이니 동양의 사상, 윤리니 하면서 극구 치하해왔지만,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유교의 가장 핵심적 본질은 '인간차별'이다. 유교는 공자·맹자 시기 발족할 때 그 목적은 인간의 질서를 가르쳐 상층(황제-국왕)이 인간(신민)을 다스리는 교과서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즉 인간을 등급으로 분류하여 저급인간을 무조건 고급인에 복종하며 충성하며 개인의 개성, 독립과 자유를 애초에 싹을 잘라버리는 무기이며, 살초제였다.

1870년대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여 근대화에 들어선 시기에도 조선에는 양반, 중인, 상인, 천민, 노비 5개 등급 인간이 엄별돼 있었으며, 중인 이하는 거의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
일본이 청일전쟁 후 조선을 청국의 유교 속국에서 독립시켜, 조선왕조를 괴멸시키고 식민지 통치를 실행할 즈음, 중인계급이 가장 일본 통치를 열망했다. 중인은 한문을 읽고 교양이 있었으며 실무파로서 조선사회의 중추를 짊어진 계층이었지만, 출신 차별을 양반으로부터 받으며 권력도, 경제력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일본과 같이 4민평등(졸족, 농, 공, 상)의 평등 사회를 바랐으며 적극 일본에 '친일'을 하여 그런 사회를 실현하였던 것이다.

또한 인간, 사회윤리로서 유교의 원리는 연고자, 아는 사람, 혈연이 통한 일가 친척에서는 예의를 지키고, 깍듯이 대해주지만 모르는 타인에 대해서는 인간 취급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것이 오늘 한국인 사회의 '우리' vs '남'이 준별되는 차별사회의 DNA적인 뿌리이다. 한국 유교적 사회에서 강조되는 것은 혈연, 혈족이며 안면이 없더라도 같은 혈연, 문중 사람이라면 친절히 대해준다. 
좀더 알기쉽게 말하여 혈연 동족에 대한 친근감이 100%라면 그외 타인에 대한 친근감은 0%인 것이 조선 전통 사회의 대인관이었다. 지금도 한국인의 대인관은 기본상 이 구조 안에서 영위되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유교 농도가 박약한 일본은 전통적으로 '袖振り合うも多生の縁(옷깃을 스쳐도 다생의 연)'이라는 말과 같이, 전혀 모르는 타인도 '인간'으로 대접해 왔다.

이처럼 유교의 농도에서 비롯된 한중일의 인간관, 인간차별 사상은 그 유교 농도와 정비례된 양상을 노정하면서 그것이 근대와 조우했을 때, 근대화의 농도와 반비례로 되었다.
인간평등, 개인자유 존중을 바탕으로 한 근대성, 민주주의는 유교의 농도가 농후한 것과는 멀리 괴리돼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 중국인의 근대화는 지금도 일본인에 비해 크나큰 시차를 갖고 있게 되었다.

또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즉 전통적 전제주의 유지를 위해 형성된 통치원리, 윤리로서의 차별 시스템인 유교가 개인, 자유와 인권, 차별, 상급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과 곡학아세가 그 속에서 살아온 인간의 사상, 사고를 DNA적으로 고착시켰다.
중국이 21세기 현재도 전제주의(독재주의)를 실시하면서 유전자적인 인권 무시, 인권 탄압, 언론자유 제무 등 반지성주의와 반민주주의, 파시즘에 의해 인민의 민도가 열화되고 보편적으로 낮다.
북한은 더 언급할 나위도 없다. 현재 한국에서 창궐하는 좌파, 많은 비율을 점하는 좌파적 대중 역시 북한과 중국 공산당의 인권무시, 반지성, 반민주주의의 세뇌와 유전자를 물려 받았기 때문에 민도 역시 비열하고 저수준이다.

그리하여 한국이 비록 민주주의 사회를 자처하며, 사상,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일본이나 구미 선진국과 가치관을 공유한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사실은 어떠할까. 한국이란 나라는 여전히 전통적 고농도의 유교의 사상, 가치관이 점령한 나라이며, 한국인들 역시 그 유교의 유전자에 의해 훈육된 차별, 비민주적 사람이 절대 대부분이다.
20년 전만 해도 필자가 한국의 현장에서 체감한 것은 일본을 따라올 수 있는 기백이었지만 금년 5월 서울의 현장에서 체감한 것은 더 열화된 한국인의 민도(매너, 예의, 위생 청결 관념, 언론자유도, 인간차별 등)가 오히려 일본인보다 더 뒤진 궁상한 모습들이었다.
이런 면면들에 대해서는 별도로 칼럼 '한중일 민도 점수매기기'에서 자세히 기술하기로 하겠다.

이제 결론을 말할 때가 되었다. 필자는 여러 사회, 국가, 민도, 민주화도, 언론자유도 등 제반 영역의 비교 분석을 하여 얻어낸 결론은 한국인과 일본인 시차는 현재 80년이다.
귀 따가운 지적이지만, 지금 한국인의 종합 수준은 1920년대-40년대 조선총독부 시기의 일본인과 비슷하다는 결론이다.
진한 유교 농도에, 좌파 공산주의의 세뇌와 침투가 한국인의 수준을 엄청나게 끌어내린 것이다. 일본 통치 시기는 공산주의를 침몰시켰으며, 공산주의가 조선 땅에서 설 자리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공산주의가 빨갱이 좌파에 의해 대행진, 발호하고 있는 대한민국이 아닌가.
어떻게 대한민국을 좌파 공산주의에서 구해낼 수 있을까는 오늘 한국인의 최대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현 일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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