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일 러시아의 민간군사기업 PMC 바그너가 미소룹카мясорубка, ‘고기 분쇄기’라 불리는 요충지 바흐무트를 224일만에 완전 점령함으로서 러우전은 변곡점을 넘었다. 키예프발 브리핑에 의존하던 서구 주류미디어들은 줄곧 우크라이나군이 이기고 있다는 선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집단서방은 그들이 대리전의 도구로 내세운 우크라이나군이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끝없는 자금과 무기지원이 밑빠진 독에 물붓기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판단해 뒤로는 ‘한반도식 휴전’을 이끌어낸 뒤 훗날을 도모하기로 가닥을 잡았다고 미국매체 폴리티코가 보도하기도 했다. 물론 이 같은 소위 ‘한반도식 휴전’을 러시아가 받아들일리는 만무하다.

바흐무트 함락

 

한편 히로시마에서 열린 G7의 분위기를 보면 러우전보다는 중국봉쇄에 좀 더 초점을 맞추는 분위기다. 물론 키예프에 대한 F-16공여같은 이슈도 사이드라인에서 나오긴 했지만 공동성명에서는 중국의 경제적 협박, 남지나해, 동지나해, 타이완해협의 안보문제를 보다 강조했다. 그렇다고 중국과 사생결단을 보겠다는 자세도 아니고 뭔가 어정쩡하다. 미국과 집단서방은 중국에 대한 경제의존도를 줄인다는 것일 뿐 디커플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발신했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관심을 돌리면서 중국과 러시아를 동시에 옥죄겠다는 것인데 어느 것 하나 정교하지 않은 모양새다.

중국의 평화 특사 리후이와 폴란드 외무차관 보이치예비치 게르벨

 

이런 가운데 유럽에서 가장 몸이 달아 어쩔 줄 몰라하는 나라는 나토의 창槍을 자처했던 폴란드다. 현재 폴란드로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집단서방의 관심이 식으면서 우크라이나 분쟁이 협상으로 종결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유럽을 포함한 관련당사국들을 순회하면서 중국의 평화협상안을 설득하고 있는 리후이 중국특사가 폴란드를 방문하자 홀대했다. 폴란드 외무차관인 보이치예비치 게르벨Wojciech Gerwel이 그를 맞도록 했으며 회담장에는 프로토컬의 기본인 국기조차 배치하지 않았다. 보이치예비치 게르벨은 이 자리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밀착하는데 대해 우려를 표명했을 뿐이다.

그 동안 폴란드의 두다 정권은 우크라이나와 역사적으로 얽힌 과거사의 원한을 인위적으로 억눌러 왔다. 과거 폴란드영토였지만 현재는 우크라이나에 편입된 르보프, 볼린지역을 다시 되찾는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이를 위해 폴란드의 두다 대통령은 젤렌스키에게 군사원조로 환심을 사면서 우크라이나 일부지역의 병합을 꿈꾸고 있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끝까지 싸워 양쪽이 모두 지치면 그 틈을 타 우크라이나 서부지역에 평화유지군 명분으로 군대를 진주시켜 차지한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폴란드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구소련제 무기들을 우크라이나에 대거 제공하면서 그 공백을 미제와 한국제 무기로 채우고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크라코프

 

그러나 키예프군대의 패색이 갈수록 짙어지는데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서부 흐멜니츠키의 초대형 군수물자 보관창고가 러시아군의 공습으로 거대한 버섯구름을 일으키며 폭발하자 폴란드는 패닉에 빠졌다. 영국제 챌린저2 열화우라늄탄 전차포탄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폭발하는 바람에 그 분진이 바람을 타고 폴란드로도 날아가 루블린같은 도시에서 감마선 수치가 크게 올라간 것으로 측정됐다. 폴란드에서는 두다 정권이 억누르고 있기는 했지만 사실 반전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150만명이 넘는 난민이 쇄도해 폴란드의 복지재정을 흡수하고 있는데다 살충제 범벅인 우크라이나산 저가 농산물이 시장에 유통되면서 농민들이 반우크라이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또 폴란드의 유서깊은 도시 크라코프시 광장에서는 전쟁이후 매일같이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자국 지원요구 시위를 벌여왔는데 최근에는 여기에 참다못한 폴란드 시민들이 난민들을 몰아냈다. 예전 같으면 폴란드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해 난민들의 편을 들었을 텐데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이다.

그런가 하면 폴란드 외무부 대변인 루카스 야시나Lukasz Jasina는 이례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중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폴란드 민족을 살해한 볼린 대학살과 관련해 젤렌스키 정권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루카스 야시나 대변인은 Onet이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젤렌스키가 학살에 대해 사과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우크라이나에 책임이 있음을 젤렌스키가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볼린 대학살은 나치 점령 기간인 1943년에서 1944년 사이 볼린, 또는 갈리시아로 불리는 서부 우크라이나와 동부 폴란드 지역에서 발생한 비극이다. 나치에 부역했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이 4만에서 최다 6만명에 이르는 폴란드인들을 상대로 벌인 제노사이드였다. 스테판 반데라주의자였던 우크라이나의 극단분자들은 폴란드인을 학살하면서 총알을 아끼고 공포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칼과 도끼로 폴란드인들을 살해했다.

두다 폴란드 대통령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유럽의 정권 가운데 가장 러소포비아적 색채가 짙었던 폴란드에서 이처럼 전에 없었던 분위기 전환이 감지되고 있다. 이제 미국도 경제공황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우크라이나 피로도가 높아지면서 유럽, 특히 폴란드도 최소한 분위기만큼은 그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변곡점을 통과하면서 관심도가 급격히 수그러들면 서부우크라이나를 병합하겠다는 폴란드의 야심은 뜬구름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한국으로서도 최선의 시나리오는 그동안 폴란드에 수출했던 전차와 자주포가 사용될 여지가 사라진 채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결되는 것이다.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언론인 · 前 MBC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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