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5월 16일 – 중국 문화대혁명의 시작

 1981년 1월 25일, 중국에서는 이른바 4인방에 대한 공개 재판이 열렸다. 4인방이란 마오쩌둥 주변 인물 네 사람으로서 중국 문화대혁명 동안 권력을 장악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음과 고통에 몰아넣은 자들이다. 마오쩌둥의 아내인 장칭[江靑], 정치국 위원 야오원위안[姚文元], 부주석 왕훙원[王洪文], 국무원 부총리 장춘차오[張春橋]가 그들이다. 지역 간 심한 방언 때문에 피고 등 참석한 주요 인물들이 통역 헤드폰을 끼고 등장한 재판의 모습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보여졌다. ‘죽(竹)의 장막’으로 철저하게 가려져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중국의 속살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주범인 마오쩌둥은 1976년에 사망했고 그해 10월, 4인방이 체포되면서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렸다. 중국 전역을 초토화한 어마어마한 광풍이 10년 만에 잦아든 것이다. 그 10년 동안 각급 학교에서는 마오쩌둥의 ‘말씀’ 외의 다른 과목은 가르치지 않았고 5년 동안은 대학에서 신입생을 뽑지 않았다. 1966년 7월 24일 중국 공산당이 국무원과 함께 발표한 아래 선언이 교육 공백의 서막을 연 것이다.
“올해부터 시험을 취소한다. …… 정치를 제1원칙으로 삼아 당의 계급 전선을 철저히 관철하라.”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 16일 5‧16통지를 통해 전당에 공표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문화대혁명의 기본 내용은 반당, 반사회주의 부르주아의 반동적 입장을 폭로하고 학술계, 교육계, 언론계, 문화계, 출판계의 부르주아 반동 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하며, 그러기 위해서 부르주아 인물들을 비판‧축출하는 것이었다.

 

  
 이 과업을 실천하기 위해, 또 중국 청년들에게 혁명적 경험을 제공한다는 미명 아래 마오쩌둥은 도시 청소년들을 동원해 홍위병(紅衛兵)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당시 마오쩌둥은 ‘조반유리(造反有理, 모든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말로 청소년들을 선동했다. 이유 없는 반항은 없음을 이르는 말로 청소년들의 질풍노도와 같은 반항심과 적개심, 불만 표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그야말로 물불을 안 가리는, 아니 어쩌면 물인지 불인지도 제대로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린 홍위병들이 전국을 휘젓고 다니는 바람에 중국 10억 인구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광풍에 대책 없이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그 기간 중국의 역사적 유적과 유물, 고전 서적 등은 불살라졌고 영화, 연극 등 예술 활동은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수단으로만 허용되었다. 교수, 교사, 의사를 비롯하여 언론‧출판인, 문화인, 예술가 등 엘리트들은 멸시와 탄압을 당했으며 하방(下方)이라는 이름으로 열악한 환경의 농촌이나 군대로 보내져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아이들이 부모를 고발하고 스승을 길거리로 질질 끌고 나와 모욕을 주고 고문하는 등 패륜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었고 전통 가치와 질서는 사라져버렸다. 그 광란의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거나 고통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상적인 국가 운영 체제도 무너져버린 중국은 황폐할 대로 황폐해졌고 문화대혁명 때문에 국가의 모든 면이 50년 정도 퇴보했다는 평가를 들어야 했다.  

 문화대혁명 기간 문을 닫아야 했던 베이징영화아카데미는 1978년부터 다시 수업을 시작하였다. 광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던 학생들이 영화를 배우고 제작하게 되었으며 1982년 베이징영화아카데미 졸업생들이 바로 중국 제5세대 영화인의 중심이 되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첸카이거[陳凱歌], 장이머우[張藝謨] 등이 그중에 포함되어 있다. 문화대혁명의 살벌하고 비참한 실상은 이들 제5세대 영화인들이 만든 영화들을 통해 세계인에게 적나라하게 알려졌다. 문화대혁명의 실상이 잘 드러난 대표적인 영화로 첸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 <허삼관매혈기>로 잘 알려진 중국 소설가 위화[余華]의 원작을 영화화한 장이머우 감독의 ‘인생’, 제3세대 영화인인 시에진[謝晉] 감독의 ‘부용진’ 등을 꼽을 수 있다.  

 ‘문화대혁명’은 결코 문화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문화를 짓밟고 문화의 싹을 뽑아버린 사건이다. 또 진보의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할 ‘혁명’이라는 단어를 부여하기에도 터무니없다. 그 기간은 전통 가치와 희망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고통 속에서 멈춰버린 세월이었다. 중국에는 “사람은 이름나는 것이 겁나고 돼지는 살찌는 것이 겁난다[人怕出名 猪怕壯]”라는 속담이 있다. 남보다 돋보이면 반드시 재앙이 따른다는 뜻의 이 속담을 중국인들은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더욱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 것이다.
 

황인희 작가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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