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은 5월 7일 예정하는 일본 기시다(岸田) 총리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 좌익들이 사죄를 운운 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급하게 집필한 칼럼이다. 

따지고 보면, 한일 간의 모든 외교문제는 한국 측에서 야기하고 있다. 철없는 어린아이, 성깔 사나운 시골 할멈, 야만의 조폭처럼 일본에 대해 집요하고 터무니없는 공격, 비난, 사죄 요구, 배상 강요를 거듭하면서 한일관계를 일촉즉발의 ‘화약고’로 만들어 왔다.

‘아시아의 화약고’로도 회자되는 한반도는 사실상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 중의 나라’다. 그럼에도 아이러니하게도 한일 문제의 트러블 메이커는 언제나 한국 측(북한도 포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일 문제는 일본과 상관없는 한국 내부의 문제이다.

조선 시대 풍속화. [사진=김문학]

 

필자는 한국의 끊임없는 ‘반일’은 위정자와 좌익들이 공동으로 출연하는 ‘극장정치’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행하게도 ‘반일 정치 쇼’는 늘 기막히게도 일본이 아닌 한국 스스로의 곤경을 자초하는 결과로 막을 내리곤 했다. 자작자연의 반일 쇼는 얼마나 유치하고 파렴치한가. 그 비열함과 그로테스크함은 동시에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필자는 21세기 한국의 정치외교는 지금도 19세기 말기 증세를 거듭하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중국, 미국, 일본, 북한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대주의 행동양식을 그대로 재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민비(閔妃)가 활개 쳤던 고종 시대를 방불케 한다.

19세기말 이른바 친일 엘리트들의 피나는 노력과 근대 일본의 힘으로 20세기 초반 한국은 중세사회에서 일약 근대 국가로 확 변신할 수 있었다. 역사가 증명하다시피 아시아에서 진짜로 한국을 도와주고 한국 편에 섰던 나라와 민족은 일본, 일본인 밖에 없다. 그리고 일본처럼 민도가 높고 교양 있는 신사 민족도 없다. 

이런 일본을 이웃으로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한국의 행운이자, 나라 발전의 외교적 자원이다. 같은 이웃 중공이나 북한의 높은 위험성과는 사뭇 대조된다. 그런데도 일본을 절대 악자(惡子)로 적대시하고 ‘반일 쇼’를 쉴 새 없이 벌이는 한국인의 지적 수준이 참 우려스러울 뿐이다.

다행히도 윤석열 정부는 이런 기괴한 ‘반일’을 멈추고 ‘친일’ 노선으로 우회전했다. 물론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이런 결단이야말로 한국을 수렁에서 구하는 외교 노선임에 틀림없다. 일본에 대한 증오와 반일은 세계적 상식에서도 벗어나 있다. 특히 한국인의 과거사에 대한 ‘강박관념’은 세계인들의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한국의 불행 그 자체다.

과거사로 현재의 한일관계 그리고 미래의 발목을 잡는 것은 자칭 그렇게 똑똑하다는 한국, 일본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준다(김영삼 전 대통령의 발언)는 한국인들에게 크나큰 우려가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오래 동안 생각하고 숙성시킨 한일 문제의 ‘해법’을 제언한다. 그것은 상호간의 일종의 ‘화합’을 이루는 것이다. 화해라기보다는 한국이 더 이상 과거사를 꺼내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미 지나간 일은 서로 더 이상 건드리지 않는다”는 소박한 철학적 지혜다.

한일 간의 과거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면, 과거를 두고 추구할 것은 원한이 아니라 반성과 교훈이어야 한다. 교훈은 심심한 자기성찰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결코 안일한 타자에 대한 증오와 규탄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훈으로서의 과거사는 실증연구를 거쳐 진실을 규명함에 있다. 살아보지도 않은 과거사에 자신들의 얄팍한 민족감정을 개입시켜 현재와 미래를 위한 협력과 발전의 무궁한 가능성을 속박시켜서는 안 된다.

필자의 결론은 “과거를 다시는 말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것이 궁극적 한일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자 비책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한국인들의 미래 지향을 저해하는 것은 과거사라는  육중한 십자가다. 이제는 자신들의 행동을 구속하고 억누르는 과거의 십자가를 버릴 때가 왔다. ‘미래 지향’은 말보다 행동이어야 한다. 그것을 보장하는 것은 과거의 망령과 역사의 십자가를 벗어버리는 방법밖에 없다. 

여기서 팔자가 또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말은 “과거는 숙명”이라는 것이다. 과거가 없는 오늘도 내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런 과거는 숙명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것도 숙명이다. 일정기라는 과거가 없었다면, 오늘의 한민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숙명이 한국인의 문화와 민족성을 규정하고 아이덴티티(정체성)을 부여했다.

애국주의와 민족주의가 팽배해 광신적 종교처럼 돼 버린 한국을 비판하는 그림. 또한 역사를 이용하는 한국의 정치가들, 이에 넘어간 한국의 대중들 또한 비판한다. [사진=김문학]

 

오늘날 우리들이 너무나 익숙하고도 알량한 ‘민족 감정’ 운운하며, 위정자들의 경망스럽고 어리석은 욕망으로부터 “과거를 청산하고 바로 잡는다”고 지껄이는 것은 얼마나 가소로운가? 과거는 자신들의 숙명인데, 그것을 부정하든 인정하든 모두 무의미하다. 부정과 인정의 주관을 넘어서는 또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인들이 정작 고민해야 할 과제는 그 숙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실증적 연구를 전문가와 학자들에게 맡기고, 감정적 반일 쇼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를 정치에 악용하는 좌익과 그와 유착한 정치가들의 한국적 유전자를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억의 기능과 동시에 망각의 기능도 주셨다. 이제 기억이 아닌 ‘망각’의 기능을 활용해서 과거사에 목을 매는 바보스럽고 그로테스크한 언동을 멈추어야 한다. 더 이상 구질구질 과거문제에 매달리지 않고 보다 생산적인 미래지향을 전념하는 것이 한국과 일본에게도 유익하다. 과거 지향을 탈피하는 것이야말로 한일 문제 해결의 첩경이요, 비결이다. ‘망각’이란 지혜야말로 한국과 일본 같이 살아가는 궁극적 해결책이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현 일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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