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5일은 칼 마르크스의 200번째 탄생일이다. 마르크스로 인해 다양한 정치적 활동들이 광범위하게 촉발되었고, 그 활동들로 말미암아 수없이 많은 인권(人權) 참극이 빚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많은 전문가들과 예술가들의 숭배의 대상이다. 그러한 것들 중 하나의 사례로는 라울 픽(Raoul Peck)의 새로운 영화 「젊은 칼 마르크스」(The Young Karl Marx)를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마르크스를 정의에 목말라 하는 원칙에 충실한 급진주의자로 묘사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그의 명성에는 다행스럽게도 그는 결코 스스로는 국가 기구를 통제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다보니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 지저분한 임무는 타인들의 몫이 되었다. 그리고 마르크시즘을 실제 현실의 불빛에 비추어 본 사람들은 현실에 적용된 마르크시즘은 빈곤과 함께 인간 자유의 말살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다.

그렇지만, 지난 1세기 동안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여러 다양한 해석에 기반해 나타났던 잔혹한 사회주의 정권들을 겪은 후에도 종종 “진정한 사회주의”는 결코 “시도된 적이 없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마르크스의 재활/부활이 시도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마도 마르크스가 생각했을 진정으로 “순수한” 사회주의적 경험은 국가 기구들에 잔존하는 부르주아 사상이나 자본주의 습성 등으로 인해 언제나 오염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류(類)의 생각의 전형적인 사례는 노암 촘스키(Noam Chomsky)의 주장에서 볼 수 있다. 그는 명백한 사회주의 정권인 베네수엘라 정권을 실제 “사회주의와는 한참 거리가 먼” 정권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철학자인 슬로보예 지첵(Slavoj Zizek)이 2017년 가디언지에 썼던 “베네수엘라 혁명의 문제는 그것이 충분치 않았다는 것”이라는 칼럼도 주목해 볼 수 있다.

지첵의 견해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현존하는 습관과 관습이 완전히 파괴되고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완전히 대체되어야만 제대로 기능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지첵의 설명처럼, 낡은 격언/속담(즉, 사고방식)은 새로운 격언/속담으로 완전하게 대체되어야만 한다. 말하자면 이렇다:

로베스피에르 같은 급진적 혁명가들은 일련의 새로운 관습을 관철시키지 못한 채 단지 과거와의 단절만을 시도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종교를 새로운 초월적 존재에 대한 추종으로 대체하고자 했던 로베스피에르의 생각이 최대의 실책이었음을 상기하라). 레닌이나 마오쩌둥과 같은 지도자들은 새로운 격언/속담을 지어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매일 매일의 생활을 규율하는 새로운 관습을 부과했기 때문에 (최소한 한동안은) 성공했다.

따라서 베네수엘라에서 수없이 많은 민간 기업체들이 몰수당하고, 소유권이 파괴되고, 수없이 많은 시민들이 기본적 자유마저 박탈당한 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베네수엘라 정권이 너무나 보수적이어서 과거와 완전히 단절하지 못한 데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와의 단절이란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진실은 지첵 자신이 사용하는 말에 들어 있다. 그가 사용하는 용어에는 “일련의 관습을 강요하기(enforc[ing])”와 “새로운 관습을 부과하기(impos[ing])”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당연히 강요와 폭력의 언어이다. 물론 사람들이 이 새로운 “관습들”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기 원한다면, 이것들이 부과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 순수주의자(the socialist purist)의 관점에서는 새로운 레닌이나 새로운 마오쩌둥이 나타나서 더 열심히 노력할 때에만 사회주의가 최종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풍자적인 출판물인 「The Onion」이 최근에 언급했던 것처럼, “스탈린은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유해분자들을 처리하는 하나의 커다란 정화조였다.”

저런 말이 매우 과장되게 보일 수는 있지만, 이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사회주의는 아직 진정으로 실행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즉, 사회주의가 실행되기 위해서는 유토피아로 가는 노정에 가로 놓여 있는 사적소유 및 여타 모든 관습과 사상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엇인가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현실에서는 이것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활방식을 강제하기 위해 언제나 국가 권력이 사용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경제적으로 보면, 사회주의가 보다 많이 실행될수록 삶의 수준은 더더욱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저들은 사회주의 계획자가 계속해서 앞으로 더욱더 전진하고,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인해 방해받지 않게 되면, 유토피아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유토피아로 가는 중간과정에서도 많은 고통이 있을 것이지만, 최종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할 것이다.

이 생각을 그래프로 나타내 보면 아래와 같다:

마르크스와 스탈린 모두 이 불행한 “중간 단계”가 문제라고 인정했다. 루드비히 폰 미제스가 지적했듯이, 마르크스는 두 개의 연계된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것까지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단계를 낮은 기초단계와 높은 단계로 구분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 두 단계 각각에 별도의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는 높은 단계에서는 모든 것이 풍부하여 “모두에게 각자의 필요에 따른 분배”라고 하는 원칙을 수립하는 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의 비판가들이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다양한 구성원들 간에 생활수준의 차이가 있다고 지적하자 스탈린이 구분을 지었다. 1920년대 말 스탈린은 낮은 단계는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고, 높은 단계는 “공산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낮은 단계인 사회주의 단계에서는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의 다양한 구성원들 간 배급에 불평등이 존재하며, 평등은 오직 추후 높은 단계인 “공산주의”에서만 달성될 것이라고 했다.

부분적 자본주의가 부분적 사회주의보다 낫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런 문제로 인한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만일 개입주의 경제에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자유시장적 개혁을 시작했다고 한다면, 이것이 경제를 몰락으로 이끌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실제로 우리는 상대적으로 덜 사회주의적인 경제에서 빈곤은 덜하고 번영은 더 많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도처에서 목격하고 있다.

연관된 문제: “왜 시장에서는 불완전한 정책이 작동을 하는데, 사회주의에서는 작동하지 않을까?”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점은 분명하다. 자유무역, 산업화, 그리고 시장경제 요소들을 일찍부터 받아들인 나라들은 오늘날 가장 부유한 국가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대전 후 유럽의 경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독일과 영국처럼 상대적으로 친시장적인 경제가 (그리스나 스페인 같은) 남부 유럽에서처럼보다 사회주의적인 경제에 비해 훨씬 부유하고 생활수준도 월등히 높다. 이는 또한 스웨덴 같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퍼 바이런드(Per Bylund)가 지적한 것처럼, 스웨덴의 부(富)는 상대적으로 자유방임주의적인 정권 하에서 달성된 것이다.

서독과 동독을 비교해 보면 이러한 현상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독에서 있었던 친시장 개혁은, 비록 그 개혁이 반쪽짜리 개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경제성장의 시기를 가져왔다. 가격통제와 경제에 대해 가해지고 있던 정부의 여타 다른 규제들을 제거함으로써 독일 경제는 비상(take off)했지만, 당시 영국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보다 사회주의적이었던 경제들은 침체되었다.

물론 독일의 경우 서독이 “순수한”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서독은 단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자유방임 정책을 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경제는 성장했다. 한스 젠홀츠(Hans Sehnholz)가 지적하듯이 서독은 사실 우연한 기회에 자유시장 개혁에 착수했다. 그렇지만 그 결과를 우리는 “독일의 경제기적”이라고 일컫는다.

반대의 사례들은 동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찾을 수 있다. 시장이 자유로울수록 생활수준은 높아지고 경제성장은 더 잘 이루어진다. 자본주의자들은 비록 순수한 자유시장은 어디에서도 존재한 적은 없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진정한 자본주의가 실행된 적이 없는 거야”라는 구실을 찾을 필요가 없다.(역자주: 반면에 사회주의는 항상 실패하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실현된 적이 없다’라면서 항상 변명거리를 찾는다.)

마르크스 이후 200년간 마르크스에 자극되어 일어났던 새로운 사회주의 시도들의 실패는 마르크스 옹호자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똑같은 변명(역자주: ‘진정한 사회주의는 아직 실행된 적이 없어’)을 하도록 만든다. 앞으로 200년 후에는 그러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저자) Ryan McMaken (@ryanm cmaken)
라이안 맥메이큰은 <미제스와이어>와 <The Austrian>의 필자로 활약하고 있다. 라이안은 콜로라도 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전공했고, 2009년부터 2014년까지 Housing의 콜로라도 지부에서 Economist로 재직했다. <Commie Cowboys: The Bourgeoisie and the Nation-State in the Western Genre>의 저자이다.

역자) 권혁철 (자유기업원 부원장)

 

원문) https://mises.org/wire/real-socialism-has-indeed-been-tried-%E2%80%94-and-its-been-disaster
▶자유와 시장경제에 관한 더 많은 글을 「미제스와이어」(www.mises.kr)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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