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리한 여론까지 감수하고 강행...의회서 佛총리 불신임안은 가까스로 부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정년 연장을 골자로 하는 연금개혁안을 밀어붙여 의회 통과까지 이뤄냈다. 여론의 반발과 의회 내 반대파들의 세 결집 등으로 좌초되는듯 했던 마크롱 정부의 연금개혁안은 앞으로도 힘을 받게 됐다.

프랑스 하원은 20일(현지시간) 정부가 제출한 연금개혁안을 통과시켰다. 이날 오후 정부의 연금개혁안 입법을 저지하는 차원에서 야권이 제출한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 불신임안 두 건 모두 하원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하원 전체 의석은 577석으로 현재 4석이 공석이다. 불신임안을 가결하려면 의원 287명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 하지만 불신임안에는 278명이 찬성해 과반에 미치지 못해 부결됐다. 모든 야당이 찬성했으면 가결할 수 있었으나 우파 공화당이 반대하면서 틀어지고 말았다. 올리비에 마를렉스 공화당 하원 대표는 이날 하원에서 "우리의 연금 제도를 구제하고, 은퇴자의 구매력을 보호하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불신임안을 반대한다는 당론에도 불구하고 공화당 의원 19명의 표 이탈이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다.

하원은 이날 국민연합(RN)이 별도로 발의한 보른 총리 불신임안도 표결 처리를 시도했으나 94명의 찬성표만을 확보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연금개혁안이 무효가 되고 보른 총리의 내각이 사퇴하는 위기는 일단 모면했다. 하지만 내각이 겨우 9표 차이로 살아남게 됨에 따라 향후 하원을 설득하는 일이 녹록지는 않을 전망이다.

보른 총리는 지난해 5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시작과 함께 취임했다. 야당은 보른 총리가 '긴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했을 때 국무 회의를 통과한 법안을 총리의 책임 아래 의회 투표 없이 통과시킬 수 있다'는 헌법 제49조3항을 통해 하원 표결을 생략하고 연금개혁 법안 입법을 시도했다. 보른 총리는 취임 이후 지금까지 이 조항을 11번째 사용했다. 이에 반발한 의원들은 내각 불신임안을 발의할 수 있는데, 과반수 찬성을 얻는다면 법안은 취소되고 총리 등 내각은 총사퇴해야 한다.

앞서 정부가 제출한 연금개혁 법안은 상원을 통과했지만, 하원을 통과하지 못했다. 상원과 하원은 양원 동수 위원회를 꾸려 최종안을 도출했고 바로 이 최종안은 연금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해온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을 무리 없이 통과했다. 하지만 하원에서는 부결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날 하원에서 의회 입법 절차가 마무리됨에 따라 이 법안은 이제 한국의 헌법재판소 격인 헌법위원회의 승인을 앞두고 있다. 보른 총리는 헌법위원회에 가능한 한 빨리 검토를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마크롱 대통령은 21일 오전 보른 총리와 르네상스, 민주운동, 오리종 등 집권당 대표들을 만날 예정이다.

마크롱 정부의 연금개혁안은 정년을 62세에서 2030년까지 점진적으로 64세로 연장하고 연금을 100% 수령하기 위해 기여해야 하는 기간을 기존 42년에서 43년으로 1년 늘리기로 약속한 시점을 2035년에서 2027년으로 앞당기도록 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근로 기간을 늘리는 대신 올해 9월부터 최저 연금 상한을 최저 임금의 85%로 10%포인트 인상한다는 조항, 노동시장에 일찍 진입하면 조기 퇴직을 할 수 있고, '워킹맘'에게 최대 5% 연금 보너스를 지급한다는 공화당의 제안 등도 담겼다. 브뤼노 르메르 재정경제부 장관은 올해 초 현행 연금 제도를 유지하면 2030년 135억유로(약 19조원) 적자를 기록할 것이지만 정부 계획대로 연금 제도를 고치면 2030년 177억유로(약 25조원)의 흑자를 낼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공화당의 제안이 반영돼 기존 예상보다 정부 지출이 늘겠지만 지금 상태를 지속하는 것 보다는 낫다는 판단이다. 세금을 더 투입하거나 연금 수령액을  더 깎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호소이다.

이렇게 연금을 받기 위해 일해야 하는 기간을 늘리고, 일부 혜택을 축소하는 대신 노동자들에 주는 '당근'도 연금 개혁안에 포함시켰으나 반발은 상당하다.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곳곳에서는 시위가 잇달았고 나폴레옹이 잠든 앵발리드, 생라자르 기차역, 오페라 가르니에 인근 광장에서 예고에 없던 시위가 열렸다.

앞서 프랑스 주요 8개 노동조합은 정년 연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12년 만에 연합 전선을 구축해 8번의 전국 단위 시위를 개최했다. 이달 7일부터는 교통, 에너지, 정유, 환경 미화 부문 등에서 일부 노조가 무기한 파업에 들어갔다. 기차, 비행기,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 이용이 제한되고, 파리 등에서는 길거리에 쓰레기가 쌓였다.

마크롱 대통령이 연금개혁안 통과에 헌법 제49조3항을 또다시 쓴 데 대해서도 여론이 악화되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엘라브는 지난 18∼19일 BFM 방송 의뢰로 18세 이상 프랑스인 1천1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69%가 하원 투표를 생략한 것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답했다. 지난해 대선 1차 투표에서 마크롱 대통령을 뽑은 유권자라고 밝힌 응답자 중 45%도 헌법 49조3항 사용에 불만을 나타냈다.

마크롱 대통령이 야당 지지 없이는 입법이 어려운 하원 여소야대 구조 속에서 우파 공화당(LR)을 제외한 다른 야당들과 척을 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2018년 11월 유류세를 인상하려다 프랑스 전역에서 이듬해 봄까지 이어진 '노란 조끼' 시위로 위기를 겪었다. '노란 조끼' 시위 이후 역대 두 번째 낮은 지지율을 기록한 마크롱 대통령이 이번에도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된다.

김진기 기자 mybeatles@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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