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9단으로 불리는 박지원 전 국정원장이 라디오에서 한 발언을 두고 논란이 거세다. 박 전 원장은 지난 17일 오전 YTN라디오 출연해, 지난 10일 문재인 전 대통령과 회동하고 여러 정치 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사실상 ‘문재인-이재명 연대’를 연상시키는 발언이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지난 17일 YTN 라디오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의 전언을 밝혀, 논란을 키웠다. [사진=YTN라디오 캡처]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지난 17일 YTN 라디오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의 전언을 밝혀 논란을 키웠다. [사진=YTN라디오 캡처]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대표가 친문계 후보인 이낙연 전 대표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발언이다.

문 전 대통령 만난 박지원의 전언=“문 대통령, 이재명 대표 외에 대안 없다고 했다”

박 전 원장은 민주당 문제에 대해서도 말미에 말씀드렸던 것이 사실이라며, “문재인 전 대통령은 ‘민주당이 총단합해서 잘해야 하는데 그렇게 나가면 안 된다. 지금 이재명 대표 외에 대안도 없으면서 자꾸 무슨...’ 정도로 얘기했다”고 전했다.

당시 박 전 원장의 발언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제기됐다. 당무와 원내 경력이 짧은 이 대표의 정치고문 역할을 하고 있는 박 전 원장이 문 전 대통령과의 사담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꽤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대표에 대한 당내 ‘대표직 사퇴’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한 문 전 대통령의 발언을 공개한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문 전 대통령은 직전 대통령이면서 민주당 내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로, 여전히 당내 최대 계파인 ‘친문계’의 리더이다. 민주당 내 문재인 청와대 출신 의원들의 숫자만 해도 십수명에 이른다. 그런데 박 전 원장이 문 전 대통령의 발언을 공개하면서 사실상 이 대표 체제 유지에 힘을 싣는 발언을 한 것이다.

문 전 대통령, ‘무더기 이탈표’ 나온 직후 이재명에게 손 내밀어?

더욱이 박 전 원장이 문 전 대통령의 경남 양산 사저를 방문한 시점은 지난 10일이다. 지난달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에서 나온 '무더기 이탈표'로 민주당의 내홍이 극에 달했을 시점이다. 게다가 그 전날에는 이 대표의 경기도지사 시절 비서실장이 숨진 채 발견되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민주당 의원들의 동요가 심해지던 상황이었다.

당시 박 전 원장의 문 대통령 방문을 두고 ‘정치 9단인 박 전 원장이 벌써 태세 전환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박 전 원장은 ‘바람이 불기도 전에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미리 알아보고 눕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권력 지형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채는 스타일이다.

박 전 원장은 지난 11일 페이스북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를 만나기 위해 양산을 찾았다고 밝혔다. 이날 박 전 원장은 11일 오후 2시 부산 벡스코에서 열리는 ‘이기는 민주당, Again(어게인) 부산’에 방문하는 길에 양산을 찾은 것이다.

박 전 원장은 “어제(10일) 모처럼 양산으로 문재인 전 대통령 내외를 찾아 인사를 했다”며 “건강해 보였고 잔잔한 미소는 변치 않았다”고 했다. 양산에서 부산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이면 닿을 가까운 거리이다. 그런데 하루 전날 양산으로 가서 문 전 대통령을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두 사람의 회동은 주목을 받았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지난 10일 문 전 대통령의 양산 사저를 방문했다. [사진=페이스북 캡처]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지난 10일 문 전 대통령의 양산 사저를 방문했다. [사진=페이스북 캡처]

예상과 달리 이재명 지원 사격한 박지원, 민주당 복당에 대한 보은?

박 전 원장이 문 전 대통령을 만난 뒤 친문계에 힘을 실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YTN라디오에서 문 전 대통령의 발언을 ‘전언’ 형태로 공개한 것은 이 대표에 대한 ‘보은’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문 전 대통령이 당대표 시절이던 지난 2016년 민주당을 탈당한 박 전 원장은 국민의당으로 당적을 옮겼다가 6년만에 다시 민주당으로 복당했다. 박 전 원장의 복당에 대해 당내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특히 정청래 최고위원의 반대가 극심했다. 하지만 이 대표가 박 전 원장의 복당을 결정했고, 정 최고위원도 한발 물러서며 이 대표의 뜻을 따랐다.

박 전 원장 스스로도 ‘정치 인생중 가장 큰 실수’라고 표현했던 민주당 탈당에 대해 이 대표가 ‘복당 결정’을 함으로써 정치적 사면을 해준 셈이다. 결국 ‘복당’을 결정해준 이 대표에 대해 이번에는 박 전 원장이 문 전 대통령을 찾아 이 대표에게 힘을 싣는 메시지를 얻어낸 것으로 풀이된다. 박 전 원장 입장에서는 ‘문재인의 전언’으로 보은을 한 셈이다.

이재명, ‘박지원-문재인’ 회동 이후 개딸들에게 ‘수박 7적 포스터’ 자제 당부

실제로 박 전 원장이 이 대표와 문 전 대통령 사이에서 가교를 한 것으로 보이는 정황은 한 가지 더 있다. 이 대표 체포동의안 '무더기 이탈표' 이후 문 전 대통령까지 '수박 7적'에 포함된 포스터가 유포된 것과 관련, 이 대표와 문 전 대통령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도 회동 목적에 포함됐다는 관측도 나온 것이다.

박 전 원장과 문 전 대통령의 회동 이후 이 대표가 '개딸'들에게 자제를 당부했고, 지도부에서도 '수박 7적 포스터'에 대해 형사고발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개딸들의 과격한 행동에 대해 이 대표가 자제를 내린 것은 문 전 대통령의 전언에 대한 감사의 뜻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박 전 원장 역시 YTN라디오에서 "나도 '개딸'들에게 어떻게 쫓아다니면서까지 규탄을 하느냐, 그런 것을 하면 안된다고 했는데, 이재명 대표도 강하게 했더라"며 "'개딸'들은 강성 지지자들이기 때문에 조금의 움직임은 있겠지만, 그분들도 이제 좀 쿨다운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개딸들이) 자제해야 한다. 이러면 안된다"며 "그것(난동)이 누가 바라는 것이냐. 윤석열 대통령이 바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명계는 문 전 대통령까지 강력 비판

하지만 ‘비명계’에서는 박 전 원장은 물론 문 전 대통령까지 비판하고 나섰다. 비명계 중진인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7일 저녁 CBS라디오 '박재홍의 한판 승부'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과도하게 말씀하신 거고 전달한 분도 잘못 전달했다"며 작심하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뭐 문재인 대통령 꼬붕(부하)입니까. 문 대통령이 지시하면 그대로 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라며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박지원 전 국정원장의 발언 이후, 문재인 전 대통령을 강력 비판했다. [사진=CBS 유튜브 캡처]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박지원 전 국정원장의 발언 이후, 문재인 전 대통령을 강력 비판했다. [사진=CBS 유튜브 캡처]

이 의원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얘기하는 건 좋은데 해야 될 말이 있고 안 해야 될 말이 있다"며 "이재명 대표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건 문 대통령 판단인데 그런 얘기를 그렇게 막 하시면 안 된다"고 했다.

이어 "설사 그 얘기를 문재인 대통령하고 박지원 원장 사이에 했어도 이를 밖에다가 말 할 일은 아니다. 전직 대통령 말을 이렇게 막 전하면 되겠는가"라며 박지원 전 원장의 의도, 진짜 그런 말을 했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이 의원은 "대통령 혹은 전직 대통령과의 말씀은 상당 부분 밖에 얘기하면 안 된다"며 "'문재인 대통령이 이렇게 얘기하더라'는 건 문재인 대통령의 뜻이 그러니까 아무 소리 마라 이런 지침으로 들리는데 그걸 저희들이 수용하겠는가, 더 모욕적이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비명계는 물론 ‘친문계’측도 박 전 원장과 문 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박 전 원장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문 전 대통령이 이 대표를 지지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불편한 것이다. 친문계 의원 사이에서는 “당이 잘 되기를 바라는 문 전 대통령의 마음은 이해되지만, 둘 사이의 대화를 정치에 끌어들이는 것은 아쉽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더욱이 친문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박 전 원장의 말을 믿기가 어렵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박 전 원장이 지난 2015년 2·8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됐던 문 전 대통령을 1년 내내 집요하게 흔든 적이 있기 때문이다.

평산 마을로 내려가면서 현실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했던 문 전 대통령이 이 대표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현재 당 문제에 대해 문 전 대통령을 끌어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점에서, 박 전 원장의 발언이 부적절했다는 게 친문계의 대체적인 여론인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이 대표 체제가 내년 총선때까지 유지될 경우, 친문계가 공천과정에서 불리해질 가능성이 높아 돌발적인 ‘문재인-이재명 연대’ 양상은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으로 관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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