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미국과 중국에 대항해 자국 시장을 보호한다는 취지의 유럽판 ‘IRA’(미국 전기차법·인플레이션감축법) 초안을 16일(현지시간) 공개했다. 이날 EU가 공개한 두 가지 법안은 ‘핵심원자재법’과 ‘탄소중립산업법’의 초안이다.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유럽판으로 불리는 '핵심원자재법' 초안이 공개됐다. [사진=TV조선 캡처]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유럽판으로 불리는 '핵심원자재법' 초안이 공개됐다. [사진=TV조선 캡처]

산업부, “EU의 핵심원자재법과 탄소중립산업법은 역외 차별 조항 없는 듯”

이 두 법안은 지난 11일 발표한 녹색 산업 보조금 지원책인 ‘한시적 위기 및 전환 프레임 워크’와 더불어 미·중과 미래 산업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EU의 3대 산업 정책에 해당한다. 이로써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지난 1월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서 밝힌 ‘그린딜(Green Deal) 산업 계획’의 3가지 법안이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 지난 15일 유럽의회 본회의 연설에서 "팬데믹과 전쟁이 우리에게 준 교훈은 우리가 '독립적'이길 원한다면, 유사한 입장을 가진 파트너국들과 공급망을 강화·다각화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주요 외신들은 세계 산업계의 주도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 EU 등 글로벌 3개 경제의 본격적 경쟁의 막이 오른 것이라고 평가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빠르게 블록화하는 세계 경제의 트렌드와 더불어 보호 무역의 흐름이 강화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유럽판 IRA(인플레이션 감축법)로 불리는 유럽연합(EU)의 핵심원자재법 초안이 공개되자 "미국 IRA와 달리 역외 기업에 차별적인 조항이나 현지조달 요구 조건 등이 포함되지 않는다"며 "탄소중립산업법도 EU내 기업과 수출기업에 동일하게 적용될 것 같다"고 평가했다.

유럽연합(EU)이 16일(현지시간) 중국산 의존도를 낮추고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대응하기 위한 핵심원자재법·탄소중립산업법 초안을 공개했다. [그래픽=연합뉴스]
유럽연합(EU)이 16일(현지시간) 중국산 의존도를 낮추고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대응하기 위한 핵심원자재법·탄소중립산업법 초안을 공개했다. [그래픽=연합뉴스]

① 중국을 직접 겨냥한 핵심원자재법=2030년까지 전략적 원자재 의존도를 65%미만으로 낮추는 게 목표

‘핵심원자재법’은 중국과 미국에 맞서 역내 보호장벽을 높인다는 의미에서 ‘유럽판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불린다. EU집행위원회는 원자재법 시행을 통해 2030년까지 제3국에서 얻은 전략적 원자재 의존도를 역내 전체 소비량의 65% 미만으로 낮추는 것을 목표로 제시했다. 사실상 중국을 직접 겨냥한 것으로 평가된다.

EU는 니켈·리튬·흑연·망간·구리·갈륨과 각종 희토류 등 자동차용 배터리와 풍력·태양광 발전 설비 제조에 필요한 총 16종의 핵심 소재를 ‘전략적 원자재’로 규정했다. 이 중 희토류 98%, 리튬 97%, 마그네슘 93% 등을 중국산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원자재를 EU내에서 조달하는 노력을 강화한다. EU는 역내에서 전략원자재의 최소 10%를 채굴하고, 최소 40%를 가공하겠다는 구상을 초안에 담았다.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이를 위해 EU 역외의 제3국도 참여할 수 있는 '전략적 프로젝트'를 설정해 24개월 이내에 인허가가 가능하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이 프로젝트에 민간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한 금융 지원도 검토한다. 아울러 원자재 소비 및 생산국을 망라하고 EU와 비슷한 가치를 추구하는 국가들만 참여하는 ‘핵심 원자재 클럽’을 만들어 공급망 안정을 꾀할 계획이다.

공급망 리스크를 방지하기 위해 기업 규제도 강화된다. 초안에는 직원 500명 이상, 연간 매출 1억5,000만 유로(약 2,100억 원) 이상인 역내 대기업에 대해 공급망 감사를 주기적으로 실시한다는 조항이 있다. 국내 기업 중 배터리 3개 사가 해당될 것으로 관측된다. LG에너지솔루션은 폴란드, SK온과 삼성SDI는 헝가리에 생산 공장을 운영 중이다.

기업에 대한 규제도 강화해, 500명 이상 연매출 1억 5000만 유로 이상 대기업은 공급망 감사를 주기적으로 실시한다. [사진=TV조선 캡처]
기업에 대한 규제도 강화해, 500명 이상 연매출 1억 5000만 유로 이상 대기업은 공급망 감사를 주기적으로 실시한다. [사진=TV조선 캡처]

산업통상부 관계자는 “초안이 수백 쪽에 달해 법률 분석 중”이라면서도 “역외 국가에 대한 차별 조항은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원자재법으로 인해 당장 우리 기업들이 입을 타격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견해도 잇따른다.

미국 IRA법은 ‘세액 공제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북미 지역이나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생산된 원자재를 40% 이상 써야’ 하는 반면, 원자재법은 전략적 원자재의 역내 자급률 목표를 정한 선언적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초안에 담긴 내용이 강제 조항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책 목표와 같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오히려 역내 진출한 우리 기업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장영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유럽팀장은 "초안에 보조금이나 세액공제 액수가 담기진 않는다"며 "역내 각 국가가 보조금 규정을 정할 때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 팀장은 "기금 마련, 인허가 절차 간소화 등 혜택으로 미뤄 역내 진출한 우리 기업에게는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면서도 "탄소중립산업법, 역외보조금 규정, 전략적 파트너십 등 그린 딜 산업 계획으로 추진 중인 다른 법안의 파급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② IRA에 대응하는 탄소중립산업법=8개 청정기술의 점유율을 40%이상으로 올리는 게 목표

탄소중립산업법은 유럽 그린딜 산업계획의 일환으로 친환경 산업 관련 규제 간소화와 기술개발 지원으로 EU 내 생산능력 확대를 목표로 한다. 해당 법안 초안은 태양광 패널과 전기차 배터리, 탄소 포집 및 저장 기술 등 8가지 기술을 ‘전략적 탄소중립 기술’로 규정하고, EU 내에서 이 기술들에 대한 유럽 기업의 시장 점유율을 2030년까지 40% 이상으로 끌어올리기로 했다.

이들 기술 관련 신규 사업에 한해 EU는 인허가 기간이 최대 18개월을 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신규 사업을 위한 투자 시 보조금 지급 절차도 간소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EU에서 신사업의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수년씩 걸려 오던 종전의 관행의 크게 완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발디스 돔브로브스키스 EU 집행위 부위원장은 “이 법안을 통해 EU는 녹색산업에서 리더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지난 15일 유럽의회 본회의에서 탄소중립산업법에 대해 "2030년까지 필요한 청정기술의 최소 40%를 역내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라며, "더 단순한 보조금 지급 제도를 작업 중이며, 세액공제와 EU 기금의 유연한 활용을 허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15일(현지시간) 유럽의회 본회의에 출석해 연설하고 있다. 그는 16일 탄소중립산업법과 핵심원자재법 초안을 공개한다고 밝혔다.[사진=연합뉴스]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15일(현지시간) 유럽의회 본회의에 출석해 연설하고 있다. 그는 16일 탄소중립산업법과 핵심원자재법 초안을 공개한다고 밝혔다.[사진=연합뉴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이러한 조치를 신기술과 신산업 분야에 일정 기간 규제 면제 등을 적용해주는 제도를 의미하는 '규제 샌드박스'로 표현하기도 했다. 유럽 내 친환경 산업의 해외 유출을 막고 보호·육성하기 위한 정책으로 받아들여진다. 탄소중립산업법은 녹색 산업 보조금 지원책(한시적 위기 및 전환 프레임 워크)과 짝을 이뤄 녹색 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와 보조금 지원의 근거를 만들었다.

산업부, “해당 법안이 우리 기업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 평가

이와 관련 산업부는 해당 법안 발표를 예상하고 지난 2022년부터 민관합동, 전문가 등 간담회에서 의견을 수렴해왔다. EU측에도 투자와 인허가, 인센티브 등이 비차별적으로 적용돼야 한다는 점과 노동환경 규범이 조화돼야 한다는 우리측 입장을 개진해왔다.

핵심원자재법과 관련해 국내 배터리 업계는 긴장하고 있다. 헝가리에 생산 공장을 둔 LG에너지솔루션을 포함해 K배터리 3사의 유럽 시장 점유율은 73%인데, 원재료인 수산화리튬 수입의 중국 비중은 지난해 87%에 달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미국 IRA처럼 차별 조항이 없어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지만, 업계에서는 미국처럼 향후 추가적인 세부 규정에 독소조항이 담길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산업부는 우리 배터리 업계에 미칠 위기와 기회 요인 등을 파악하기 위해, 조만간 기업간담회 등에서 세부 사항을 논의할 예정이다. 

현재 발표된 법안은 EU집행위 초안으로 향후 유럽의회와 각료이사회 협의 등 입법과정에 약 1~2년이 소요될 전망이다. 산업부는 업종별 영향과 세계무역기구(WTO) 규범 위반 여부 등을 상세히 분석하고 구체적인 대응 계획을 수립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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