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2월 13일 – 지평리 전투가 시작된 날

지평리 전투 전적비. [사진=윤상구]

 지평리 전투는 치열했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6‧25전쟁 당시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이긴 최초의 전투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유난히도 추웠던 1951년의 겨울, 영하 20도의 혹한 중에 중공군이 경기도 양평의 지평리를 공격해왔다. 중공군은 지평리와 여주 지역을 점령하여 유엔군을 동서로 나누고 서부 전선의 후방을 위협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니 이 지역을 적에게 빼앗기면 전체 유엔군에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 분명했다. 유엔군의 리지웨이 사령관도, 중공군의 펑더화이 사령관도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지평리를 확보해야 했다. 

 지평리 전투를 얘기할 때 프랑스군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1951년 2월 13일 프랑스 대대는 지평리에서 중공군 3개 사단에 의해 고립되었다. 대대와 3개 사단. 1천 명도 안 되는 병력이 2만 명도 넘는 적과 맞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낮 동안에는 포병 사격과 항공 폭격으로 적이 아군 진지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밤 열 시부터 엄청나게 많은 중공군이 호각, 나팔, 꽹과리 등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공격해왔다. 낯설고 시끄러운 소리는 프랑스군을 무척 두렵게 했다. 하지만 전투 경험이 많은 프랑스 대대장 몽클라르 장군은 수동식 사이렌으로 더 큰 소리를 내서 대응했다. 

 참전 프랑스 대대를 연상하면 항상 백병전이 함께 떠오른다. 지평리 전투에서도 어둠과 연기 때문에 눈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백병전을 벌여야 했다. 프랑스 대대원들은 적과 아군을 구별하기 위해 철모를 벗어 던지고 머리에 빨간 수건을 동여맸다. 피아 구분뿐만 아니라 결전 의지의 상징이기도 했다. 중공군은 날이 밝으면 물러났다가 밤이 되면 다시 몰려들었다. 지옥과 같은 전투가 계속되면서 진지 안에는 중공군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이렇게 사흘 동안 벌어진 집요하고도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프랑스 대대는 중공군을 격퇴하고 방어 진지를 끝까지 지켜냈다. 

 기록은 이렇게 간단하고 쉽지만 당시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목숨을 내건 채 적과 몸싸움을 벌이는 프랑스 군인들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나를 비롯하여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이 그 모습을 비슷하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보이는 적도 무서운데 칠흑같은 어둠 속, 적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언제 나를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 낯선 이국에서 맞닥뜨린 낯선 지형과 낯선 소리, 대부분 어린 청년이었을 그들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게다가 중공군과 싸운 모든 유엔군은 엄청난 공포심을 유발하는 공통된 상황을 겪어야 했다. 

“중공군은 죽여도 죽여도 그들의 시체를 밟고 파도처럼 계속 몰려왔다.” 

 지평리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몽클라르 장군의 탁월한 지휘였다. 몽클라르 장군은 프랑스군 파병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프랑스는 한국에 병력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랄프 몽클라르 중장은 특수 부대를 만들어 한국에 보내자고 군 수뇌부를 설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몽클라르 장군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병을 모집하고 1,300여 명에 달하는 지원병을 선발하였다. 그런데 국방부에서는 몽클라르 장군이 지휘관으로 한국에 오는 것을 반대했다. 

“미국의 대대는 육군 중령이 지휘하는데 중장인 당신이 어떻게 대대장을 할 수 있겠는가?”   몽클라르 장군은 스스로 장군직을 버리고 중령 계급장을 달겠다고 말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참전할 수 있다면 중장 계급장을 떼고 중령이 돼도 좋습니다.”

 그때 태어난 몽클라르 장군의 아들 롤랑 몽클라르 씨가 지난해 11월 11일 ‘턴 투워드 부산’ 행사 참석차 한국에 왔다가 지평리 전적지에 들렀다. 이미 70세를 넘긴 롤랑 몽클라르 씨도 아버지의 6‧25전쟁 참전에 긍지를 가졌음에 분명하다.  

지평리 전투 UN군(프랑스군, 미군) 승전 충혼비. [사진=윤상구]

프랑스군과 백병전을 함께 연상하게 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지평리 전투에 앞선 1951년 1월 5일, 중공군에 밀려 국군과 유엔군이 북위 37도선까지 후퇴하고 있을 때 프랑스군이 배속된 미 제2사단은 북한군 3개 사단을 무찌르고 원주를 되찾았다. 당시 원주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적군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은 커다란 전과였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대대는 온몸으로 적의 대규모 공격을 막아냈다. 어둠을 뚫고 개미 떼처럼 몰려드는 중공군에 진지가 뚫리고 적군과 뒤엉켜 싸우는 백병전이 벌어진 것이다. 치열한 백병전을 치른 끝에 적을 크게 물리친 용맹한 프랑스 대대를 사단 지휘부에서 크게 칭찬하고 훈장을 수여했다. 그때 몽클라르 장군은 별 것 아닌 것처럼 한 마디 던졌다고 한다. “뭐라고? 우리 병사들이 한 총검 돌격은 보병 전술의 기초 중의 기초잖아. 그런데 저 미국 사람들은 그걸 가지고 웬 난리인 거지?”  

당시 미군은 총검을 들고 돌격하는 것을 이미 옛날식 전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프랑스군의 활약을 본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총검이 단지 통조림 깡통을 따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든 장병은 유의해주기 바란다.”  

 32개월 동안 약 8,200여 명이 교대로 참전했던 프랑스 대대 전 병력의 1/5이 전사, 부상 등 피해를 입었다. 이 숫자만 봐도 당시 프랑스군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투에 임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지평리 전투는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승리의 상징적 전투로 남아 있다.

황인희 작가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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