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전 의원의 지지가 국민의힘 당권경쟁의 새로운 승부처로 부상하고 있다. 김기현-안철수 후보가 팽팽한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가운데, 김 후보가 지난 3일 저녁 나 전 의원 자택을 찾아가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다.
김 후보의 이 같은 행보를 두고 정치권 일각에서 '학폭 가해자가 피해자의 협력을 요구하는 사태'라는 식의 비판이 제기되고 있지만, 나 전 의원은 일반적 예상보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나경원, 김기현의 지지 요청에 ‘숙고 모드’ 돌입...안철수도 연대 손짓 보내
김 후보는 4일 SNS를 통해 “어제(3일) 저녁에 (나 전 의원) 집으로 찾아뵀다. 윤석열 정부의 성공과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 힘을 합치자”고 말했다. 이에 나 전 의원은 “윤석열 정부의 성공과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 '영원한 당원'으로서 해야 할 역할에 관해 숙고해보겠다”고 전했다. 김 후보는 특히 “지난 20년 세월 동안 당(黨)을 같이 하면서 보수우파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동고동락했던 동지였기에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안 후보도 나 전 의원을 향해 연대의 손짓을 보내고 있다.
안 후보는 4일 경기도 일산서구청에서 열린 경기 고양정 당협 행사 후 김 후보가 나 전 의원의 지지를 요청한 데 대해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나 전 의원이 어느 정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래서 (김 후보가 나 전 의원과) 미리 약속했는지 사실 그게 좀 궁금했다”고 대답했다.
“나 전 의원과 연대를 타진하고 있나”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나 전 의원이 어느 정도 시간을 달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지금 나 전 의원은 몸과 마음을 먼저 추스르고 당(黨)의 일은 그 다음에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설명이다. 안 후보의 답변을 종합해보면, 안 후보도 나 전 의원에게 연대를 타진하려고 했으나 만날 약속을 잡지 못했다는 정도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은 나 전 의원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는데, 김 후보가 나 전 의원과 사전약속을 하지 않은 채 불쑥 찾아가서 지지를 압박했다는 지적으로도 들린다.
불안한 양강 구도, ‘나심’ 향배가 변수...‘나심’ 시나리오는 크게 3가지
이처럼 ‘나경원 연대’에 매달리기 시작한 것은 ‘양강 구도’의 불안정성 때문이다. 현재 국민의힘 지지층을 대상으로 한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김 후보가 하락세를 타고 있는 반면에 안 후보가 상승세를 타면서 1위 후보로 부상 중이다. 하지만 100% 당원 여론조사로 결정되는 3.8 전당대회의 표심은 아직 유동적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어떤 변수가 부상하느냐에 따라 판세가 요동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일단은 안 후보가 불출마를 결정한 나 전 의원과 유승민 전 의원의 지지층을 상당 부분 흡수하는 흐름이다. 유 전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한 지난 달 31일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도 이 같은 추세는 유지됐다.
여론조사 업체 리얼미터가 미디어트리뷴 의뢰로 지난달 31일과 지난 1일 전국 성인 남녀 1,005명(국민의힘 지지층 42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안 후보는 국민의힘 지지층에서 43.3%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직전 조사(1월 25∼26일)보다 9.4%포인트 상승한 수치이다. 이에 비해 김 후보는 36.0% 지지율을 기록해 2위에 머물렀다. 직전 조사 지지율 40.0%보다 4.0%포인트 하락한 수치이다.
김기현-안철수 간 가상 양자 대결을 전제로 한 질문에서도 안 후보는 직전 조사 대비 8.1%포인트 증가한 48.9%, 김 후보는 직전 조사 대비 3.6%포인트 감소한 44.4%로 집계됐다(이 조사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나 전 의원의 지지 선언은 이처럼 팽팽한 양자대결 구도의 균형을 깰 변수로 주목된다. 고민에 빠진 ‘나심’의 방향은 크게 세 가지이다.
시나리오 1=나경원, 불출마 선언 때처럼 전당대회 불개입 원칙 고수
첫째, 불출마 선언 당시의 입장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김 후보와 안 후보 중 누구에 대해서도 지지 선언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나 전 의원은 지난 달 25일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김기현과 안철수 중 한 명을 지지하거나 도울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거듭 말씀드리지만 불출마 결정에 있어서 어떤 후보나 다른 세력의 요구, 압박 등에 의해 결정한 것은 아니다. 제 스스로 당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정했고 앞으로 전당대회에 있어 어떤 역할을 할 공간은 없다. 역할을 할 생각도 없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단언했다.
친윤계의 압박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의해 불출마를 결정한 만큼, 전당대회에서 자신의 역할은 없다고 못을 박은 것이다.
그러나 지난 3일 김 후보가 집에 찾아와 지지를 요청했을 때 발언은 전혀 다르다. “윤석열 정부의 성공과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 '영원한 당원'으로서 해야 할 역할에 관해 숙고해보겠다”고 말했다는 게 김 후보의 전언이다. 따라서 김 후보의 지지 요청을 거부한다면, 불출마 선언 당시의 ‘전당대회 불개입’ 입장을 유지한다는 명분을 고수하는 형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시나리오 2=나경원,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명분으로 김기현 지지 선언
둘째, 나 전 의원이 김 후보 요청대로 지지 선언을 할 가능성이다. 나 전 의원은 친윤계의 정치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출마할 것이라는 일반적 예상을 깨고 불출마를 선택했을 때도, ‘윤석열 정부의 성공’과 ‘영원한 당원’임을 강조했다.
나 전 의원은 이 두 가지가 가장 큰 가치임을 강조함으로써 불출마의 명분을 제시했다. 그런데 김 후보가 당대표가 되고 친윤계 중심으로 지도부가 구성될 경우 내년 총선에서 수도권 득표력이 약화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김기현이 당대표되는 게 안철수보다 훨씬 총선에서 유리하다”는 평가를 숨기지 않고 있다. 김 후보가 당대표가 되면 국민의힘 수도권 득표력이 약해지고, 안 후보가 당대표가 되면 국민의힘 내부 갈등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나 전 의원이 불출마 선언 때처럼 윤석열 정부의 성공이라는 가치를 강조하면서 김 후보를 지지하는 선택을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시나리오 3=나경원의 안철수 지지 선언...대통령실 등의 안철수 비판으로 가능성 소멸
셋째, 나 전 의원이 안 후보 지지를 선택하는 시나리오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시나리오가 실현될 가능성은 낮다는 게 일반적 분석이다. 친윤계 인사들 그리고 대통령실까지 나서서 안 후보가 ‘윤심’과 무관한 후보라는 입장을 일제히 강조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신평 변호사는 3일 페이스북에 ‘윤석열 대통령과 안철수 의원’이란 제목의 글을 올려 “아마 무난하게 김기현 의원이 윤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책임당원들의 견고한 지지를 얻어 당대표에 당선될 것이다”면서 “그러나 만약에 안 의원이 당대표가 된다면 어찌 될 것인가?. 경우에 따라서 윤 대통령은 국힘당을 탈당하고 정계개편을 통한 신당 창당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윤 대통령은 안 후보가 당 대표가 될 경우, 국민의힘을 여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인 것이다. 김 후보의 후원회장이기도 한 신 변호사의 이 같은 발언을 백 퍼센트 신뢰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통령실이 4일 직접 나서서 안 후보의 행태를 비판함으로써 안 후보는 ‘비윤 후보’라는 점을 분명하게 규정하는 분위기이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이날 조선일보와의 통화에서 안 후보가 ‘윤안연대’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 대해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동급이 될 수가 없을뿐더러 엄연히 급과 격이 다른데 대통령과의 연대를 말하는 것 자체가 무례하고 어패가 있다”면서, 향후 안 후보가 지속적으로 ‘윤안연대’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공개적으로 엄중 경고하겠다는 방침이라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대통령실의 이 같은 발언은 안 후보가 ‘윤심 후보’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나 전 의원이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강조하면서 안 후보 지지를 선언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은 완전히 소멸됐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