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석우 객원 칼럼니스트

계묘(癸卯)년 새해가 밝았다.

78년 전 우리 어버이들은 해방의 기쁨을 누렸지만, 이밥에 고깃국의 꿈이 절실하였다. 해방 후 5년 만에 6.25남침으로 또다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수백만의 인명피해를 당했고, 천만 이산가족이 생겼다. 전 국토는 폐허가 되었다. 민족 대이동과 함께 달동네 판잣집들이 일상의 모습이었다.

3년 이상을 끌던 대치 전선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체결로 멈췄다. 침략군을 척결하지 못한 전쟁이었기에 참전했던 미국 군인들은 귀국 후 시가행진도 벌이지 못하고 조용히 귀향하였다. 20세기 세번째 세계대전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시민들은 제2차대전 후 모처럼 얻은 평화 분위기가 깨지자 짜증을 냈다. 그래서 6.25 한국전쟁은 거론하기 싫은 ‘잊혀진 전쟁(fogotten war)’으로 남았다. 미국 워싱턴 광장에 베트남전쟁 참전 기념비보다도 한참 후에야 한국전 참전 기념비가 세워진 연유를 유추할 수 있다.

1989년 동유럽 공산권이 도미노처럼 무너지자 한국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바뀌었다. 승부 없는 전쟁이 아니다. 한반도에서 침략을 막지 못했더라면 일본열도도 바로 공산화되고, 아시아 전역에 자유민주주의는 발을 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 전 세계 판도가 전혀 딴판으로 되었을 것이다. 1995년 7월 27일 미국 워싱턴 광장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 착공식 연설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한국전쟁을 ‘승리한 전쟁’이라고 선언하였다. 1950년 6월 침략자를 격퇴하자는 유엔 결의에 응해서 전 세계 주요국들이 파병하고 지원해준 덕으로 대한민국은 안전을 지켜냈고, 그 위에서 국가건설을 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를 입헌군주제로 바꾸자는 청원에 앞장서서 국사범으로 복역했던 개화주의자 이승만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다음에는 독립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국익과 정의를 위해 완강하게 버텨낸 의지, 그리고 국제정치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자유민주주의 독립을 추구했던 혜안은 시간이 갈수록 그 진가가 드러나고 있다. 1917년 레닌의 공산 정권이 전 세계적으로 세력을 확산하고 있을 당시, 하와이 임시정부를 이끌던 이승만은 이미 1923년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라는 논설을 통해 공산주의의 평등사상을 평가하면서도 결국 실패할 것으로 예견하였다. 해방되고서도 미국 국무부 안의 알저 히스(Alger Hiss)와 같은 소련 첩자들의 농간으로 방해받다가 맥아더 장군의 도움으로 어렵게 귀국하여 대한민국 건국 작업의 중심이 되었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결사 항전을 독려하였다.

한국전쟁에 대해 미국 시민들의 피로감이 쌓일 때 아이젠하워가 한국전 휴전을 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3년 3월 스탈린의 사망을 계기로 휴전협정을 졸속 타결하려 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고 단독 북진통일까지 주창하였다. 아이젠하워가 놀라서 한밤중에 깨어날 정도였다.

결국,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이승만에게 약속하고서야 7월 27일 휴전협정을 타결할 수 있었다. 아시아대륙 끝 작은 반도국과 동맹을 맺어주었다. ‘휴전하면 미군은 철수한다’는 공식을 깨뜨리고 붙들어두었다. 이 인계철선 때문에 대규모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이승만이 미국과 벌인 외교력은 김일성과 친했던 시아누크 공도 감탄하였다. 다른 신생국 지도자들보다 한 수 위의 거인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미국이 보장하는 안보의 성채 안에서 대한민국 국민은 피와 땀을 흘려서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정치 민주화까지 성취하였다. 한국인들의 노력이 미미했다면 국제사회의 지원이 아무리 컸던들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2차 대전 후 선진국들이 수천억 달러 원조를 아프리카·아시아의 신생국들에 제공했으나 성공한 사례는 없었다.

반면, 한국인에게는 불행을 극복하고 발전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이제는 DNA로 체화되었다. 한미동맹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해가 지날수록 본궤도에 올라 질풍노도와 같은 성장 동력으로 작용했다. 한국은 이제 전 세계적 판도에서 중추국가가 되었다. 원조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발전하였다. US 뉴스·월드 리포트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Most Powerful Countries) 중 한국을 6번째 나라로 평가하였다. 미국, 중국, 러시아, 독일, 영국에 이은 강국이다. 그다음 7번째로 프랑스, 8번째로 일본을 꼽았다.

코로나19 사태와 우크라이나사태로 인해 세계 경제가 어두운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딛고 있는 바닥은 허약하지 않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선두 그룹을 이루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녹아있는 정신 자세다. 자신감이라는 자산이 중요하다. 해방 후 상당 기간 우리는 앞선 나라들을 따라갈 수 없다는 좌절감, 열등감이 팽배했었다. 산업근대화를 위해 피와 땀을 흘리고, 전 세계에 진출하여 무역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이제는 남들이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못할 리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한 단계 더 뛰어넘고 있다. 남들을 따라가는 데 머물지 않고, 선도(先導)할 단계에 이르렀다. 이를 위해서는 창조적 능력이 더 필요하다. IT, 바이오, 우주, 해양과 같은 첨단 분야에 적극적으로 진출해야 한다. 앞선 초일류국가와 경쟁하는데도 겁을 내서는 안 된다. 적극적인 자신감이 필요하다. 다행히도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젊은 세대가 세계를 누비며 얻는 자신감이 그러한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한·중·일 3국 가운데 한국의 젊은이들이 해외여행을 가장 많이 한다. 앞선 세대에 비해 크게 진화하였다.

그러나 진취적 흐름에 역행하는 걸림돌도 남아있다. 좌파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수구적인 사고에 젖은 사람들이다. 전향하지 않는 종북 주사파처럼 3대 세습 북한 정권의 독재에 침묵하고 북한 주민의 비참한 인권유린에 외면하는 사람들이다.

민노총을 움직이는 간부들도 그러하다. 법에 보장된 노동쟁의의 틀을 벗어나 정치적 요구를 앞세우고, 때로는 폭력 행사도 불사한다. 국가보안법 폐지 요구와 같은 북한 정권의 주장을 대변하기도 한다. 북한 직업총동맹의 연대사(連帶辭)를 받아서 뻐젓이 홈페이지에 게재한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연말 화물연대 총파업 시도를 과감하고도 현명하게 극복하였다. 근로조건이나 권익향상을 위한 노동쟁의라기보다는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 쟁의에 대해 법과 원칙으로 대응하였다. 민노총의 탐욕적인 정치투쟁에 신물이 난 일반 국민이 박수를 보낸다. 국민은 법과 상식이 통하는 법치주의를 원한다.

근로자의 권익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투쟁으로 사회를 뒤흔드는 민노총의 떼쓰기 쟁의행위가 판치게 해서는 안 된다. 귀족노조가 이끄는 떼쓰기는 이제 그칠 때가 되었다. 한국경제와 사회의 도약을 막는 장애가 되었다. 노동·연금·교육이라는 3대 국정과제에 대해서도 정권 차원을 넘어서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미래세대가 짊어질 빚더미를 줄여서, 희망찬 나라를 물려줘야 한다.

법과 원칙이 지배하고 건전한 상식이 통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지켜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선진국이다. 국제사회에서 세계 초일류국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글로벌 중추국가로서 전 인류에 공헌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김석우 객원칼럼니스트(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 전 통일원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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