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전 조달청장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비잔틴 제국의 쇠망과 더불어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그리스의 학자와 책이 대규모로 이탈리아로 옮겨왔는데, 그 당시 프란체스코 필렐포란 학자가 “그리스는 망하지 않고 이탈리아로 이민왔다<문명이야기 5-2>.”고 말할 정도였다.

비잔틴의 멸망당시 교황은 니콜라오 5세로 평민 출신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어 어렵게 살았는데, 피렌체에서 가정교사를 하며 볼로냐 대학의 학비를 벌었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서 가정교사를 되풀이하는 어려운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신학박사학위를 획득한 후 평생의 은인인 볼로냐 대주교 ‘니콜로 델리 알베르가티’에게 발탁되어 주교관의 살림을 맡게 되었다. 대주교 덕택에 피렌체에 망명해 있던 에우제니오 4세 교황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고, 많은 인문학자들과 교제할 수 있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어서 자신의 인품과 실력이 유일한 재산이었고, 겸손한 말씨와 행동은 그가 출세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훗날 교황이 되고서도 그러한 태도는 변함이 없었고, 자신이 교황까지 올라간 것이 믿기지 않았던지 “주교관의 가난한 심부름꾼이 교황이 될 줄이야 누가 짐작했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문명이야기 5-2>한다. 배우기를 좋아해서 돈이 생기면 책을 사는 데 다 썼으며, 위대한 책들을 볼 수 있는 도서관 건립을 꿈꾸기도 했다. 

  교황의 학문 진흥 및 로마의 도시정비
  교황이 된 후에는 학문진흥에 앞장섰다. 아비뇽과 교황분열로 잃었던 위신을 학문후원 등 교회의 사회기여에서 되찾으려 한 것 같다. 정치적 목적도 있었겠지만 학문을 좋아했던 그에게는 자연스런 것이었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몰락이 예견되자 소중한 그리스 문화를 보전하는데 애를 썼다. 1450년 희년행사로 교황청의 재정이 나아지자 르네상스 정신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리스인 게오르그에게 명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1450년)를 그리스어 원문에서 직접 번역하도록 했는데<김혜경,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니콜라오 교황 때 번역된 그리스 작품이 그 이전 500년 보다 많다는 주장을 하는 작가(마네티)도 있었다.  

그는 건축가이기도 해서 로마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희년행사에 로마로 오는 순례자들에게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을 보여주려 했는데, 교황의 자리를 빛내고 순례자들의 신앙심을 고취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도시의 성벽과 문들을 복구하고 수도관을 고치며 도로와 다리를 수리했다. 여러 성당을 보수하면서 교황청 궁전을 새로 건립했으며, 낡은 성베드로 성당을 허물고 베드로의 무덤위에 세계에서 가장 위풍당당한 교회를 세울 계획을 세웠다. 이 목표는 60년 후에 율리우스 2세 교황이 이루게 된다. 교황이 되어 수집한 장서가 5천권에 이르자 바티칸도서관을 지어 자신의 꿈을 실현했다. 

  신이 사랑한 사람: 재정 및 정치적 문제 해결
  그는 신이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1450년 희년 축제에서 순례자들이 넉넉한 봉헌물을 가져왔기에 그가 지은 건축물의 비용과 학자와 필사본을 위한 모든 비용을 감당했다. 그러고도 많은 돈이 남아서 메디치은행에 저축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펠릭스 5세 대립교황을 사퇴시켰고 바젤공의회가 해산되어 교회분열이 치유되었다. 알프스 북쪽에서 교회개혁요구가 있었지만 학문의 진흥으로 그 예봉을 피해갔다. 그는 교회 안에는 평화를, 로마에는 질서와 영광을 회복하였다.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고 친척등용을 피했으며 이탈리아의 내분을 막기위해 노력했다.

넉넉한 재정을 확보했으면서도 개인적으로 검소하고 책을 사랑하는 소박한 삶을 살았다. 다만 학자들에게 선물할 때만 돈을 넉넉히 썼는데, 사양하는 사람에게 “받으시오 니콜라오 교황이 영원히 당신 곁에 있지 않을 거요”라며 권했다고 한다. 후세에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가장 고상한 교황으로 평가받게 되었고<교황사전>, 연대기 작가는 “모든 미덕을 부여받아 지혜롭고 정의롭고 인자하고 품위있고 평화롭고 애정이 깊고 자비롭고 겸손한 학자 교황이라”고 기술했다<윌듀런트, 문명이야기 5-2>.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교황의 부끄러움
  그는 완벽한 교황으로 소임을 마칠 것 같았다. 그러나 신의 눈에는 2%가 부족했었던 것 같다.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성소피아성당이 이슬람 사원이 되었다는 소식에 교황은 큰 충격을 받았다. 로마제국의 마지막 불씨가 꺼진 것이다. 이제까지 자신이 이룩한 그리스 문화 수용 등 모든 업적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1년 전에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11세가 간절하게 원조요청을 했지만 교황에게는 비잔틴이 밑 빠진 독같이 보였다. 1444년 십자군이 참여한 바르나전투와, 뒤이은 코소보전투에서도 기독교 측이 졌다. 각자도생하는 서유럽의 군주들은 비잔틴 문제에 개입하기를 꺼렸다. 또한 투르크의 막강한 군사력과 욱일승천하는 기세를 감안할 때 소규모 군사 지원으로 비잔틴제국을 살려낼 수 없을 것 같았고, 교황자신이 비잔틴의 몰락을 예견하기도 했다<에드워드기번, 로마제국쇠망사>.

그렇다고 비잔틴 측이 로마 교회에 협조적이지도 않았다. 전임 비잔틴 황제가 1439년 7월에 맺은 교회통합원칙을 지키지 않고 있어, 원조를 받으려면 약속부터 지키라고 요구했다. 그 후 투르크의 공격이 개시되고 비잔틴 사람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소식에 니콜라오 교황이 십자군을 결성하라는 지시를 하였으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서유럽의 군주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였다. 교황도 단독 함대 구성 등 단호한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동방 무역에 이해관계가 많은 베네치아도 혼자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투르크와의 협상을 저울질하며 머뭇거렸다. 그러는 사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다. 

비잔틴 황제가 적당히 싸우다가 항복했다면 “그럴 줄 알았어” 하며 그렇게 자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상실은 아깝지만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흐름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비잔틴 측이 7천명의 적은 병력으로 20배가 넘는 투르크군의 공격을 53일이나 방어하고 마지막에 황제가 장렬히 전사하면서 무너지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십자군 함대를 조금만 일찍 보냈더라면 콘스탄티노플을 지킬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한탄을 하게 되었다. 

  너무나 아쉬운 콘스탄티노플 상실
  역사의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애당초 서유럽 군주들은 콘스탄티노플의 가치를 너무 낮게 평가했던 게 아닐까. 적은 병력으로 수십 배의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이고, 동방 및 흑해지역 국가들과의 무역을 중계할 수 있는 요충이며, 군사적으로도 유럽의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를 승인한 콘스탄티누스1세 황제가 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은 도시였다. 중세시대에 유럽문명의 상징이자 기독교 문명의 자랑거리였다. 서유럽이 단합만 했다면 적은 군사지원으로 동쪽의 이슬람 세력의 공세를 막고 경제적 이익을 취하며 유럽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조건 없는 지원
  더욱이 교황은 기독교를 대표하는 성직자다. 당연히 다음과 같은 비판이 따를 수 있다. “같은 기독교를 믿는 이웃이 죽어가고 있는데 우선 살려 놓고 나서 교회통합 등을 논하는 게 올바른 순서가 아닌가. 비잔틴 측도 “원군을 보내줘야 백성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로마제국을 계승하고 있고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위급한 상황을 이용해서 카톨릭의 의례를 강요한 로마 교황청은 너무 잔인하지 않는가? 먼저 도와 줘서 비잔틴 사람들의 마음을 사고 나서 교리 논쟁을 했어야 했다.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길이다.” 

  국가는 계산만 했지만 개인은 가슴으로 전쟁에 나서 
  당시 서유럽 국가들은 나서지 않았지만 용병 및 개인자원병들은 용감하게 싸웠다. 많은 서유럽의 젊은이들이 콘스탄티노플을 방어하다가 죽음을 당했고, 제네바의 주스티니아니는 마지막 방어전에서 중상을 입었으며, 베네치아 대사는 아들 및 6명의 베네치아인과 함께 술탄 앞에서 처형당했다<시오노나나미, 바다의 도시이야기>. 비잔틴제국의 패망은 교황과 서유럽 군주들에게 부끄러움을 준 사건이었다. 

그래도 교황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기 위한 십자군 결성을 외쳤다. 천연의 요새를 되찾으려면 방어할 때에 비해 수십 배의 병력이 필요하다. 역사적인 도시의 상실에 너무나 가슴 아파서 그런 현실성 없는 주장을 했을 것이다. 당연히 각자의 이익을 위해 서로 다투고 있는 서유럽 군주들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였다. 니콜라오 5세 교황은 대의를 잃어버린 서유럽의 현실을 한탄하며 1455년 58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부끄러움을 잃은 시대
  우리 사회도 각자도생하며 부끄러움을 잃어가고 있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야당지도자가 대통령을 거짓말쟁이라고 욕하고, 큰 사고가 터졌는데도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대의는 사라졌고 정치는 계산만 하며 작아지고 있다. 우리 사회의 부끄러움을 어떻게 회복해야할지 걱정이다.  /김상규 전 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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