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석우 객원 칼럼니스트

프란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그의 저서 ‘신뢰(Trust)’에서 지구상의 최대강국 미국은 신뢰가 시스템으로서 작동하는 사회라고 하였다. 일본도 비슷한 선진사회로 보았다. 그러나 한국이나 중국은 아직 신뢰 사회라기보다는 혈연, 지연이 더 중시되는 사회라고 평가하였다.

15세기에 시작한 대항해 시대에 서유럽 문명권의 눈에는 조선의 존재가 들어오지 않았다. 마젤란 함대가 1521년 동아시아에 도달한 이후 유럽의 범선들이 필리핀, 중국, 일본에 도착했어도 반 폐쇄해 안에 있던 조선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은 은자의 나라(Hermit Kingdom)로 불렸다. 좋은 의미라기보다는 한구석의 뒤쳐진 나라라는 뜻이다.

일본의 봉건 영주들은 중세에서 근세로 옮겨가는 시기에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조총을 사들였고,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조선은 쑥대밭이 되었다. 조선은 다시 1637년 병자호란의 화를 당하였다.

외국의 계속된 침략으로 피폐해진 조선 사회는 바깥세상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근본적으로는 폐쇄된 지리적 위치가 선진 문명을 직접 볼 기회를 막은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

165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스페르베르호가 타이완 남쪽 가오슝(高興)에서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로 항행하던 중 태풍을 만나 제주도 모슬포에 표착하였다. 선원 하멜이 조선에서 13년을 고생한 후 탈출 귀국하여 밀린 급료를 받기 위해 조선에서의 생활을 적은 기록을 회사에 제출하였다. 조선을 서양에 소개한 최초의 안내서, 하멜표류기다.

교통의 발전으로 상호 교류가 쉬워지는 세상인데도 조선은 더 고립되어 갔다. 오직 중국과의 조공체제 속에서 서양 문물을 간접적으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조선 사회 내부적으로는 노비제도가 극심하였다. 일반적으로 전쟁포로나 적국 주민들을 노예로 삼은 데 비해 조선에서는 동족을 노비로 삼았다. 세종 시대에는 여자 노비의 자식도 모두 노비로 삼아서, 늘어난 노비의 숫자가 인구의 4할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 영향이랄까 일반 서민들의 양반에 대한 비호감이 컸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탈춤도 조선 신분제 사회의 부조리를 그려서 양반문화를 풍자하는 내용이다. 임진왜란 때 한양을 버리고 먼저 도망간 양반층을 저주하던 서민들이 일본군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그 당시 조선에는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이 희박하였다. 유럽 대륙에서도 민족 개념이 태동한 것은 19세기 초반 나폴레옹이 국민개병제 군대로 대륙을 휩쓴 이후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사대 의식은 심해졌고, 사대부들은 물산에 힘을 기울이기보다는 주자학의 형식 논리에 빠져들었다. 자기 당파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구실로 왕실의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고 박 터지게 싸웠다. 공리공론으로 진을 뺀 셈이다. 조선이 망하던 시기엔 국왕조차 내탕금에 골몰하여 외세에 맞설 국력 신장이나 백성의 민생문제는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백성은 무기력한 채 게으름의 늪으로 빠졌다.

영국의 이사벨라 비숍 여사가 4년 동안 한반도를 답사하고 발간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조선인에 대해 우호적이었음에도, 더럽고 게으른 백성으로 그렸다. 두만강을 건너서는 같은 민족이 아닐 정도로 근면한 조선인들을 보고 놀랐다.

조선 시대에 신분제도로 오랫동안 굳어졌던 사회적 갈등은 일본 식민통치의 반사효과로 많이 사라졌다. 과거의 천민 계급도 없어졌다. 차별의식은 상당 기간 지속되었으나, 해방 후 6.25동란을 통한 민족대이동으로 거의 완벽하게 사라졌다. 이제는 누가 백정이나 뱃사람의 후손인지 구별할 수도 없고, 구별하지도 않는다. 광대는 오히려 현대 대중매체 시대에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우상이 되었다. 신분 차별이 사라졌다.

중견국 중에서 한국만큼 차별 없는 사회는 없다. 인도는 헌법으로 카스트에 의한 차별을 금지하였어도 불가촉천민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일본의 경우 2백만 명이 넘는 부라쿠민(部落民)이라는 천민에 대한 차별이 아직도 사회적 문제다. 재일 한인보다도 사회적 지위가 낮다. 또한, 일본 국회의원 4명 중 1명이 세습정치인인 점도 한국 사회와는 크게 다르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한국처럼 신분 상승이 쉬운 나라는 없다. 영국 같은 전통사회에서는 상·중·하의 3단계 분류에서 한 계층을 올라가는데 평균 3세대가 걸린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한 세대 만에도 하층에서 상층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이러한 역동성이 한국의 사회·경제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한국 사회의 신분제도와 차별의 해소는 큰 틀에서는 서양으로부터 '자유' 개념을 받아들인 결과로도 볼 수 있다. 폐쇄사회가 개방사회로 변화하는데 상응하여 성숙해온 것이다.

그러나 옆 나라 일본과 비교하면 아직도 결정적 취약점이 남아있다. 거짓말이 너무 성행한다는 점이다. 해소하는 데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범죄통계를 분석하면 한국은 일본보다 사기·횡령·무고와 같은 거짓 관련 범죄가 수십 배 이상 더 많다. 신용사회의 척도로 볼 수 있다. 일본과 비교하면 한국은 사회변동이 심했다. 특히 근대에 들어서는 일본의 식민통치, 6.25, 4.19. 5.16, 5.18, 6.29와 같은 격변이 이어졌다. 격변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거짓말의 습성이 만연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제 국민소득도 선진국 수준이 되었고, 정치 민주화도 달성하여 사회가 안정되어감에 따라 그러한 취약점도 점차 개선될 것이다. 개선되기 전에는 선진사회라고 할 수 없다.

한반도의 북쪽은 어떠한가? 소련의 후견하에 김일성이 공산주의 체제를 추구했지만, 3대 세습을 통해 봉건사회로 후퇴하였다. 평등사회를 표방했지만, 기본적으로 주민들을 핵심계층, 적대계층, 동요계층의 3대 계층으로 나누고, 또다시 55개로 세분하여 계급사회를 만들었다. 6.25당시 한국군 포로들은 최하위 계급으로 만들었다. 아오지 같은 탄광에 보내서 평생 강제 노역시켰다. 그 자손들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대학 진학은 꿈꿀 수 없다.

마르크스가 예언했던 공산주의 사회의 도래는 역사의 법칙이 아니었다. 그 실험은 1989년 실패로 끝났다. 그동안 수천만 명을 학살하거나 굶겨 죽였을 뿐이다. 북한 정권도 수백만 명을 굶겨 죽이고 수십만을 강제수용소에 처넣었다. 김씨 일가의 철저한 독재와 새로운 계급의 착취체제를 굳혔다.

그러한 북한 정권이 ‘우리민족끼리’ 구호를 외치면서 반일과 반미운동을 선동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 추종 세력이 한국 사회에 똬리를 틀고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김씨 일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종북 주사파다. 철 지난 이념의 포로가 되어 빠져나오질 못한다. 골수 깊이 볼셰비키 사고에 젖어있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은 정당화된다고 본다. 그래서 거짓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사과도 하지 않는다. 거짓과 선전 선동으로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암 덩어리다.

그들이 광우병 사태를 일으켜 이명박 정부를 식물화하고 촛불 데모로 박근혜 정부를 탄핵으로 몰아 정권까지 탈취하여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하자마자 퇴진을 요구하며 제2의 광우병 사태를 부추기고 있다. 민노총이 주도하는 불법파업으로 한국경제를 마비시키려 한다.

상식을 가진 시민들의 여망을 반영하여 정부가 엄정 대응해야 한다. 사회적 암 덩어리를 퇴치하여 거짓과 선전 선동을 극복할 때 한국은 법치주의가 서고 신뢰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비로소 진정한 선진사회가 될 수 있다.

김석우 객원칼럼니스트(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 전 통일원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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