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국제 천연가스(LNG) 가격이 1년 전보다 200% 가까이 폭등했다. 러시아가 유럽에 대한 가스 공급을 끊어버리면 가격 폭등이 심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도 수급부족과 요금폭등과 같은 ‘가스 대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액화천연가스(LNG) 국제 가격과 원·달러 환율 급등으로 도시가스 요금이 다시 인상될 전망이다. 정부는 10월 이미 예정된 가스요금 인상 외에 추가 인상을 하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액화천연가스(LNG) 국제 가격과 원·달러 환율 급등으로 도시가스 요금이 다시 인상될 전망이다. 정부는 10월 이미 예정된 가스요금 인상 외에 추가 인상을 하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정부는 “국내 천연가스 도입 물량의 80% 이상은 장기계약이라, 수급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러시아발 가스 대란에 한국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최대 수입국 호주의 수출 제한 가능성...장기계약 파기 사례도 속출

우리나라는 지난해 4천6백만 톤의 천연가스를 수입했다. 세계 3위의 수입국에 해당한다. 이중 올해 상반기 한국의 호주 LNG 수입액은 60억6800만달러로 전체 수입국 중 1위다. 이어 카타르(36억3100만달러), 미국(25억800만달러), 오만(23억1500만달러), 말레이시아(22억4200만달러) 등의 순이다. 지난해까지는 매년 카타르 수입액이 호주를 앞서 1위를 차지했었다.

올들어 한국의 최대 LNG 수입국이 된 호주가 내년도 가스 공급량이 부족해질 것으로 보고 선제적으로 수출 제한을 검토하고 나선 상황이다. 러시아산 물량은 없지만, 올겨울 가스 대란을 걱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천연가스 가격 급등에 따라, 과거 낮은 가격에 체결된 천연가스 장기계약이 파기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어 주목된다.

12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다국적 원자재 거래회사 ‘SEFE 마케팅 앤드 트레이딩’은 인도 국영 가스회사 ‘게일’과의 장기계약에 따른 천연가스 공급을 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천연가스 가격이 치솟자, 다른 업체와 현물 시장 가격으로 새롭게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이같이 기존 장기계약을 취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가스 현물 가격 5배 폭등, 장기계약 파기해도 위약금은 현물 가격의 4% 수준

SEFE는 러시아 국영 천연가스 회사 ‘가즈프롬’ 계열사였다가 독립한 곳이다. SEFE는 위약금으로 계약 가격의 20%를 ‘게일’에 줘야 하지만, 현물 가격이 계약 당시 가격의 5배로 올라 위약금은 현물 가격의 약 4% 수준에 불과하다.

따라서 위약금을 내더라도 새로 계약을 맺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계산이 작용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SEFE의 계약 파기로 인해 게일은 지난주 현물 시장에서 이달 선적분 천연가스를 기존 장기계약 가격의 4배 가까운 100만BTU(열량단위)당 40달러 가까이에 사들여야 한 것으로 알려진다.

블룸버그는 SEFE의 사례에서처럼 장기계약의 ‘신성한 의무’가 흔들리고 있다며, 이런 취소 사례는 현물 시장의 높은 가격을 감당할 수 없는 국가들의 에너지 공급 부족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국내 천연가스 도입 물량의 80% 이상은 장기계약이라, 수급에는 문제가 없다’는 정부의 안이한 자세로 인해, 국내 천연가스 수급에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이다.

산업부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 3월부터 동절기 대비 비상체제를 가동하고 물량 조기 확보에 나선 만큼 올 겨울철 가스 대란은 없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수급 관리를 강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산업부는 현물구매·해외지분투자 물량 도입 등을 통해 필요 물량을 조기에 확보하고, LNG 대신 액화석유가스(LPG)를 일부 공급해 LNG 소비량을 줄일 계획이다.

가스요금 인상 계획 없다는 정부 VS. 인상해야 한다는 가스공사

국제 천연가스 가격이 치솟고 원/달러 환율도 급등하면서 10월 도시가스 요금이 또다시 인상될 예정이다. 사진은 지난 8월 서울 주택가 도시가스 계량기 모습. [사진=연합뉴스]
국제 천연가스 가격이 치솟고 원/달러 환율도 급등하면서 10월 도시가스 요금이 또다시 인상될 예정이다. 사진은 지난 8월 서울 주택가 도시가스 계량기 모습. [사진=연합뉴스]

정부는 10월 이미 예정된 가스요금 인상 외에 추가 인상을 하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산업부·기재부 등은 국제 천연가스 요금 폭등으로 10월로 예정된 민수용 도시가스 정산단가 인상 외에 기준원료비 인상을 논의하고 있지만, 물가 부담을 이유로 추가 인상은 여의치 않아 보인다. 유럽발(發) 에너지 대란으로 한국가스공사의 실적 악화도 심각하지만, 그보다는 물가 안정이 우선이라는 기조에 힘이 실리는 실정이다. 따라서 비싼 천연가스를 싸게 파는 에너지 공기업의 경영 악화 또한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15일 개최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제 에너지 가격 급등과 각 회사의 재무 상황(악화) 문제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국민 부담 문제도 있다”며 “9월이든 10월이든 적정한 때가 되면 입장을 정리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정부 통제 아래 있는 전기요금과 달리 도시가스 요금은 명목상으로 연료비와 연동해 오르지만 실제로는 미수금으로 묶여 있다. 이 미수금은 지난해 말 1조7000억원이었으나 가스공사는 내년 중 12조6000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수금이 정산되기까지는 가스공사의 부채로 메우는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지난해 말 378.9%였던 회사 부채비율도 이 추세라면 올 연말 437.3%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가스요금 현실화를 서둘러야 한다고 제언하고 있다. 늦어질수록 수습이 어려워져 국내 에너지 공급 안정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가스물량은 11월 충분히 확보...가격 폭등 요인이 리스크

이런 가운데 채희봉 한국가스공사 사장이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도시가스 요금 인상 필요성을 제기했다. 채 사장은 "물가관리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문제를 뒤로 미루는 임시방편적 접근을 할 경우 미래에 더욱 큰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고 밝혔다.

채 사장은 해외 주요국 대비 낮은 가스요금을 꼽으며 "도시가스 요금이 국제수준과 지나치게 괴리돼 있어, 더 이상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2021년 3월과 2022년 3월 사이 주택용 도시가스 요금이 네덜란드는 3.2배, 독일은 3.5배, 영국은 2.8배 등 올랐지만, 가스공사는 4% 정도 극히 미미한 수준만 인상했다는 것이 채 사장의 설명이다.

그러면서 현재 가스공사의 도시가스 요금은 원가의 약 40% 정도에 불과한 수준으로, 최소한 원가의 80% 수준 이상으로 인상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채희봉 한국가스공사 사장은 16일 페이스북을 통해 ‘도시가스 요금 인상 필요성’을 언급했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15일 국회에서 열린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채 사장이 "적정한 규모의 도시가스 요금 인상이 필요하다"고 밝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채희봉 한국가스공사 사장은 16일 페이스북을 통해 ‘도시가스 요금 인상 필요성’을 언급했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15일 국회에서 열린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채 사장이 "적정한 규모의 도시가스 요금 인상이 필요하다"고 밝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TV 캡처]

도시가스요금은 공기업인 가스공사의 공공성 기능을 통해 그간 효과적으로 억제돼 왔지만, 원가에 못 미치는 가격으로 공급을 하고 있어 미수금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채 사장은 이와 관련해 "지나친 도시가스요금 억제는 미래세대와 소비자에게 이(미수금)를 전가하는 문제가 있다"라며 "가스공사의 미수금은 추후에 '정산단가'라는 형태로 연도별로 미래 소비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부과해서 회수해야 하는데, 오늘의 소비자가 회피하는 부담을 미래소비자가 떠안아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했다.

따라서 채 사장은 "유례없는 국제 에너지정세 속에서 종전의 정책을 답습하기보다는 근본적이고 새로운 정책적 모색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채 사장은 겨울철 천연가스 수급관리에 대해서는 "오는 11월 가스공사 저장탱크 77개를 가득 채울 정도의 천연가스를 이미 확보했다"며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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