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전 조달청장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아비뇽에서 돌아와 로마에서 선종한 후, 새 교황을 뽑기 위한 콘클라베가 열렸다. 전임교황의 걱정대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민감정이 표출했다. 아비뇽 유수의 재현을 두려워한 로마시민들이 콘클라베 주변을 에워싸고 이탈리아 출신 선출을 외치며 농성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출신이 대부분인 추기경들은 신변에 불안을 느꼈다. 서둘러 나폴리 왕국의 바리 대주교 바르톨로메오를 새 교황 우르바노6세로 선출했다. 추기경들은 나폴리왕국이 프랑스 왕가의 지배하에 있으므로 그가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친프랑스 성향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아비뇽유수를 마무리하고 로마시대를 열어가야 하는 격변기에 새 교황은 서 있었다. 그러나 시대의 모순을 풀어가기에는 급진적이고 과격했던 것 같다. 경솔하고 독단적이며 폭력적인 성품으로 묘사되고 있다(위키백과). 추기경들에게 욕지거리를 했고, 반발하자 몸싸움을 했다. 위로부터의 개혁을 선언하며, 공식석상에서 추기경들이 뇌물을 받는다거나, 수행원이 많고 사치스럽다는 등 비난을 했다. 교황이 아비뇽에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프랑스 왕 샤를 5세와 멀어졌고, 프랑스 출신이 너무 많아 이탈리아 추기경을 많이 뽑아야겠다는 발언으로 자기 속내를 드러냈다. 교황의 자리가 얼마나 정치적이고 주변 강대국의 이해와 얽혀있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생각나는 대로 발언을 하는 트럼프 전 미국대통령이 연상된다. 자신의 본거지인 나폴리왕국의 조반나 여왕도, 이탈리아 출신 추기경들도 돌아섰다.  

  교황이 된지 5개월이 지난 후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이 모반을 일으켰다. 로마인근 아나니에서 프랑스 추기경들은 그의 선출이 로마 폭도들의 위협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했다. 곧이어 나폴리에 가까운 폰디에서 프랑스 왕의 지원을 받으며 로베르 추기경을 클레멘스 7세로 선출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활동한 무늬만 제네바 사람이었고 이 음모를 주도했다. 우르바노6세 교황의 선출 당시에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다가 교황의 개혁이 자기들 이익에 배치되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명백한 쿠데타였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프랑스가 있었다. 친프랑스인 나폴리, 스페인, 스콧틀랜드가 대립교황을 지지했다. 
 우르바노 6세를 보좌하던 추기경들은 대부분 프랑스출신이었고 이탈리아 출신 추기경들도 아비뇽시절에 선출된 자들로 친 프랑스 성향이라 봐야했다. 교황은 철저히 혼자였다. 개혁은 기득권을 줄이는 것이고 프랑스나 추기경들의 이익에 배치되었다. 개혁을 내세우자 모두가 적으로 변했다. 나폴리여왕 조반나1세가 돌아선 것도 우르바노 교황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앙주가 출신으로 프랑스 정책을 따른 정치적 선택이었다. 조반나 여왕은 클레멘스7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아비뇽 도주를 도왔다. 우르바노6세를 친프랑스 성향이라 생각하고 뽑았는데 반프랑스 입장을 취하니 배신감도 느꼈을 것이다. 

  교황 우르바노 6세는 대립교황으로부터 파문과 퇴위 압력을 받았지만 거부했다. 이탈리아의 국민감정이 폭발하여, 시에나의 성카타리나는 프랑스 추기경들을 ‘사람의 탈을 쓴 악마들’ 이라고 했고, 피렌체의 정치가 콜루치오 살루타티는 프랑스 추기경들이 ‘갈리아 교황’을 택한 것이라며 비난했다. 프랑스와 경쟁하는 잉글랜드, 플랑드르, 독일,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포르투갈은 우르바노를 비호했다.  
 
  유럽은 완전히 둘로 갈라졌다. 2명의 교황이 각각 자기편 성직자를 임명함에 따라 각 지역 교회는 두 명의 주교, 두 명의 주임신부를 갖게 되었고 신자들도 양측 추종자로 분열됐다. 교황들과 임명받은 성직자들은 서로 상대방을 파문했다.

  교황 우르바노 6세는 곧 나폴리 왕국과의 분쟁에 휘말려 들어갔다. 대립교황을 편든 여왕 조반나 1세를 파문하고 나폴리의 왕관을 두라초의 카를로에게 넘겨주었다. 나폴리의 일부지역을 자기 조카들이 넘겨받는 약속과 함께…. 여왕에 대한 보복이자 나폴리를 장악해야 로마가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카를로3세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그를 압박하기 위해 나폴리에 갔다가 6개월 동안 나폴리 군에 포위되어 고초를 겪었다. 제노바 총독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도주할 수 있었으나 그 직후 우르바노 6세를 제거하려는 추기경들의 음모를 발견하고 관련자들을 처형했다. 1386년 카를로 3세가 사망한 후 나폴리를 장악하려 애썼고, 로마 북쪽의 비테르보와 페루자를 확보했다. 1388년 10월 초 로마에 도착해서 교황이 없는 동안 주인행세를 하던 공화주의자들을 몰아내고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우르바노 6세의 죽음도 대립교황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대립교황 클레멘스7세가 자신을 우르바노 6세의 후임으로 인정해 달라고 했지만 로마의 추기경들은 보니파키오 9세를 새로 뽑았다.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는 1377년 2월에 있었던 체세나(Cesena) 대학살을 승인한 책임자로 최소 3,000명에서 최대 8,000명에 달하는 체세나의 시민을 죽인 것으로 추정된다. 교황령 군대를 지휘한 최고 책임자로서 저지른 이 행위로 '체세나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위키백과). 이런 인물을 이탈리아 사람들이 교황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아비뇽 유수 시절의 교황들보다 프랑스 왕에게 더 휘둘리는 신세가 됐고 1394년 아비뇽에서 죽었다. 말년에는 목표를 상실했는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여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대립교황 시대를 낳은 책임을 우르바누스 6세의 성격 탓으로 돌리는 주장도 있다. 역사의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로마에 온 프랑스 추기경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진실하고 솔직하게 교회 앞에 놓인 현실을 설득하면서, 프랑스의 기득권을 서서히 내려놓도록 속도 조절했다면 이런 극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우르바노 6세가 주도면밀하게 때를 기다리는 신중함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프랑스, 영국, 독일 등 강대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프랑스는 기득권을 놓치기 싫어했다. 교황의 로마 정착이 평화적이고 수월하게 진행되리라 생각하는 것은 너무 낙관적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민감정도 대립하고 있었고 추기경들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로마는 황폐화되어 있었고 정정도 불안했다. 혁명을 꿈꾸는 공화주의자와 교황이 없는 동안 왕노릇에 익숙한 귀족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상황이 악화될 때마다 프랑스 추기경들은 아비뇽에 돌아가자고 했을 것이다. 역사는 희생양을 필요로 했는지 모른다.
  우르바노 6세는 신심이 깊은 수사출신으로 소박하고 검소했으며 공부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위키백과). 교황이라는 직책의 부담과 신이 맡긴 업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조급함까지 겹쳐 화를 내고 폭언했고, 꼭두각시가 되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아비뇽유수와 같은 사건은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되며, 이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분투는 성전(지하드)이며 십자가의 삶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프랑스의 이익에 배치되는 그의 주장에 추기경들 모두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자기주장을 관철하려다보니 사사건건 부딪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부족한 역량에도 자기 의무를 다하기 위해 싸우며 분투한 것은 진실하고 단순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적당히 타협하고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교황청을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그 정신은 높이 살만하지 않은가? 교황의 로마정착에도 궁극적으로 기여했다고 본다. 
 
  윤석열 대통령도 우르바노 6세 만큼이나 어려운 여건에 처해있다. 여소야대의 정치상황도 그렇고, 시장경제를 위협하는 임대차3법, 기울어진 노사관계, 중대재해 처벌법 등 전 정부가 박아놓은 대못들은 그대로 있다. 미국과 중국의 대결,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무역적자 확대 등 외부충격도 만만치 않다. 이러한 중차대한 시기에 국민의힘은 내부 싸움만 하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지 세력의 단결이 우선이다. 사태의 원인이 무엇이든 윤대통령은 무한책임이 있다. 당의 화합과 시대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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