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전 조달청장

  유대인에게 바빌론 유수가 있었다면 카톨릭에는 아비뇽 유수가 있었다. 유대인들은 전쟁에 져서 포로로 바빌론에 끌려갔지만, 아비뇽 유수는 교황이 스스로 선택한 귀양살이였다. 왜 이런 결과가 초래되었는지 그 과정이 흥미롭고,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보니파키우스 8세가 필립 4세와의 정쟁에서 패배하여 선종한 후, 베네딕토 11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새 교황은 사건의 몸통인 필립 4세를 파문하지는 못했지만, 보니파키우스 8세를 직접 공격하고 행패를 부려 죽음에 이르게 한 프랑스 재상 노가레 등 관련자 13명을 파문했다. 그러나 곧이어 베네딕토 11세가 선종하자, 노가레 등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한마디로 혼돈의 시기였다. 차기 교황 선출도 프랑스파와 이탈리아파가 팽팽하게 대립해서 1년이나 끌었다. 장기전이 되자,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는 이탈리아는 힘을 쓰지 못했고 조직적으로 지원하는 프랑스로 권력이 넘어갔다. 필립 4세가 적극적으로 후원한 프랑스 출신 보르도 주교 베르트랑이 1305년 클레멘스 5세 교황으로 즉위했다. 동시대 연대기 작가 조반니 빌라니에 따르면, 베르트랑은 생통주의 생장당젤리 수도원에 있을 당시 프랑스 왕 필립 4세를 만나 서로 아는 사이였고, 베르트랑의 교황추대 논의도 사전에 있었다고 한다(위키백과). 

 필립 4세는 도움을 준 대가로 클레멘스 5세에게 전임교황에 의해 파문당한 노가레 등을 복권시키고, 프랑스 성직자에게 연 수입의 10% 세금을 5년간 허락하며, 보니파키우스 교황을 공격한 콜론나 사람들의 복권과 재산반환을 요구했다. 더불어 보니파키우스 전 교황에 대한 추모를 범죄로 간주하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클레멘스 5세 교황은 왕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고 보니파키우스 8세에 대한 사후재판까지 열었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대단히 이성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재판부는 보니파키우스 8세가 “처녀가 아이를 낳고, 빵이 그리스도의 살로 변한다는 믿음을 비웃었고, 영계의 존재나 육체와 영의 부활을 부정했다.”라는 증언을 끌어내었다. 유죄가능성이 커지면서 클레멘스 5세는  전 교황에 대한 판결이 부담스러웠던지, 최종 판결 전에 이 사안을 빈 공의회에 넘겼다. 빈 공의회에서는 보니파키우스 8세에 대해 무죄를 선언함에 따라 선배교황을 유죄로 만드는 과오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311년 클레멘스 5세는 다시 한 번 필립 4세의 꼭두각시로 전락해서 명확한 이유도 없이 템플러기사단(성전기사단)에 대한 이단재판을 허용했다. 

  교황이 아비뇽에 거처를 마련한 것이 가장 큰 과오였다. 교황궁이 있는 로마에서 업무를 하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프랑스 땅 리옹에서 취임한 후 아비뇽에 머물렀다. 프랑스 접경지역이라고는 하나 프랑스 왕의 영향권 안이었다. 필립 4세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한다(위키백과). 

교황 아비뇽 유수는 프랑스인을 위한 교황 이미지 만들어

 교황은 유럽 각국의 왕들을 통솔하는 위치에 있었다. 군대가 없는 교황이 왕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국가 간에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노련한 외교술이 요구된다. 그런데 교황이 프랑스에 머물게 되면 누구나 프랑스 편으로 보게 된다. 실제로도 아비뇽의 교황들은 전쟁 비용을 빌려주는 등 프랑스에 유리한 정책을 폈다. 따라서 영국, 독일 등 경쟁국의 왕과 백성들은 교황을 자기네 교황이라 여기지 않게 되었고 교황청의 파문과 금지를 점점 무시하게 되었다(윌 듀런트 문명이야기 5-1). 로마에 머물러도 마찬가지 아니냐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 이탈리아는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등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래서 교황이 이탈리아에 얽매이지 않고 중립적일 수 있었다. 

  물론 로마에 가면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보니파키우스 8세가 린치당하고 베네딕트 11세가 독살당한 곳이다. 그래도 기독교 세계 최고 통치자의 위엄을 회복하려면 죽음을 무릅쓰고 가야 했다. 죽음과 싸우는 전사가 성직자가 아닌가. 안 그래도 필립 4세의 꼭두각시라는 비난을 받는 터에, 프랑스에 눌러앉은 것은 이런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해 준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보니파키우스 8세를 죽게 만든 필립 4세를 증오한 것은 당연하다. 클레멘스 5세가 그와 한편임을 공표한 꼴이니 로마로 가기 힘들어진 것이다. 스스로 만든 위기가 아니겠는가. 로마라는 상징과 카리스마를 이용해야 교황의 권위가 강화될 수 있었다. 클레멘스 5세는 유럽 전체의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기보다는 프랑스 왕의 봉신이 되는 데 만족했던 것 같다. 

  교황이 되자마자 프랑스인 추기경을 9명이나 늘린 것도 자기 뜻을 쉽게 관철하고 이탈리아를 견제하려는 조치로 보이지만 노골적이고 편향적이다. 교황은 신앙과 도덕을 선양하는 자리다. 매사에 공정해야하고 명분과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된다. 보니파키우스 교황이 속세 권력의 공격으로 죽음을 맞이했고 교황청은 엄청난 위기에 처했다. 총칼 없는 교황이 위신과 권위를 되찾기 위해서는 기독교 세계의 모든 성직자를 한마음으로 단결시켜야 했다. 프랑스 사람 위주로 교황청을 꾸리자는 것은 교황청이야 망하든 말든 내부에서 자기 세력의 확보에만 신경 쓴 모습이다. 교권을 민족주의, 즉 프랑스의 이익에 팔아버린 꼴이 아닌가. 

 성전기사단의 해체에 협력한 것도 스스로 자신의 권력수단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성전기사단은 국경을 초월해서 활동하도록 교황이 인정한 군대이자 금융인프라로, 당시 유럽이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어 불편했던 거래와 이동을 도와주는 통일된 행정과 조직을 제공했다. 실제로 그들이 구축한 금융인프라는 기독교세계 전체에서 활용되고 유럽을 묶어줘서 요즘의 EU처럼 민족국가를 초월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당연히 교황의 통치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을 해체하고 나서 무엇으로 민족주의에 기반한 왕의 도전을 견딜 수 있었겠는가? 

클레멘스 5세 교황은 개인적으로는 청렴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고, 경건함을 실천했다고 한다. 평범한 시대였더라면 교회의 자랑거리가 되었을 사람이란 평가도 받는다(윌 듀런트 문명이야기 5-1). 또 프랑스 성직자들이 아비뇽 이전에는 이탈리아 사람들에 비해 소외 받았고 당연히 이를 역전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파당위해 전체 저버리는 지도자 안돼

그래도 클레멘스 5세가 필립4세에 대한 보은으로 유럽 전체의 기독교 제국을 무너뜨리는 정책을 결정한 것은 공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인간적인 의리에 집착해서 신과의 의리를 저버린 것으로, 종교개혁의 불씨는 이때 싹텄다고 봐야 한다. 철인 왕이 되기를 스스로 포기한 교황이었다. 
아비뇽 시대를 신도 싫어했던 것 같다.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30%가 희생된 것도 아비뇽 유수 때(1347~1350)였고,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도 이 시기에 발생했다. 

우리는 전체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자신이나 파당의 이익을 위해 전체를 저버리는 행위를 하는 지도자를 종종 보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문재인 정부의 부자 증세 등 편 가르기다. 집권자가 하지 말아야 할 금기는 부분을 위해서 전체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클레멘스 5세와 같은 실책을 범하게 된다./김상규 전 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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