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서양사를 읽다보면 포장 안 된 울퉁불퉁 지방도를 시속 100km로 달리는 것 같다. 제국이 쇠락하고(로마), 아버지 죽었다고 왕국이 갈라지고(동중서 프랑크), 황제와 교황이 싸우고(굴욕과 파문) 가문과 가문이 부딪히는 가운데(합스부르크와 발루아) 틈틈이 이민족이 쳐들어오고(이슬람과 몽골) 한동안 지중해를 무대로 아웅다웅 하더니만 불쑥 대서양으로 빠져 나가는 등 하여간 무지하게 호흡이 빠르고 역동적이다. 당연히 중심도 없고 분열이 일상이다. 발칸 반도에서 이탈리아 반도로 그리고 다시 유럽 중앙으로 코어(core)가 이동하며 유럽은 문명의 형질 변화를 거듭했다.

천하통일은 중국을 설명하는 핵심어

반면 동양 문명은 동태적이다. 동양에 있었던 두 개의 문명 중 하나는 소실되고 다른 하나의 문명은 발전이 아니라 반복을 거듭했다. 중국이라는 제국이다. 지리적 요인은 중국의 과거와 현재를 설명하는 키워드다. 황허는 수량이 풍부한 강으로 물을 다스리는 일에만 성공하면 쉽게 나라가 만들어진다. 인구도 많고 땅도 넓으니 그곳이 자연스럽게 문명의 중심이 된다(그래서 이름도 중원中原). 지리적 중심이 확고하다는 것은 이동의 여지가 적고 문명의 통일지향적인 성격이 강해진다는 의미다. 천하통일은 그래서 중국인들에게 각별하고 생래적인 욕구다. 천하통일을 처음 이룬 진시황 이후 두 번의 분열 시기를 거치긴 했지만 중국은 구심점이 있었기에 분열 기간에도 늘 통일을 지향했다. 그 결과가 진에서 한, 수, 당, 송, 원, 명, 청으로 이어지는 중국식 제국의 역사다(진시황 이후 현재까지의 중국 역사를 계량화하면 통일 기간은 70%가 넘는다). 중국식 제국은 성격도 내내 같아 천자를 중심으로 하고 유학으로 방어막을 친 중앙집권적 제국 체제다. 이게 우리에게는 익숙하게 보이지만 지리적 중심이 있고 단일 이념으로 통일된 거대한 제국이 이름만 바꿔가며 무려 2천년이나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다. 놀랍지 않다면 로마 제국의 영토를 바탕으로 게르만 제국, 프랑크 제국, 에스파냐 제국, 잉글랜드 제국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쓰다 보니 이건 놀라운 게 아니라 신기한 거네). 많이 이상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제국 체제가 계속 이어지는 게 오로지 나쁜 것일까. 중국은 진시황의 통일 이후 중앙집권적 제국 체제를 계속해서 실험해 왔고 그 완성이 송 제국이다. 제국마다 나름 보강은 있었지만(중화 사상, 유학, 율령, 과거제 등) 실험은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중국식 제국이 가진 문제점이 송 제국에서 다 드러났기 때문이다. 초대 황제의 카리스마가 사라지면 중앙집권적 제국 체제는 환관과 사대부가 날뛰고 토지제도와 세금이 엉망이 되고 백성들이 땅을 버리고 떠돌기 시작한다. 짧으면 50년, 길어봐야 100년이 못 되어 제국은 뿌리부터 흔들리고 망할 날만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이 혼란의 중세를 끝내고 세계화의 단계로 접어드는 그 시기에 중국의 선택은 명 제국이라는 제국 체제 실험의 재탕이었다. 주원장의 명 제국은 조광윤의 송 제국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역대 한족 제국들이 저지른 실패를 다 모아 놓은 것이 명 제국이었다. 허세는 더 부렸다.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고 벌인 일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화의 남해 원정 함대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남을 알기 위해 서쪽 바다로 원정을 떠났다. 정화의 함대는 나를 알리기 위해 그 큰 배를 바다에 띄웠다. 무역의 의지도 없었고 탐험하겠다는 호기심도 없었으며 당연히 항해 기록도 제대로 남기지 않았다.

중심과 질서는 제국의 기본

제국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첫째도 질서, 둘째도 질서, 셋째도 질서다. 그리고 이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정치와 제도다. 법치주의를 서양 문명의 산물로 알기 쉬운데 법치는 동양 문명이 거의 천 년을 앞섰다. 앞섰다고 좋은 게 아니다. 서양법이 주로 민법인 반면 동양(중국)은 주로 형법이다. 다스리기 위해 법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반면 민법의 출발인 로마법은 원활한 상거래가 목적이었다. 경제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정치는 인위적인 것이다. 경제는 기본적으로 밖으로 팽창하려는 속성이 있다. 그런데 중국식 제국은 이 펄떡펄떡 뛰는 속성을 모두 정치에 종속시켰다. 인위적인 것이 자연스러운 것을 짓누르고 억압한 역사가 중국식 제국의 역사다. 법과 제도로 모든 것을 처리하겠다는데 뭐가 나쁘냐고 하실지 모르겠다. 물론 발상은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답다. 그러나 이게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누구나 인정할 만큼 보편, 타당해야 하며 일탈 방지를 위한 감시 장치 작동이 필수다. 이게 가능한지 타당성부터 살펴보자. 가뜩이나 넓고 인구 많고 지역마다 사정이 천차만별인 곳이 중국이다. 이걸 하나의 법과 제도로 다스린다? 이 발상은 백성들에게서는 절대 나올 수 없다. 오로지 중앙집권적이고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으로만 가능하다(최저 임금을 시행하기 전 우리나라 편의점 임금의 지역별 차이를 떠올려보시라). 토지 제도를 보자. 건국 초기에는 땅을 죄 몰수하기 때문에 수학이 필요하지만 나중에는 사회학이 필요해진다. 토지를 둘러싼 수 많은 사회 변동 때문이다. 그런데도 애초에 정해 놓은 법과 제도를 그대로 강행한다. 사람이 자라 옷이 안 맞는 데 옷에 사람을 맞추라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감시 장치 작동도 그렇다. 서양의 관료는 기본적으로 시민들이 선출한다. 동양의 관료는 과거를 통해 나라에서 임명한다. 어느 쪽이 부패에 취약할까. 청 제국 옹정제는 관리들의 부패를 막기 위해 ‘양렴은제’라는 제도를 시행한 적이 있다. 당시 관리들은 녹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가로 세금을 걷어 그걸로 생활을 했다. 일부만 그런 게 아니라 전국이 다 그랬다. 청 제국 옹정제는 아예 관리들에게 세금의 추가 징수를 허용하고 거기서 나온 재원으로 청렴을 배양하는 돈이라는 뜻의 양렴은養廉銀을 주도록 했다. 부패와 탈법을 아예 제도로 만들어 준 것이다. 그럼 앙렴은을 받은 관리들은 불법 추가 징세를 그만 두었을까. 질문 자체가 멍청해서 하고도 민망해진다. 이게 중국식 제국의 법과 제도의 실상이다. 오늘 날 중국이 부패 관리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등 상당히 과격한 처벌을 하는 것은 부패과 멸국의 상관관계에 대한 공포스러운 학습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개혁 대신 정치 안정

중화인민공화국은 불행히도 이 중국식 제국의 연장선상에 있다. 천자를 중심으로 공산주의로 방어막으로 친 중앙집권 체제다. 시진핑의 황제 등극은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고질적인 중국 병의 재발일 뿐이다. 법과 제도로 무장한 중앙집권적 중국식 제국은 닫힌 제국이다. 닫힌 것은 썩는다. ‘빚의 만리장성’이라는 책이 있다. 중국에서 오래 활동한 미국 기업가가 쓴 책이라는데 내용 중에 이런 게 있다. “중국은 reform을 하지 않은 채 stability(정치 안정)로 가고 있다. reform을 하게 되면 stability가 깨지기 때문이다. 중국이 경제 성장이 안 되는 것은 정치 안정을 위해 reform을 안하는 것의 결과다.” 이 문장은 명 제국에 혹은 청 제국에 적용해도 하나도 안 이상하다. 중국의 역사는 늘 인위적인 통일을 지향했고 그러다보니 내내 정치와 제도가 중요했다. 2천 년 세월 동안 그 사실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중국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중국식 제국의 결말도 (현재대로 간다면) 불 보듯 빤하다. 아울러 대한민국이 가야 할 방향도 명확해진다. 같이 놀면 같이 망한다.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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