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석우 객원 칼럼니스트

3월 9일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은 교착상태에 빠진 한일관계도 정상화할 전환점이 되었다.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양국관계가 지금이 최악이라고 야단들이지만, 그 책임은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전 총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국내 정치에 이용하기 위해 반일, 혐한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특히, 문재인이 친일·반일 프레임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의도가 불순하였다. 일반 국민의 상호 인식이 최악이었던 게 아니다.

윤 당선인의 대외정책은 미·중 패권경쟁과 신 냉전체제 환경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을 추구한다. 해법은 한·미·일 협력 강화다. 이미 바이든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와의 통화로 교감을 시작하였다. 식민통치를 거친 한일 양국 간에 앙금이 없을 수는 없으나, 이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할 단계에 이르렀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시대를 앞서갔다. 국제정치의 대가였고 외교의 천재였다. 한미동맹을 확실하게 끌어내서 김일성 집단의 남침을 물리쳤다.

이승만은 ‘반공’과 함께 ‘반일’을 주요 정책으로 내걸고 젊은 세대에게 반일교육을 강화하였다. 왜 그랬나? 신생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애매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실로 한글사용을 금지하고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제하면서 문화 말살을 시도한 결과였다. 해방된 후에도 일본어가 일상생활에 만연했고, 전문분야에서는 일본어가 없으면 어려울 정도였다. 만약 이승만의 반일교육이 없었더라면, 국제사회가 한국을 한국이 아니라 제2의 일본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 색깔을 빨리 빼내려고 한 것이다.

1961년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부는 도탄에 빠진 민생을 해결해야 했다. 당시 한국 국가 예산의 절반을 미국의 원조로 채웠다. 줄어드는 미국의 원조를 대체할 재원은 일본 자금이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받아낸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의 일본 경협자금을 경제건설의 종잣돈으로 삼았다. 일본의 기술도 함께 들여왔다. 제2차 대전 후 동남아의 필리핀,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들이 한국보다 많은 배상금을 받고서도 변변한 공장 하나 세우지 못한 결과와 비교하면 박정희 정부는 자원 배분과 발전 전략을 매우 효율적으로 추진했다. 그래서 한국경제를 성공시켰다.

6.25동란에 미국의 참전이 없었더라면 일본의 영향력이 압도적일 수밖에 없었다. 식민통치의 흔적을 지우는 데는 2배 이상 시간이 걸린다고들 한다. 게다가 해방 후 국가 건설하는 데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엘리트들은 일본교육을 받았기에 가까운 일본에서 선례를 구하는 것이 편했다.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찾는 것은 비용과 시간이 너무 들었다. 한국에서 국제사회로 나가는 관문 자체가 일본이었다. 여의도 공항을 출발한 프로펠러기가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국제선에 연결되었다.

한국에서 공장을 짓는데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식민지 교육의 결과로 맺어진 인적 관계뿐만 아니라, 지리적 역사적인 근접성 때문에 일본기업이 최저 가격을 제시했다. 한국경제를 일본이 독점하다시피 했다. 반일 정책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통해 새로운 것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구미 유학파가 성장하기 전까지는 일본의 영향이 압도적이었다.

해방 후 한일관계를 크게 정리해보면, 한편으로는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반일(反日) 정책을 내세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건설에 일본을 이용하는 극일(克日)의 노력을 병행하였다. 한국의 근대화에 일본이 축적한 경험과 자산을 활용한 것이다. 드디어 삼성과 같이 일본을 따라가던 기업이 오늘에는 일본을 능가하게 되었다. 철강, 조선, 화학, 기계, IT산업 등 전 분야에서 일본과는 협력과 경쟁을 하게 되었다. 중공업의 기반이 약했던 한국으로서는 일본을 통해 산업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극일의 과정이었다. 그 후 일본의 한계를 넘어서 미국과 유럽의 최첨단 기술과 문화에 직접 연결함으로써 극일 과정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식민통치 역사에서 연유하는 양국 간 갈등, 일본인의 우월감과 한국인의 열등감이 빚어내는 감정적 응어리가 수시로 폭발하였다. 1953년 구보다(久保田) 망언, 1982년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파동, 1986년 후지오(藤尾) 문부상 망언 등 심심하면 태풍이 일어났다.

한국은 일본이 과거사를 과도하게 미화하려는 시도들에 눈감지 않았다. 일본의 역사왜곡 망언,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신사 참배문제, 재일한국인 차별에 대한 항의와 함께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 침해에 대한 항의이기도 하였다. 덩치 큰 일본이 작은 한국의 추궁에 쩔쩔매는 모양새가 되었다. 일본 경제가 세계 제1이라고 모두가 일본을 경이롭게 바라볼 때 한국만은 대수롭지 않게 큰소리치곤 하였다. 한국의 주장에 국제사회도 수긍하였고 일본도 수세적으로 되었다. 경제 대국 일본이 정치 대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주변국과의 원만한 관계 유지도 필요하다. 특히 한국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으면 대국 역할을 하기에 약점이 된다.

만약이라는 가정을 해 본다. 일본의 정치인들이 전후 서독과 같이 식민통치와 2차대전의 책임을 진솔하게 인정하고 주변국과의 관계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더라면 과연 어떤 결과가 되었을까? 아마도 한국은 반일감정을 크게 터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은 1995년 유엔헌장 개정 시 안전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역사를 과도하게 미화하려는 일본의 편협함에 반발하던 주변국들이 일본의 정치적 부상에 반대하였다. 한국이 그 중심에 있었다.

반일과 극일 과정에서 한국은 국제사회의 공감을 중시하였다. 때로는 김대중 납치와 같은 일로 양국관계를 악화시키기도 했지만, 한국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보편성 있는 주장을 펼쳐 나갔다. 보편적 가치에 일본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예가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 문제였다. 1991년 재일한국인 3세의 법적 지위에 관한 양국 간 합의를 통해 차별의 상징이던 지문날인이나 외국인등록증 상시 휴대 문제도 해결하였다.

한국의 경제 수준은 이제 일본에 육박하게 되었다. 원칙이나 이치에 맞지 않는 무리한 주장은 한국도 피하는 것이 좋다. 떼쓰기는 스스로 삼가야 한다. 2018년 10월 30일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판결로 일본기업의 자산을 압류함으로써 일어난 양국 간의 갈등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제2조 제3항의 정신에 따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양국 및 양국 국민 간 청구권 등 권리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원칙을 존중하는 것이다.

1965년 청구권협정을 체결한 후 한국 내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1970년대 1차 시행하였다. 2005년 8월 노무현 정부가 설치한 민관공동위원회는 강제징용과 관련해 “정부가 일본에 다시 법적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신의(信義) 원칙상 곤란하다”고까지 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피해자 보상이 충분하지 않았음을 고려하여, 2007년 특별법을 제정하여 추가 보상을 하였다. 징용피해자 7만여 명에게 6천억 원을 지급하였다.

피해자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윤미향 같은 세력이 개인적 이익을 위해 계속 우려먹는 구조로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앵벌이처럼 물고 늘어지는 건 작은 것을 얻기 위해 큰 걸 잃는 격이다. 일본에 대한 도덕적 우월성을 버리는 우(愚)를 범하는 것이다.

또한, 반일과 친일 프레임을 만들어 정권적 차원에서 국내정치에 이용하는 일도 피해야 한다. 진정한 극일의 완성이다.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선두에 선 대한민국이 자유와 평화와 번영을 위해 내딛는 미래지향적인 큰 걸음이다.

김석우 객원칼럼니스트(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 전 통일원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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