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의 흐름을 가늠해줄 첫 승부처는 한국과 미국의 ‘반도체 특별법’ 처리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 부문은 삼성전자가 확고한 글로벌 1위의 자리를 굳히고 있다. 그러나 비메모리 부문인 파운드리 반도체는 판세가 유동적이다.

대만의 TSMC가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고 삼성전자가 2위이지만, 조 바이든 행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미국 기업 인텔이 파운드리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만의 TSMC가 파운드리 반도체에서는 부동의 1위이다. 삼성전자는그 뒤를 바짝 쫓는 2위이다. [사진=연합뉴스]
대만의 TSMC가 파운드리 반도체에서는 부동의 1위이다. 삼성전자는그 뒤를 바짝 쫓는 2위이다. [사진=연합뉴스]

시스템 반도체 글로벌 1위인 인텔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사격을 받고 있다. TSMC와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공장 증설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다는 계획을 발표해놓은 상태이다.

파운드리 공급부족 사태 속 중국의 ‘공급 헤게모니’ 유지될 수도

더욱이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은 공급부족 사태에 시달릴 수도 있다는 전망이다. TSMC, 삼성전자, 인텔 등의 공룡기업들이 당장 공장 설립에 나선다고 해도 완공까지는 3년 정도 소요될 것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한미양국의 특별법이 2022년에도 처리되지 못할 경우, TSMC가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는 사태를 초래할 가능성도 우려된다. 컨설팅 업체 액센추어의 줄리 스위트 CEO는 최근 “공급망은 하룻밤 사이 이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며 “공급망 전환이 이뤄지는 데 시간이 걸리므로 중국이 계속해서 중요한 공급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인텔은 올해 건설하려는 대형 반도체 공장인 ‘메가사이트’를 반도체 수요처와 가까운 곳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반도체 공급망의 효율성을 강화하기 위해서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520억 달러 규모 ‘칩스 포 아메리카’ 입법 추진... 미 하원에서 난항

바이든 대통령은 2021년에 520억 달러(약 61조5천100억원) 규모의 '칩스 포 아메리카'(CHIPS for America Act. 반도체 제조 인센티브 법안) 입법화를 추진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미국 내 반도체 시설투자에 40%의 세액 공제가 적용된다. 한국 특별법의 세액공제 수준은 10%대 에 불과하다.

상원에서 발의된 이 법안은 지난 6월 상원을 통과했다. 하지만 하원 문턱을 넘지 못해 계류 중인 상태이다. 미 의회 입법절차에 따르면 상원에서 발의한 법안은 하원에서 최종 통과절차를 밟고, 하원에서 발의된 법안은 상원에서 최종 통과된다.

칩스 포 아메리카 법안이 하원에서 진통을 겪는 것은 외국기업에게도 반도체 보조금을 지급할지 여부를 둘러싼 이견 때문이기도 하다. 그만큼 미국내 여론은 복잡하다.

미 하원, 보조금 지금대상에 외국기업 포함 문제 등으로 이견?

인텔의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CEO)는 “보조금은 미 납세자의 돈이므로 미국 기업에만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외국기업을 배제할 경우 인텔의 ‘파이’가 더 커질 뿐만 아니라 TSMC와 삼성전자 등과 같은 강력한 경쟁자의 힘을 뺄 수 있다는 판단인 것이다.

시스템 반도체 글로벌 1위인 인텔은 바이든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파운드리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시스템 반도체 글로벌 1위인 인텔은 바이든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파운드리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미국 방문 기간 중 미 백악관 및 의회의 핵심인사들과 면담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구체적 발언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구속됐다가 ‘가석방’으로 풀려난 이 부회장은 ‘취업 금지’ 상태이다. 보조금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기에는 곤란한 것으로 풀이되는 대목이다.

업계에서는 ‘판’을 키우기 위해서 외국기업도 보조금 지급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미국 내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의 버트런드 로이 회장은 지난해 12월 7일 블룸버그통신과 인터뷰에서 “반도체 산업은 일본, 유럽, 북미 등의 여러 회사에 의존하는 고도로 복잡한 생태계”라며 “자국에서 반도체 산업이 번성할 환경을 조성하려면 이런 지원금을 모든 참여 기업이 국적에 상관없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와 TSMC에게도 혜택을 주자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SEMI는 전 세계 전자산업 공급망을 대표하는 산업협회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포함해 2400여개 회원사를 보유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 ‘반도체 특별법’ 제정 추진, 기재부와 민주당 일각의 반발로 해를 넘겨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5월 ‘K-반도체 전략’을 발표하면서 “반도체특별법 제정 논의를 국회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반도체 특별법인 ‘국가첨단전략산업특별법’을 연내 처리하겠다고 단언했다. 소위 ‘신속 제정’ 약속이다. 그러나 결국 해를 넘겼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된 상태이다. 지난해 12월 31일 열린 마지막 본회의에 상정되지도 못했다.

이 법안은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산업 분야에 투자·세제·인프라·인력 등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병철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송영길 민주당 대표, 유의동 국민의힘 의원이 각각 발의한 법안을 병합한 것이다. 여야가 함께 추진하는 법안인 만큼, 순조로운 국회 통과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기획재정부와 공정거래위원회 등 정부 부처가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예비타당성조사(예타) 신속처리 의무화’ ‘인프라 시설 의무 지원’ 등에 반대하면서 난항을 겪었다. 정부 여당은 당초 특별법안을 8월까지 마련할 계획이었으나, 부처 간 이견으로 두 달이나 지연된 10월에 발의됐다.

기재부, ‘예타 면제 조항’, ‘국고 지원 명시’ 등의 조항에 반대

기재부 등 정부부처와 민주당 내에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을 지원하는 법안을 만드는 데 대해 문제제기가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SK하이닉스가 지난 2월 1일 경기 이천 본사에서 'M16' 준공식을 개최했다. 사진은 SK하이닉스 경기 이천 M16 공장 전경.[사진=연합뉴스]
SK하이닉스가 지난 2월 1일 경기 이천 본사에서 'M16' 준공식을 개최했다. 사진은 SK하이닉스 경기 이천 M16 공장 전경.[사진=연합뉴스]

지난해 12월 8일 상임위에서 가까스로 통과된 이후에도 기재부가 국회반도체특위에 대해 대립각을 세우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첨단산업 특화 단지에 국가가 비용을 지원하는 법 조항(20조)을 놓고 특위는 ‘지원한다’라는 문구를 적었으나, 기재부가 ‘지원할 수 있다’로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특위는 예타 면제를 추진했으나, 기재부는 이 역시 반대했다.

지난 12월 13일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는 ‘국가첨단산업전략법’의 예타 관련 27조를 수정하자는 기재부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27조 3항은 “전략산업위원회에서 3분의 2 찬성으로 의결하고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된 사업은 바로 예타 면제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는데, 법사위 논의에서 '3분의 2 찬성'과 '국무회의 심의'가 삭제됐다. 예타 관련 조사를 '최대한 단축해 처리해야 한다'는 규정도 '신속하게 추진되도록 노력한다'로 바뀌었다. 특화단지 운영에 필요한 재정은 '지원한다'에서 '지원할 수 있다'로 변경됐다.

기재부는 이미 국가재정법 38조가 예타 면제의 경우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반도체특별법에서 굳이 예타면제를 규정할 경우 예타 제도 자체를 무력화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해왔다.

한미 양국 관계자, 상대국의 반도체 지원 거론하며 자국 의회 압박

한미 양국의 반도체 특별법 입법 경쟁은 새해에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양측이 서로 상대방의 ‘대대적인 반도체 지원’을 거론하면서 자국 의회의 법안 통과를 압박하고 있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지난해 11월 30일 기자들과 만나 “중국과 한국, 다른 나라들은 이미 반도체 제조에 아낌없이 보조금을 주고 있다”면서 “의회가 반도체 지원법을 통과시키지 않고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 등의 지원 사례를 거론하면서 미 하원의 칩스 포 아메리카의 조속한 통과를 압박한 것이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주요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반도체 자립을 위한 정책과 법안을 내놓고 있다”면서 “한국이 반도체 시장을 계속 주도하기 위해선 반도체특별법의 소속한 통과와 세액공제 제도 도입 등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기술패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 간의 헤게모니 전쟁은 격화 일로에 있고, 이는 한국 반도체 산업에 새로운 리스크가 되고 있다”면서 “반도체 산업에 대한 지원은 개별 기업이 아니라 국가경제의 차원에서 평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